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9.27 용성조사 오도일, 경전반 즉문즉설
“첫째 아이와 둘째 아이가 심하게 싸워요. 엄마의 역할은?”

안녕하세요. 오늘은 용성진종조사 오도일 기념식 및 전국의 경전반 학생들의 죽림정사 사찰순례가 있는 날입니다.

새벽 4시, 봉화 정토수련원에서 아침을 맞이합니다. 새벽부터 공기가 쌀쌀합니다. 기온을 보니 12도입니다. 가을이 성큼 다가왔음을 느낍니다.

새벽 예불과 108배, 명상을 차례대로 한 후 5시 30분에 봉화 정토수련원을 출발했습니다. 창밖으로는 추수를 앞둔 황금빛 들판이 펼쳐졌습니다.

오늘은 용성 조사님이 깨달음을 얻은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용성 조사님의 탄생지인 장수에 세워진 죽림정사에서는 해마다 이 날을 기념해 법회가 열리고 있는데요. 올해는 조사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지 133년째가 되는 해입니다.

9시 30분이 되자 유수 스님의 진행으로 역대 전등 조사들을 뜻을 기리는 다례제가 열렸습니다. 다례제를 마친 후 기념식, 즉문즉설 경내 순례 순으로 행사가 진행됐습니다. 오늘 행사에는 전국에서 200여 명의 경전반 학생들이 참석해 용성 기념관을 가득 체웠습니다.

참석한 내빈 소개에 이어 다 함께 용성 조사님이 작사한 ‘온 겨레의 노래’를 3절까지 불렀습니다. 힘차게 노래를 불러보며 나라와 민족을 생각했던 조사님의 뜻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이어서 대중이 자리에서 일어나 스님에게 법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용성 조사님이 어떤 삶을 사신 분인지, 부처님으로부터 용성 조사님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불법이 계승되어 왔는지, 1시간 20분 동안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조사님은 근대 한국 불교를 중흥시킨 분일뿐만 아니라 일제 식민지 시대에 나라의 독립을 위해 많은 일을 하신 분입니다. 스님은 조사님이 하신 많은 업적을 소개하면서 특히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에 대해서 특별히 강조했습니다.

용성조사 오도일 기념 법문

“오늘은 석가여래 부촉법 제68대 용성 진종 조사께서 깨달음을 얻은 지 133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또한 올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년째가 되는 해입니다.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의 뿌리는 기미년 3.1 독립운동입니다. 올해는 기미년 3.1 독립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기미년 3.1 독립운동을 막후에서 주선한 분이 바로 오늘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용성 조사님입니다. 용성 조사님은 3.1 운동이 일어나도록 배후에서 모든 일을 주선하셨을 뿐만 아니라 본인도 직접 3.1 독립 선언서의 33인 가운데에 불교계를 대표해서 네 번째로 서명하셨습니다. 서명하신 분들 중에는 사전 준비할 때 아무 준비도 안 하고 추천을 받아서 서명을 하신 분들도 있는데 용성 조사님은 3.1 운동이 일어나도록 막후에서 모든 준비 과정을 진두지휘하신 분입니다.

특히 3.1 운동은 당시에 가장 큰 종교 세력을 갖고 있었던 동학의 후예인 천도교가 중심이 됐습니다. 당시 천도교 교주가 손병희 선생님이신데 손병희 선생님과 용성 조사님은 아주 막역한 사이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성 조사님은 손병희 선생님을 앞세워서 많은 일들이 이루어지도록 했습니다.

용성 조사님은 불교의 지성화, 대중화, 생활화를 주창하며 많은 불교 개혁 운동을 하셨지만 결국 세상에 빛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당시에는 엄청난 혁명이었던 이런 불교개혁운동이 실패한 이유는 용성 조사님이 독립운동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용성스님이 독립운동에 참여를 안 했으면 불교개혁운동은 대성공을 했을 거예요. 그러나 용성 조사님은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에 그로 인해 불교계가 조선총독부로부터 탄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용성 조사님의 제자 중에 쟁쟁했던 사람이 수십 명이었는데, 정치권력이 탄압을 하니까 몇 명 빼고는 대부분이 발뺌을 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에 있는 스님들의 기원을 조사하면 거의 40% 이상이 용성 조사님의 제자의 제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용성 조사님의 사상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건 제자들이 대부분 ‘나는 용성 스님과 관계가 없다’ 하면서 도망을 갔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80년대에 민주화 운동할 때 법륜 스님이 민주화운동을 할 때 그 제자들이 법륜 스님과 관계있다고 하면 바로 잡혀갔습니다. 그래서 제자들 대부분이 ‘나는 법륜 스님과 관계가 없다’라고 얘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민주화운동과 독립운동은 비교가 안 됩니다.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잡히면 감옥에 가지만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히면 죽습니다. 그래서 용성 조사님의 제자들도 다 도망을 간 겁니다. 용성 조사님이 3.1 운동으로 감옥에 갔을 때 일제가 제자들에게 압력을 넣어서 결국 제자들이 대각사를 팔았어요. 대각사를 판 돈을 제자들이 나눠 가졌습니다. 누구라고 이름을 밝히지는 않겠지만, 지금은 유명한 스님이 되어 있는 분들이에요.

그래서 용성 조사님은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그 소식을 듣고 참담했지만, 새로 대각교를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1937년에 일제가 사이비 종교라고 하면서 대각교를 해체해 버렸어요, 돌아가실 때는 기거할 방도 하나 구하지 못했습니다. 당시에 해인사, 범어사 같은 큰 절에는 전부 용성 조사님의 제자들이 주지로 있었는데도 아무도 방 한 칸을 안 줬어요. 방을 줬다가는 일제에 탄압을 받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돌아가실 때도 불우하게 돌아가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독립운동에 관여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광복 이후 상해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 선생이 귀국하자마자 개인적으로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손병희 선생님 묘소입니다. 두 번째로 찾아간 곳이 도산 안창호 선생입니다. 세 번째로 상해 임정 요원을 다 데리고 찾아간 곳이 대각사예요. 그만큼 용성 조사님의 영향력이 컸습니다. 상해 임시정부의 재정을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도 보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일제 치하 때 비겁하게 살았기 때문에 광복 이후에도 용성 조사님의 독립운동을 세상에 알리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독립운동을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스승이 독립운동을 했다고 나서서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제 치하 때 당신은 무엇을 했습니까?’라고 물으면 ‘저는 도망갔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으니까요.

용성 조사님께서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독립운동을 하셨고, 불교 승려로서 불교를 다시 일으키는 불교 개혁 운동을 하셨습니다. 불교 중흥 운동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불교의 지성화입니다. 둘째, 불교의 대중화입니다. 셋째, 불교의 생활화입니다. 정토회는 이러한 용성 조사님의 불교 중흥 운동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지성화는 ‘바른 불교’, 불교의 대중화는 ‘쉬운 불교’, 불교의 생활화는 ‘생활 불교’라고 지칭하여 부처님 가르침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용성 조사님의 가르침은 불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들 모두가 알아야 합니다. 방금 도의원님께서 용성 조사님은 장수가 낳은 인물을 넘어서서 전라북도의 인물이라고 하셨는데, 전라북도의 인물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인물이고 세계적인 인물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장수도, 전라북도도, 대한민국도 아직 용성 조사님의 진가를 잘 모릅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수행자는 자신이 한 일을 떠벌리는 게 아니라 조용히 뒤에서 보이지 않게 활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독립운동은 증거를 안 남겨야 하는 비밀 운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용성 조사님의 업적을 세상에 알려내는 일은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과제입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운 가운데에도 용성 조사님의 행적이 후세에 알려지도록 하고, 불교와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 기틀을 마련하고, 이 용성 교육관을 지으신 분이 불심 도문 큰스님입니다. 큰스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의미에서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모두 박수)

용성 기념관 벽면에 그려진 역대 조사님들에 대해 설명을 하다 보니 기념 법문이 예상보다 길어졌습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어서 곧바로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바로 질문을 받겠습니다. 물어볼 게 있으신 분?”

질문을 할까 말까 망설이던 경전반 학생들은 처음에는 주저하더니 잠시 후 여기저기서 손을 들고 질문했습니다. 총 7명이 스님과 대화를 나누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서로 싸우는 자식들을 보고 엄마로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묻는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경전반 즉문즉설

“저는 현재 3살, 5살 아이가 둘 있습니다. 5살이 딸이고, 3살이 아들인데, 둘이 정말 많이 싸웁니다. 첫째가 만들어 놓은 걸 둘째가 무너뜨리니까 첫째가 둘째의 손가락을 깨물고 머리도 때리고 물건을 집어던지기도 했습니다. 제가 엄마로서 두 아이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관점이 안 잡히더라고요. 그래서 스님께 여쭤보고 싶습니다.”

“질문자가 아이를 낳아놓고, 스님한테 물어보면 질문자는 도대체 뭐할래요? 나라의 통일이라든지 이런 문제를 저에게 물어야 제가 알려드리죠.” (모두 웃음)

스님의 톡 쏘는 유머와 함께 즉문즉설이 시작되었습니다.

“두 아이가 싸우는 건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싸우는 거예요. 그건 아무 문제가 없어요. 어른도 싸우는데 아이가 싸우는 건 당연한 거예요. 아이들이 서로 싸우는 건 문제 자체가 안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아이라도 남을 때리는 건 안 되는 일이에요. 계율에도 어긋납니다. 첫째, 때리지 마라. 둘째, 물건을 빼앗지 마라. 셋째, 성추행하지 마라. 이렇게 불자가 지켜야 할 계율 아시죠?”

“네.”

“질문자가 아이를 불러서 성질을 내게 되면, 질문자도 계율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차분하게 몇 번이고 주의를 줘야 합니다.

‘그래, 너희가 다투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아무리 그래도 때리는 건 안 된다. 남을 때리는 건 올바른 행동이 아니다.’

그래도 아이의 행동이 개선되지 않으면 아이를 불러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네가 동생을 때릴 때 동생이 얼마나 아픈지 네가 못 느껴서 그러니까 네가 한 번 경험을 해봐라.’

그래서 종아리를 매로 때린다든지 해야 합니다. 그러나 감정을 가지고 아이를 때려서는 안 됩니다.

‘회초리를 맞으니까 아프지. 그렇기 때문에 남을 때리는 건 안 되는 거야.’

이렇게 확실하게 가르쳐야 됩니다. 싸우는 걸 문제 삼지 마세요.

‘싸울 수도 있어. 그렇지만 때리는 건 안 된다.’

이렇게 가르쳐야 합니다. 어떤 물건을 보고 아이가 그 물건을 아무리 갖고 싶다고 해도 ‘뺏거나 훔치는 건 안 된다’ 이런 원칙에 의해서 자녀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럴 때 부모가 감정적으로 아이를 대하면 안 됩니다. 부모가 감정적으로 아이를 혼내면 아이의 마음이 위축됩니다.”

“첫째 아이에게는 동생을 때리면 안 된다고 얘기하고, 둘째에게도 누나와 친하게 지내라고 얘기했더니, 첫째는 ‘엄마는 동생만 좋아한다’라고 불만입니다. 동생은 ‘엄마는 누나만 좋아한다’라고 불만입니다. 저는 양쪽 다 똑같이 대해준다고 하는데, 아이들의 생각은 다르더라고요.”

“애들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어요. 그러면 질문자가 ‘엄마는 동생도 좋아하고, 누나도 좋아하고, 둘 다 좋아한단다’ 이렇게 말해주면 되죠. 아이가 묻는 말에 해명을 못해서 저한테 묻는 거예요? (모두 웃음)

어른이 아닌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어요. 스님이 지금 무슨 말을 해도 진보든, 보수든, 여든, 야든, 남한이든, 북한이든 다 안 좋게 봐요. 제가 미국 가서 ‘북한을 이렇게 이해해라’라고 말하면, ‘스님은 북한 편입니까?’라고 합니다. 북한에 인도적 지원을 해야 한다고 말하면 ‘왜 퍼줘야 합니까’ 그럽니다. 왜냐하면 각자가 바라보는 입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처럼 아이들이 싸우는 건 아이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럴 수 있어요. 어른도 싸우는데 애들이 싸우는 건 너무 당연하죠.

‘엄마는 언니 편드는 것도 아니고, 동생 편드는 것도 아니다. 네가 보기에는 그럴 수도 있겠다. 이해한다. 그러나 엄마는 둘 다 사랑한단다.’

질문자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면 되는 거예요.”

“제가 저번에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이들과 대화를 했습니다.”

“질문자가 그렇게 말해도 아이들이 안 듣는다는 거죠? 애가 어떻게 한 번에 알아듣겠어요? 못 알아듣죠. 그러면 10번, 20번 얘기하면 되는 거예요.”

“제 나름대로 유튜브에서 즉문즉설을 찾아보니까, 어떤 질문자가 엄마가 형제간에 싸울 때 어떻게 하냐고 스님에게 물었는데, 아이들끼리 알아서 해결하게끔 집을 잠시 나가라고 하신 내용이 있었어요.”

“저런 경우가 반 풍수 집안 망친다고 하는 거예요. 아무거나 찾아서 자기에게 적용하는 건 좋은 태도가 아니에요. 그 경우는 질문자가 물을 때 어떤 다른 조건에 있었기 때문에 ‘그럴 때는 엄마가 못 본 척 해라. 동생하고 형하고 자기끼리 싸우는 걸 엄마가 일일이 간섭하는 건 좋지가 않다’라고 말했을 겁니다. 엄마가 아이들 싸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자꾸 그 싸움에 끌려 들어가요. 그래서 자기들끼리 해결하도록 놔두라고 했을 겁니다. 둘의 싸움을 보면서 담담하게 ‘애들이 저렇게 싸우는구나’ 이렇게 볼 수 있으면 집을 나갈 필요가 없는데, 그게 잘 안 된다고 하니까 문 닫고 못 본 척해라고 했겠죠.

그런데 질문자의 경우는 상황이 달라요. ‘형이 동생을 때립니다’ 이렇게 질문했는데, 제가 ‘때리든지 말든지 못 본 체 해라’ 이렇게 말할 리가 없죠.

“감사합니다.”

“다섯 살짜리 아이가 그네를 탄다고 하면, 아이가 떨어져서 다칠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잖아요. 그런데 계속 그네를 잡고 있으면 아이는 영영 그네를 탈 수 없어요. 이게 과잉보호에요. 아이들이 학습할 기회를 뺏는 겁니다. 그때는 그네를 타겠다고 하면 타라고 하고, 엄마는 없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가 그네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아예 없어지면 아이가 다쳤을 때 도와줄 사람이 없잖아요. 그래서 초기에는 멀리 떨어져서 안 보이는 곳에서 아이가 그네 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어야 해요. 그러다 아이가 그네에서 떨어졌다고 해서 바로 달려와서 아이를 도와주면 안 돼요. 넘어졌을 때도 상황을 봐서 개입을 해야 해요. 이웃집 아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웃집 아이여도 도와야 될 상황이면, 개입을 하세요. 이웃집 아이가 그네 타다가 떨어져서 울면, 일하다가 제쳐놓고 쫓아가서 도울까요? 아니겠죠. 그런데 내 아이면 그렇게 해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이웃집 아이라도 팔이 부러지거나 다리가 부러지면, 하던 일 놔두고 달려가서 병원에 데려가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질문자는 ‘스님이 아이의 다리가 부러지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마라’ 이렇게 가르쳤다고 얘기하는 꼴이에요. 멀리서 지켜보다가 아이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 내 아이가 아니라 남의 아이라 하더라도 달려가서 치료를 해야 되는 상황이잖아요. 남의 아이도 치료를 해야 하는 상황인데, 왜 내 아이를 치료하지 않겠어요?

아이가 스무 살이 넘으면, 무조건 아이가 해달라는 데로 다 해줄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스님이 늘 ‘스무 살이 넘으면 독립을 시켜라’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스무 살이 넘으면 아무것도 주면 안 되느냐? 그것도 아니에요. 이웃집 아이가 공부는 잘하는데 경제적 조건이 안 되면 장학금을 줄 수 있잖아요. 이렇게 이웃집 아이도 돕는데 자기 아이를 지원 안 할 이유가 없잖아요. 남도 지원하는데 왜 내 아이를 지원 안 하나요? 제 말은 내 아이라는 이유로 지원 안 해도 되는 걸 자꾸 지원하게 되면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는 겁니다. 몸이 아프면 약을 먹고, 몸이 안 아프면 약을 먹지 말아야 해요. 아플 때 약 먹어서 효과를 봤다고 해서 안 아픈데도 약을 먹으면 부작용이 생기잖아요. 그것처럼 아무리 좋은 법문이라도 자기의 처지와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적용하면 부작용이 생깁니다. 질문자처럼 엉뚱하게 듣고 엉뚱하게 적용하고 있는 분들은 제 이야기를 꼭 좀 명심하시면 좋겠어요.” (모두 박수)

이 외에도 6명의 질문이 더 있었습니다.

  • 정토회에 나오기 전에 다니던 종교가 있었는데, 그 종교에 주위 사람들을 많이 전도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제가 정토회에 나오고 있어서 미안한 마음이 들고, 봉사도 주저하게 됩니다.
  • 봉사에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으니까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봉사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몸이 아파서 봉사하는 게 힘듭니다.
  • 결혼한 지 2년 되었습니다. 감정 기복이 심한데 아기를 낳아야 할지 고민입니다.
  • 3살, 5살 아이 둘을 키우고 있습니다. 첫째가 둘째를 깨물고, 물건도 집어던집니다. 중간에서 엄마인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 24살인 딸이 퇴근하고 오면 아예 가족을 무시하고 혼자 방에 들어가서 불도 켜지 않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제가 딸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 지금 시국을 보니 화가 많이 납니다. 어떻게 관점을 잡고 봐야 할까요?
  • 지난 7월 18일에 천일결사 기도를 하면서 읽었던 경전 구절이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스님의 올바른 해석을 듣고 싶습니다.
  • 작년 봄에 라디오 드라마를 들으면서 제가 경봉스님의 손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님에게서 경봉스님의 일화를 듣고 싶습니다.

이미 불교를 공부한 지 1년이 넘은 경전반 학생들이기 때문에 그런지 스님은 평소보다 더 직설적으로 이야기를 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경전반 학생들도 영상으로만 보던 스님을 실물로 가까이에서 보게 되었다며 강연 내내 기쁜 표정이었습니다.

죽림정사 앞마당에서 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청명한 가을 하늘이 더욱더 얼굴을 밝게 해 주었습니다.

대중은 삼삼오오 흩어져서 집에서 싸온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었습니다. 300여 명이 식사를 하는 데도 경내가 아주 조용했습니다.

스님도 죽림정사에서 비빔밥으로 점심 식사를 한 후 곧바로 서울로 출발했습니다. 4시간을 차를 달려 저녁 6시에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스님과 미팅을 하기 위해 시민 붓다 포럼 관계자 분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녁 9시까지 미팅을 한 후 오늘 일정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행복학교 학생들과 함께 하는 행복캠프가 수원시청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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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태

스님께 감사드리며 여러 봉사자님들과 참가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_^

2019-11-02 00:12:40

고경희

용성스님이 독립운동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9-10-03 08:17:49

월광0105

용성조사님! 도문큰스님! 법륜스님! 경전반 학생분들!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2019-10-01 19: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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