스님의하루

2019.9.23 발우공양, 정토회 기획위원회
“수행자가 지켜야 할 원칙”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아침에 서울 공동체 발우공양에 참석한 후 오후에는 정토회 기획위원회 회의에 참석하여 정토회의 비전과 사업방향에 대해 다양한 안건을 주제로 기획위원들과 논의했습니다.

새벽 5시, 목탁 소리와 함께 하루가 시작됩니다. 어제 9-10차 백일기도 입재식을 했기 때문인지 예불을 하는 마음이 더욱 새롭습니다.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예불과 천일결사 기도를 마치고, 스님은 대중들과 함께 발우공양을 했습니다.


조용한 가운데 식사가 끝나고, 각자 어제 하루 동안 계율을 어긴 것에 대해 참회하는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저녁 예불에 빠진 사람, 비닐에 든 음식을 먹은 사람 등 많은 사람들이 계율을 어긴 것을 드러내어 말했습니다. 저녁 예불에 빠졌다고 참회하는 사람들이 특히 많았습니다.

이어서 대중공사가 끝나고 대중 대표가 스님에게 한 말씀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대중이 참회한 내용을 듣고 나서 계율을 지키는 자세에 대해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방금 저녁 예불을 빠졌다고 참회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런 상황이 일상화 된다면, 정토회에서는 전체적으로 회의를 해서 새로 계율을 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회적 활동을 하다 보니까 저녁 예불을 드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비효율적이다. 그러니 저녁 예불은 폐지하도록 하자. 폐지한다는 것은 예불을 안 한다는 게 아니라, 의무가 아닌 자율에 맡긴다는 뜻이다.’

이렇게 새롭게 의논해서 공지를 해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 ‘수행자로서 우리가 다른 건 못하더라도 아침과 저녁에 예불드리는 것만큼은 꼭 지키자’라고 정했으면 그것을 지키는 게 도리입니다. 지키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못 지켰을 때 참회를 해야 하거든요.

수행자로서 지켜야 할 원칙을 잘 지키고 있나요?

그런데 지금 여러분이 참회하는 걸 보면 전혀 지킬 의사가 없는 수준이에요. 이것은 계율을 방치하고 있는 것에 속합니다. 지키려고 하는데 나도 모르게 놓쳐서 어겼을 때 ‘아, 제가 놓쳤습니다’ 이렇게 하는 게 참회예요. 아예 지킬 생각이 없는 것은 계율을 완전히 파했거나, 계율을 받지 않은 사람과 같다고 봐야 합니다.

어제 제가 수행팀 행자님을 두 가지 이유로 경책 했습니다. 첫 번째는 어제 스님의 도시락을 준비한다고 예불과 발우공양을 빠진 건에 대해서였어요. 그 정도는 발우공양에 빠질만한 상황이 아니에요. 그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얘기하는 게 수행자의 도리입니다.

‘스님, 오늘 제가 시간이 없어서 음식 준비를 제대로 하기 어려우니 밥과 김치만 준비하겠습니다. 양해해주십시오.’

우리는 대중 모두가 아침에는 발우공양을 함께하는 것을 원칙으로 정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발우공양을 빠지고 스님을 위해서 음식을 더 마련하는 게 스님을 위하는 길이 아닙니다. 법을 지키는 것이 스님을 정말로 위하는 길이에요. 법을 어겨가면서 스님의 건강을 우선시하는 것은 세속적 관점이에요. 그건 부처님의 아버님이 늘 부처님이 뭘 먹고 뭘 입고 잠은 어떻게 자는지 물어보고 걱정했던 것과 똑같은 관점입니다. 수행자라면 법을 지키는 걸 더 우선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어제 해외에서 온 활동가들이 외부에서 식사하느라 저녁 예불을 빠졌다고 참회를 했던 건입니다. 그제 저녁에 제가 미국에서 도착하자마자 그 수행팀 행자님이 ‘해외 활동가들에게 제가 공양을 좀 접대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러세요’라고 했어요. 그분들이 저녁 먹으러 나갈 때가 6시 30분이 넘었습니다. 수행자라면 이럴 때 ‘저녁 예불을 먼저 하고 밥 먹으러 갑시다’ 이렇게 해야 해요. 누군가가 6시 40분쯤에 ‘제가 밥 살 테니 갑시다’라고 해도 ‘네, 먼저 가십시오. 저는 저녁 예불 마치고 따라가겠습니다’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저녁 예불 시간이 임박했을 때 식사하러 나가는 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니에요. 그것은 자기 혼자 계율을 어긴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까지 데리고 가서 모두가 계율을 어기게 만드는 겁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스님 옆에 늘 있는 사람이 그랬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스님 시봉 자격이 없습니다. 행자님은 스님 건강만 생각하지, 법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수행자가 계율을 지키도록 도와줘야 할 텐데, 사람들한테 밥 사 주는 것만 생각하고 오히려 계율을 어기도록 했어요. 우리가 이렇게 함께 생활하는 것은 법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행자님이 저에게는 이 세상에서 제일 고마운 분이라 해도 법을 무시하고 생활한다면 같이 살 필요가 없습니다.’

외부 손님과 미팅을 하기 위해 저녁에 일정을 잡아야 한다면 예불 시간에 늘 주의를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저녁 예불이 7시인데 6시부터 회의가 잡혀서 7시를 넘겼다면 이건 이해가 돼요. 그런데 7시가 임박해서 회의를 잡아서는 안 됩니다. 외부 손님의 사정 때문에 할 수 없이 6시부터 8시까지 회의를 해야 해서 7시가 그 사이에 끼었다면 괜찮아요. 그건 어쩔 수 없어요. 그러면 회의를 마치고 예불을 하든지, 예불을 빠지고 참회를 해야죠. 그런데 여러분은 외부 손님과의 회의를 7시에 잡아요. 예불을 하고 7시 20분에 회의를 잡으면 되지, 왜 7시에 잡느냐는 거예요. 그것은 계율을 지키겠다는 아무런 생각이 없어서 그런 겁니다. 다른 사람이 일정을 7시에 잡더라도 수행자라면 ‘아이고, 죄송합니다. 저희는 7시엔 예불이 있으니까 7시 20분부터 회의를 합시다’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그러면 밖깥 사람들이 ‘아, 수행자들은 7시가 예불 시간이구나. 앞으로 무슨 일정을 잡을 때는 7시 20분부터 잡아야겠다’ 이렇게 맞추게 됩니다.

기독교인들이 ‘일요일은 예배를 봐야 한다. 다른 일은 안 한다’라고 하니까 사회 전체가 거기에 맞추잖아요. 저와 종교인 모임을 함께하는 목사님은 일요일에 아무것도 안 한대요. 이런 분이 모임 구성원 중에 있으면 우리가 거기에 전부 맞춥니다. 아예 일요일은 일정을 안 잡아요.

계율을 지키는 자세

이처럼 계율을 지키려면 관점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을 보면 그저 시간 남으면 예불을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건 의무조항이 아니라 선택 조항이라는 겁니다. 선택 조항이라야 시간 남으면 하고, 안 하면 그만인 거잖아요.

그러니 적어도 여기서 살고 있는 수행자라면, 외부 활동가들과 뭘 할 때도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여러분이 관점을 딱 잡아줘야 해요. 대중이 일정을 7시에 잡더라도 ‘아이고, 죄송합니다. 7시에 잡으시면 7시에 시작하시되 저희는 7시 20분에 참가하겠습니다’라고 해야 해요. 아니면 이렇게 얘기하고요.

‘가능하면 7시 20분에 하면 안 되겠습니까?’
‘왜 그래요?’
‘저희는 7시에 예불이 있습니다. 예불을 한 뒤에 회의를 하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딱 자기중심을 잡아줘야 합니다. 여기서 문경 수련원으로 출발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저녁 7시가 예불 시간인데도 7시에 출발한다고 합니다. 아침에도 5시에 출발한다고 정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5시가 예불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아예 4시에 출발한다면 괜찮아요. 그러나 5시에 출발하는 것은 안 돼요. 5시에 예불을 하고, 예불이 끝나면 출발을 해야죠. 천일결사 기도는 가다가 하거나 도착해서 하더라도, 예불은 5시에 대중이 할 때 같이 해야 합니다. 예불과 천일결사 기도를 모두 마치고 6시에 가면 제일 좋고, 그럴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최소한 아침 예불은 끝내고 5시 15분에 출발해야죠. 그런데 여러분들은 대중이 타고 가는 차를 5시에 출발하도록 일정을 잡습니다. 물론 비상사태도 있습니다. 비상사태일 때는 예불 중에도 갈 수는 있어요.

핵심은 ‘무엇을 우선하느냐’입니다. 이 중심이 잡혀야 계율이 저절로 지켜져요. 그런데 여러분은 거의 타성으로 해요. ‘아, 오늘 일을 하다 보니까 어쩔 수 없구나’ 이렇게 되는 게 아니라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생활해요. 처음 공동체에 들어온 사람이 뭘 몰라서 계율을 어기는 경우는 괜찮아요. 그러나 타성으로 생활하면 시간이 흘러도 개선이 안 됩니다. 처음 들어온 행자는 계율을 꼬박꼬박 지키는데, 오히려 오래 산 사람일수록 안 지키는 경우가 많잖아요. 개선이 되려면 그 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계율을 지켜가는 게 많아져야 해요. 물론 사회활동을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문제는 양해를 구해야죠. 그런 건 ‘아, 활동 때문에 저렇구나’ 하고 우리가 이해하잖아요. 그러나 그 활동이라는 것도 절도를 딱 지켜가면서 해야 합니다.

남을 불편하게 하라는 게 아닙니다. 수행자로서 딱 지켜야 할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얘기예요. 수행자로서의 원칙을 지키지 않고 그저 활동만 잘한다면, 그 사람은 세속적인 NGO 활동가일 뿐 수행자는 아닙니다.

사실은 절에 와서 3년만 딱 살면 법사 수계를 받아야 해요. 시간을 끌 이유가 없어요. 나이 하고도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법의 이치를 딱 꿰뚫어 알았다면, 안 되는 건 할 수 없지만, 3년 정도 노력을 하면 가끔은 안 되더라도 원칙이 거의 지켜지기 때문에 법사로서 자격이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 지금 여러분 같은 상태에서는 3년이 아니라 10년을 살아도 저 사람이 수행자인지 알 수 없어요. 수행자로서의 정체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계율을 어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지키려고 하다가 어쩔 수 없이 어긴 것인지, 아무 생각 없이 어긴 것인지를 늘 살펴야 합니다. 수행자라면 이런 관점이 딱 잡혀 있어야 해요.

수행자가 말하는 법

하나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수행자는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돼요. 그런데 여러분들의 모습을 보면, 말을 떠벌릴 때가 많아요. 술집에서 친구들을 만나서 ‘내가 어떻고 저떻고, 이러저러한 걸 했다’ 이런 무용담을 늘어놓듯이 떠벌린다는 거예요. 무슨 비밀 이야기를 함부로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필요한 얘기 외에는 입을 다무는 게 수행자예요.

부처님 당시에는 법에 대한 얘기 외에는 얘기를 못하게 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쓸데없는 얘기 하다가 야단맞은 대표적 사례를 들어 볼게요. 어떤 승려가 왕궁에 탁발하러 갔어요. 당시에 수행자는 왕궁 출입이 자유로웠나 봐요. 감옥도 제한 없이 들어갔다고 하고요. 수행자라고 하면 일체 제약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왕의 부인 중 한 명이 정원에서 옷을 좀 풀어놓고 볕을 쬐다가 잠깐 졸았나 봐요. 스님이 탁발하러 궁 안으로 들어갔는데 인기척이 나니까 부인이 깜짝 놀라서 일어나다가 옷이 벗겨져서 급히 추슬렀습니다. 이 스님이 돌아와서는 ‘오늘 내가 왕궁에 갔다가 이런 꼴을 봤다’ 하고 다른 수행자한테 이야기를 하면서 시시덕거렸어요. 그때 부처님이 지나가다가 그 얘기를 들었습니다. 거기서 ‘법 이외는 말하지 마라’라는 계율이 생긴 거예요.

‘뒤에서 수군거리지 않는다’ 이것도 계율에 있잖아요. 예를 들어 여러분이 어떤 법사님과 같이 다니다가 법사님 하는 행동이 마음에 안 들었다고 합시다. 그래서 ‘아이고, 그 법사님은 같이 지내봤더니 성질도 많이 내고 이상하더라’라고 얘기하는 게 뒤에서 수군거리는 거예요. 일체 말을 하면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걸 보고 내 마음이 불편한 것은 말을 해도 괜찮아요.

‘저는 요즘 마음이 불편합니다. 왜 불편한지 살펴보니까, 법사님 하고 같이 있을 때 법사님이 하는 행동을 보았는데, 그 모습을 보고 제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이렇게 마음 나누기를 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그 사람 때문에 내가 불편한 게 아니에요. 그 사람을 보고 내가 불편한 거죠. 우리가 아침마다 읽는 수행문에도 ‘모든 것은 다 나로부터 일어난다’라고 되어 있잖아요. 만약 누군가가 내 마음이 불편해진 이유를 물으면 설명을 해줘야죠.

‘지난번에 법사님이 화를 내셨습니다. 그걸 보고 어떻게 수행자가 화를 낼 수 있냐는 생각이 들어서 제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돼요. 이건 내 마음이 불편한 연유를 얘기하는 거니까요. 이렇게 얘기하다 보면 왜 불편한지를 알게 되어서 ‘아, 이것도 내 마음이 일으키는구나’ 하고 깨칠 수도 있어요.

뒤에서 수군거린다는 것은 내 괴로움이 마치 상대 때문에 생긴 것처럼 말하는 것을 뜻해요. 저 사람 때문에 내가 괴롭다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수행자가 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대를 미워하거나 원망하거나 탓하는 것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수행자는 마음이 불편하지 않아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누구나 마음이 불편할 때가 있어요. 그것을 어떻게 내어놓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수행공동체에서는 포살을 하고, 자자도 하고, 참회도 하는 겁니다. 대중의 의혹을 해소시켜주기 위해서 내가 스스로 드러내어 참회하는 것을 포살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본인이 자기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도 모를 때가 있어요. 그래서 수행공동체에서는 1년에 두 번 자자를 해서 상대의 잘못을 지적해 줍니다.

‘그때 당신의 이러이러한 행동은 제 마음을 참 불편하게 했습니다. 그것은 수행자로서 가야 할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상대가 ‘아, 그때 제가 놓쳤습니다’ 이렇게 얘기하게 되는 거죠. 이처럼 정해진 시간이 아닌 경우에는 뒤에서 어떤 사람의 행동을 두고 험담을 해서는 안 됩니다. 험담을 했다면 참회를 해야 합니다.

험담은 아니라도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이 일과 관계없는 사람한테는 얘기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정식으로 보고를 하는 시간에 보고를 해야 해요. 예를 들어 인도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활동하는 사람에게 한 도반이 ‘지금 인도에서 교육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네, 학교 교육은 이렇게 진행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게 되죠. 이건 정보의 전달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차를 타고 가면서 ‘요새 인도에서는 이런 일이 있고, 법사님이 요새 뭐가 문제이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수행자의 태도가 아닙니다. 비밀이어서 얘기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수행자는 공식적인 정보가 아닌 것은 얘기하지 않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항상 침묵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정보 전달이 아니라면 항상 침묵해야 한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여러분은 앉아서 계속 떠벌린다는 겁니다. 수행자는 가능하면 말이 없고, 말을 하더라도 서로 유익한 말을 하고, 수행에 관계되는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세속 사람들이 차 마시면서 얘기하는 내용들을 한 번 가만히 들어보세요.

‘그거 얼마 줬니? 다이아몬드가 예쁘네. 나도 하나 사야 하는데 어느 가게에서 샀니?’
‘너희 집 아들은 어떻더라.’
‘저 집에는 이러저러한 문제가 있다더라.’

이런 대화는 수행자의 대화가 아니라 세상의 대화일 뿐입니다. 그렇게 살 거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여기 들어와서 이렇게 생활하겠습니까?

내 마음이 불편한 것은 마음 나누기할 때 솔직하게 얘기하세요. 그러나 불편함은 내가 일으킨다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달을 보고 슬픈 것은 달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슬픈 거잖아요. 그렇게 솔직히 얘기하되, 공식적인 시간에 이야기하고, 누가 질문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능하면 말을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마치 남이 잘못한 것처럼 말하는 것은 ‘남을 탓하지 않는다’,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는다’라는 계율을 어기는 행위예요. 자기도 모르게 그랬다면 깊이 참회를 해야 합니다. 그걸 일상적으로 떠벌리고 다닌다면 수행자라고 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해서 이 가을철에 마음을 다시 한번 가다듬어서 계율에 대해 전체적으로 점검을 해보면 좋겠습니다. 억지로 의무감으로 하지 말고 자기를 딱 점검해서 스스로 알아차려야 해요.

‘아, 내가 이걸 놓쳤구나.’
‘아, 내가 일상화 돼서 무뎌졌구나.’

이렇게 자기가 자기를 점검해가면서 정진을 해나가면 됩니다. 수행은 자율성에 기초해야 변화가 있고, 발전이 있습니다. 경책을 받게 되면 자꾸 눈치를 보게 됩니다. 밥 먹다가도 법륜스님 오는 것 보고 놀라서 숨을 정도가 되면, 심리가 위축되고, 억압이 커집니다. 항상 자기가 자기를 점검해서 정진을 해나가야 변화도 쉽게 일어나고, 편안한 가운데 이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죽비 삼성과 함께 발우공양을 모두 마쳤습니다. 어제에 이어 연일 좋은 법문을 들은 공동체 대중들은 감사한 마음을 담아 스님에게 합장 반배를 했습니다.

오후 1시부터는 정토회 기획위원회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기획위원들은 지난 3개월 동안 각 분과별로 연구하고 토론한 결과들을 발표한 후 몇 가지 의문 나는 점에 대해서는 스님에게 질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사회운동을 어떻게 할 것인지, 미래 전략을 어떻게 수립할 것인지, 10차 천일결사 사업방향 중 고민되는 지점이 무엇인지, 기획위원회를 앞으로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 본부 건물을 개원하게 되면 100일 동안 어떤 법문을 할 것인지, 다양한 주제로 토론이 있었습니다. 스님은 발표를 경청하며 스님의 생각을 들려주었습니다.

“이번에 개원 기념으로 100일 법문을 할 때는, 스님이 갖고 있는 모든 재능이나 아이디어를 다 받아 가세요. 이렇게 집중적으로 하는 강의는 제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겁니다. 앞으로 100년 동안 필요한 강의들을 미리 다 받아 가세요. 언제 또 이렇게 강의를 하겠어요? 이번 개원 100일 법문이 끝나면 저는 이제 농사를 지으러 가야죠.” (모두 웃음)

그러면서 스님은 개원 기념 100일 법문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정토회의 소의경전은 무엇으로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도 답을 해주었습니다.

“이번 100일 법문은 너무 종교적으로 접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불교란 무엇인가?’ 이렇게 접근하기보다는 ‘왜 괴로운가?’ 이렇게 접근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종교와 불교를 떠나서 결국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며 우리 인생이 왜 괴로운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정토회는 새로운 불교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불교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하고 있는 겁니다. 대승 불교도 원래의 부처님 인격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고, 선불교도 원래의 부처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어요. 정토회도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하는 겁니다. 그러나 시대와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 언어와 모양과 의식은 지금에 맞게 해 나가자는 거죠.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가장 핵심은 부처님의 인격에서 나오는 언어입니다. 그것의 핵심은 첫째, 중도입니다. 둘째, 연기입니다. 이 ‘중도’와 ‘연기’의 원칙에서 어긋나면 불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정토회가 소의경전으로 삼을 경전은 우리가 새로 만들어야 해요. 정토회를 시작할 때부터 ‘정토대전’을 새로 편집하자는 계획을 세웠지만 아직 실행을 못하고 있어요. 정토대전에는 크게 다섯 가지 내용이 담겨야 합니다.

첫째, 근본 교설과 대승경전, 선불교 경전 중에서 중도와 연기에 입각해서 새로 정리한 경전을 우선 제작해야 합니다. 둘째,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철학을 새롭게 정리한 내용이 필요합니다. 연기, 중도, 삼법인, 이런 내용들이 현대 과학과 모순되지 않도록 정리한 철학서를 제작해야 합니다. 셋째, 이에 기초해서 사회 사상서가 필요합니다. 불교의 입장에서 인종차별을 어떻게 볼 것인가, 동성애를 어떻게 볼 것인가, 빈부격차를 어떻게 볼 것인가, 환경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평화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렇게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입장 정리를 할 수 있는 사회 사상서를 제작해야 합니다. 넷째, 실천 강령을 만들어야 합니다. 내가 불자라면 살생을 해서는 안 된다, 이런 실천 지침이 계위에 따라서 1단계, 2단계, 3단계로 정리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계율에 대한 정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섯째, 그에 따른 의식집이 필요합니다. 이런 내용을 담은 새로운 수행 문화를 만들어야 하는 거죠. 결국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은 문화니까요.

정토대전에 해당하는 이 다섯 가지를 이번 10차 천일결사에는 꼭 만들어낼 수 있으면 좋겠다 싶어요.”

수행적 관점에 입각해서 어떻게 정토 대전을 만들면 좋을지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개원 기념 100일 법문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많은 연구와 여러 사람들의 의견 수렴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기획위원들은 스님의 말씀을 잘 반영하여 개원 기념 100일 법문을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다양한 안건에 대해 논의하느라 저녁 무렵까지 회의가 계속되었습니다. 지역으로 내려가야 하는 분들이 있어서 저녁 8시가 다 되어 서둘러 회의를 마쳤습니다.

회의 후에는 각 단위 대표자들과 2020년 상반기 정토회 행사 일정을 모두 점검했습니다. 2020년 스님의 달력에는 하루도 빈틈없이 일정이 빼곡히 채워져 갔습니다.

정토회관으로 돌아온 스님은 원고 교정 등 업무를 보며 일정을 마쳤습니다. 내일부터는 전국을 순회하며 2019년 하반기 즉문즉설 강연을 시작합니다. 오후에는 경기도 의왕시 아론의 집에서 수녀님들을 대상으로 즉문즉설 강연을 한 후 저녁에는 영등포구에서 시민들을 대상으로 즉문즉설 강연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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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미상

스님의 가르침 늘 새기겠습니다ㆍ
출가수행자임을 새기겠습니다ㆍ
늘 건강하셔서 우리곁에 오래머무시며
지혜전해주시길 발원합니다()
늘 고맙습니다 스님()

2019-11-18 03:17:49

임규태

스님께 감사드리며 여러 봉사자님들과 참가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_^

2019-10-28 00:46:57

이승은

정신이 번쩍 납니다.
3계 5계 10계를 받아들고
수행자 랍시고 흉내만 내며
선택적으로 계율을 지키던 모습
참회 합니다.

부처님 크신 은혜에 고맙습니다
내고

2019-09-28 22:3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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