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2.27 3.1운동 100주년 기념 토론회 ‘독립운동가 백용성’
“3.1운동, 사실은 이런 숨겨진 이야기가 있어요.”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시원하게 발표하라!”

100년 전 오늘, 전국 방방곡곡으로 ‘대한독립만세’가 울려 퍼졌습니다. 당시 3.1운동에 참가한 사람은 200만 명, 체포 구금된 사람들은 4만 7천 명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기억되는 사람보다 이름 없이 스러져간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민족대표 33인이었던 용성스님(1864~1940)도 마찬가지입니다. 용성스님의 독립운동 활동 내용 중 밝혀진 내용은 전체의 10%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2월 27일, 용성스님의 잊혀진 진실을 밝히고자 3.1 운동 100주년 기념 토론회가 조계사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열렸습니다. 법륜스님은 (사)백용성조사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 이 토론회를 준비하고, 발제를 맡았습니다.

오후 2시, 400여 명의 청중이 참석한 가운데 토론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불교의례인 삼귀의에 이어서 나라를 위해 몸 바쳤던 분들의 뜻을 헤아리며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순국선열을 위한 묵념을 드렸습니다.

오늘 토론회는 3.1 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 주최하고 사단법인 백용성조사기념사업회 주관으로 마련되었습니다. 3.1 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3.1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되살리고 평화와 상생의 가치를 계승하고자 만들어졌는데요. 토론회에 앞서 전 천도교 교령이자 추진위원회 상임대표인 박남수 님의 인사말이 있었습니다.

박 대표님은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각 종교별로 학술대회를 개최하게 되었다고 하며 “오늘 이 토론회를 통해서 지금까지 몰랐던 존경스러운 용성스님의 역사를 재발견하고 재확산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또 모든 종교 지도자들이 3.1운동의 정신을 본받아 서로 미워하지 말고, 갈등하지 말고 함께 하길 바란다. 오늘 참여한 여러분이 2019년의 민족대표다.”라고 하여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이어서 내빈들의 축사가 있었습니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명예회장이신 김명혁 목사님은 “3.1운동을 하였던 선배들처럼 우리들도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겨레를 사랑하고, 아시아를 사랑하고, 세계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껴 안는 귀중한 후배들이 되자.”라고 축사해주었습니다.

정부를 대표하여 행정안전부 김부겸 장관님은 “100년 전, 이름 석자 없이 온갖 신분의 사람들이 당당하게 독립을 외쳤다. 그분들이 계셨기에 지금의 우리가 존재한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인 용성 스님의 대륙을 넘나드는 대범하고 치밀한 독립운동을 제대로 밝혀야 독립운동이 완성된다고 생각한다.”라고 축사해주었습니다.

오늘 행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의 후원으로 마련되었습니다.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의 격려사를 교육원장 현응 스님이 대독 하였습니다. 원행스님은 격려사를 통해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독립유공자들의 노고를 깊이 돌아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며 ’강대국의 종속국이 되지 말고, 주인다운 주인국이 되어라.’고 하신 용성스님의 유훈을 실현하기를 발원하였습니다.

박원순 서울시장님도 참석하여 “역사는 기억하는 사람들의 것이다. 불교잡지 <불일>에 용성스님께서 ‘아아, 사랑은 끊어졌다. 인도는 멸망되었다. 인도가 그 어디 있으랴.’고 쓰신 글을 보았다. 스님은 우리 민족의 아픔을 나누면서도 사람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하였다.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용성스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기억하자.”라고 축사해주었습니다.

내빈소개에 이어 축하공연이 있었습니다. 건국대 예술디자인대학원 공연예술학과 김홍태 교수님이 용성스님이 작사하신 ‘온 겨레의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제 소개를 하자면 저는 제가 존경하는 법륜스님이 계신 정토회에 매년 부처님 오신 날에 축가를 부르는 경동교회 집사입니다. (모두 웃음) 우리 겨레에 대한 내용이 잘 담겨 있으니, 가사를 음미하며 들어보시면 좋겠습니다.

백두산이 아빠 되어 단군 겨레 이루었고, 한라산이 엄마 되어 단일 기백 이루었네. 자손만대 이어가며 이 강산을 가꿔가세-”

웅장한 목소리에 겨레에 대한 가사가 실려 용성스님의 육성이 들리는 듯한 공연이었습니다. 공연에 이어 독립운동가 백용성 스님을 영상으로 만나보았습니다. 독립을 위해 한평생을 바치신 용성스님의 삶에 눈시울이 붉어지고 마음이 뭉클하였습니다. 객석에서는 눈물을 훔치며 뜨거운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어서 본격적으로 토론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법륜스님이 ‘독립운동가 백용성 : 잊혀진 백 년의 진실’이란 주제로 발표를 하였습니다.

“조금 전 영상에서도 봤지만 오늘 대한민국이 있기 위해서는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분들의 희생을 다 알지도 못하고, 기억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3.1독립운동에 관련해 체포되어 구금된 사람만 47,000여 명이 되지만 국가에서 인정받은 사람은 5,070여 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해요. 그 수의 10배에 가까운 사람들이 흔적도 없고 이름도 없는 게 오늘날 대한민국의 실정입니다.

오늘 토론회의 취지

오늘 우리들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이런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첫째, 이름 없이 사라져 갔지만 독립이 되고 민(民)이 주인이 된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도록 해주신 분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둘째, 그분들의 희생을 우리가 다 밝히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그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숨겨지고 덮이고 잊어버린 것들을 좀 더 드러내서 얘기하고 싶지만, 증거도 없고, 그걸 밝힐 후손도 없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그중 묻혀 있긴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노력하면 어느 정도 밝힐 수 있는 분이 저희는 백용성 스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분은 불교의 위대한 선각자로서는 이미 세상에 잘 알려져 있고, 불교계에서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분이 독립운동에 기여하신 내용은 실제 하신 것에 비해 알려진 바가 너무나 적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오늘 몇 가지 제기해 보려고 합니다. 꼭 이분을 드러내서 알린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렇게 실제의 역사가 덮여 있어서 알지 못하는 사실들이 너무 많다는 점을 오늘 토론회를 계기로 함께 생각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용성 스님의 독립운동 활동들은 대부분 용성 스님의 법손인 도문 스님의 구술에 의한 것입니다. 도문스님은 용성 스님의 손상좌이자 용성 스님의 후원자인 만석꾼 임동수의 증손자이기도 합니다. 증조부, 조부부터 그리고 은사 스님으로부터 용성 스님의 독립운동 일화를 가장 많이 듣고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한데요. 스님은 먼저 도문스님에 대해 소개한 후 용성스님의 독립운동에 대해 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용성 스님의 독립운동은 크게 일곱 가지입니다. 3.1 운동 계획과 종교 간 통합, 대한민국 수립 발원과 태극기 사용, 상해 임시정부 등에 독립운동 자금 지원, 윤봉길 의사 파견, 만주에 독립운동 근거지인 용정 대각교당 농장 선농당 설립, 조·중 연합국 창설 구상(1만 대한의사군 총사령관 홍범도), 항일 불교운동입니다.

그중 3.1운동 독립선언이 어떻게 발표되었는지, 만주에 420만 평에 달하는 대규모 농장을 왜 운영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3.1독립운동 때 선언문을 어떻게 만들면 좋겠느냐는 논의를 했었다고 합니다.

‘너무 과격하게 표현하지 말고, 일본을 미워하지도 말자. 그러나 남의 나라를 침탈한 것은 잘못이니까 시정돼야 한다. 우리가 미래로 가기 위해서는 한국과 일본, 중국이 손을 잡고 동양 평화를 만들어가자. 이런 내용을 담아 미래지향적으로 쓰자.’

이렇게 합의가 돼서 천도교의 이종일 선생님이 문장을 쓰기로 하고 선언문을 써 왔는데, 문장이 너무 과격했다고 합니다. (모두 웃음)

그래서 손병희 교주님이 ‘너무 과격하니까 좀 부드럽게 쓰자’라고 하면서, 그 문장과 자료를 최남선 선생님한테 주었고, 최남선 선생님이 다시 선언문을 다듬어서 써왔다고 해요. 이때가 아마 거사가 있기 바로 직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3.1독립선언 비하인드 스토리

그렇게 다듬어져 온 선언문을 용성스님이 받아서 읽어보니까, 문장은 너무나 아름답고 좋지만 방향성이 뚜렷하지 않았다고 해요. 용성스님이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 방향이 뚜렷하지 않다’라고 얘길 하니까 한용운 스님이 ‘스님, 이제 합의 다 본 건데, 지금은 못 고칩니다’라고 했어요. 다시 용성스님이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시원하게 발표하라는 표현이라도 꼭 넣어라’라고 하자, 한용운 스님은 ‘그것도 이제 와서 새로 논의하기는 어렵습니다’라고 했어요. 그래서 다시 용성스님이 ‘공약 3장을 넣는 것으로 해서 1번은 천도교에서, 2번은 불교에서, 3번은 기독교에서 넣는 것으로 하자’라고 제안해서 결국 공약 3장을 넣은 선언문이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선언문을 최남선 선생님이 썼고, 한용운 스님이 당일에 선언문을 보고 너무 부드럽게만 써서 공약 3장을 추가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사실은 지금까지 알려져 있던 것과는 내용이 다릅니다. 그러나 천도교 쪽과 얘기를 해보면 제 얘기와 내용이 상당히 비슷한 증언이 많습니다.

이렇게 해서 3.1독립운동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는데, 또 장소를 어디로 할지가 문제가 됐어요. 원래 탑골공원에서 하기로 했다가 서명한 사람들이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해서 결국은 태화관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장소가 바뀐 것에 대해 용성스님은 걱정을 했어요.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을 읽고 다 헤어져서 집에 가버리면 죽도 밥도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분들이 선언을 하고 모두 잡혀가서 감옥에 있어야 전 국민이 일어나는데, 집에 가버리면 안 되잖아요. (모두 웃음)

그래서 용성스님은 태화관 기생들에게 ‘두루마기와 신발을 좀 숨겨놔라’라고 부탁을 했어요. 그때는 여종업원들을 기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제자인 동헌 스님에게 종로 경찰서와 일본 헌병대에 연락하게 해서 한용운 스님이 선언서를 다 읽고 만세를 부를 때쯤 일본 경찰이 들이닥치도록 했습니다. 동헌 스님은 용성스님의 부탁을 받고 태화관 주인인 양 행세하면서 ‘태화관에 지금 사람들이 모여서 만세를 부른다’ 이렇게 신고를 했습니다. 만세 삼창이 딱 끝날 무렵에 헌병대가 들어와서 전원을 다 잡아갔고, 이를 계기로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게 됐습니다.

이것이 증언의 내용들입니다. 특별히 뭘 덧붙이려는 게 아니라 이런 과정이 있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3.1운동이라는 거사가 그냥 쉽게 되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우리는 ‘3.1독립선언은 민족대표 33인이 했다’라고 쉽게 얘기하지만, 여기 서명하면 다 죽는 줄 아는 시대에 이렇게 나서서 노력하신 분들이 계셨어요. 이 증언에는 천도교가 거의 주체였고, 용성스님은 문제가 생기면 주로 손병희 교주님을 설득하였고, 실제로 나서서 하는 일들은 대부분 한용운 스님이 하셨다고 합니다.

독립 자금 형성

그리고 증언의 내용 중에는 용성스님이 1922년에 만주에 700 정보씩 두 군데에 땅을 사서 대단위 농장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당시의 정황을 보면 좀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있습니다.

용성스님이 1919년 3월에 감옥에 들어가서 1921년 3월에 나옵니다. 형은 1년 6개월 받았는데, 실제로 감옥살이를 한 것은 2년 2개월입니다. 취조받고 재판하는 6개월은 당시에는 형기에 포함되지 않았어요. 10월에 재판이 끝나고 1년 6개월을 선고받았기 때문에 실제로는 2년 2개월을 보내고 1921년 3월에 출옥한 거예요.

감옥에서 나와서 스님은 대각사로 가려고 했는데, 제자들이 어떤 신도 집으로 모시고 갔어요. 자초지종을 들어봤더니, 스님이 감옥에 간 뒤로 일본 경찰이 압박을 넣으니까 결국 제자들이 대각사를 팔아서 그 돈을 나눠가지고 다 흩어져버렸대요. 대각사가 없어져버린 겁니다. 그렇게 오갈 데가 없어서 신도 집에 머무를 때, 순종 계비인 윤 씨 마마(순정효황후)와 두 상궁이 돈을 모아 지원을 해주었어요. 봉익동 1번지에 있던 절은 팔아먹어 버렸으니까 봉익동 3번지에 지원받은 돈으로 민가를 사서 다시 절을 내면서 대각교를 창시했습니다.

감옥 안에서 보니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는데도 전부 한글로 된 성경을 읽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굉장히 감동을 받으셨나 봐요. 그래서 ‘부처님의 좋은 말씀이 한문이라고 하는 감옥에 갇혀서 아무 쓸모가 없게 되었다’라고 하면서 삼장역회를 조직해 한글 번역 작업을 하시고, 부녀자 선방을 만드는 등 여러 포교 활동을 진행해 나갑니다.

이럴 때인 1922년에 거금을 들여서 만주에 420만 평의 농장을 샀다는 사실이 좀 이해하기 어렵죠. 그런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1919년에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그해 4월에 상해 임시정부가 생기는데, 국내는 일제의 탄압에 의해서 1919년 말에 가면 만세운동의 기세가 꺾입니다. 그리고 상해 임정은 내부 분열이 일어나서 활동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게 되었어요. 그래서 현장에서 뛰던 독립운동가들, 특히 연해주하고 북간도에 있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간악한 일제를 상대로 평화적으로 해보려는 것은 안 된다. 무장 투쟁할 수밖에 없다’라고 해서 전부 무장투쟁을 준비합니다. 그런데 연해주에서는 1920년 4월에 소위 4월 참변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최재형 선생을 비롯해서 연해주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이 일본에 의해 많이 희생되었습니다.

그런데 그해 6월에 들어와서는 북간도의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하고, 10월에는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그러자 일본은 사단 병력을 보내 국경을 넘어 만주를 침공하고,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색출하러 나섭니다. 그 당시 만주 군벌인 장작림(장쭤린)이 도저히 더 이상 독립군을 보호할 수 없으니까 ‘나는 이제 보호 못한다. 나가라’ 이랬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러시아 쪽으로 연결해서 ‘우리 여기 못 있으니까 좀 보호해다오’ 하니까 러시아 측에서 ‘와도 좋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열몇 개의 독립운동 부대가 전부 밀산에 모여서 하나의 부대로 통합했어요. 러시아에 가서는 의견이 차이가 나면 안 되잖아요. 그렇게 하나의 부대로 통합해서 러시아로 넘어갔는데, 거기서 또 이견이 생겨서 1921년 6월에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면서 민족주의 독립운동이 완전히 궤멸이 돼버립니다.

용성스님은 3월에 감옥에서 나왔고, 독립군이 궤멸된 것은 6월이니까, 아마 살아남은 이들을 보호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 것 같아요. 그래서 이때 급하게 돈을 모았는데, 순정효황후와 두 상궁이 당시로는 거금인 1만 원을 내었고, 전라도 만석꾼인 임동수 일가가 3천 석의 쌀을 팔아서 돈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도합 3만 3천 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아무 연고가 없는 만주에, 그것도 조선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던 용정 근교가 아니라 깊은 골짜기인 ‘명월구’라는 곳에 땅을 샀어요. 그때는 옹성납자라고 불렀는데, 완전히 산골짜기였어요. 황무지도 있고 사람도 조금밖에 없는 명월촌과 봉녕촌에 각각 700 정보씩 총 420만 평의 넓은 땅을 구입합니다. 그 구입 내역을 보면 스님 이름으로 구입한 것도 아니고 거기에 있는 동네 사람 명의로 했어요. 요즘처럼 외국인에게는 등기가 안 되니까 거기에 있는 사람 명의로 해서 급하게 구입했어요.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점은 이때 용성스님이 그런 일을 할 만한 조건이 안 됐는데 급하게 그 많은 땅을 구입했다는 점입니다. 나중에 다른 증언을 보면 2만 원 정도의 가치밖에 안 되는 땅을 스님이 물정을 모른다고 속여서 3만 3천 원에 바가지를 씌웠다는 내용이 있거든요. ‘왜 이렇게 급하게 넓은 땅을 구입했을까?’ 이런 의문이 남아요.

그 답을 찾으려면 앞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을 알아야 합니다. 1921년에 독립군이 궤멸당하자 살아남아 흩어진 사람들을 보호하는 게 시급히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분들이 아마 용성스님에게 급히 도움을 요청했고, 용성스님은 급하게 지원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땅을 산 것은 1922년이지만 용성스님이 ‘내가 여기에 농장을 만들었다’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은 1927년입니다. 1927년에 용정에 대각교당을 열었는데, 이때 이 농장을 ‘선농당’이라고 세상에 공개하게 돼요.

그런데 독립군이 1921년에 궤멸되고 2년 후인 1923년에 명월구에서, 다시 말해 스님이 땅을 샀던 바로 그 자리에서 이범석 등 400여 명이 고려혁명군을 조직했다는 사실이 우리 독립운동사에 나옵니다. 도대체 무슨 재주로 400여 명의 독립 전사가 그곳에 모여 활동을 개시했는지는 앞으로 학자들이 좀 연구해주면 좋겠어요. 저는 이 사실이 용성스님이 대단위 농장을 구입한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에서도 이들을 돕기 위해서 모금을 하긴 했지만 역사 기록에는 50원을 보냈다는 기록밖에 없습니다. 필요했던 자금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데, 그렇다면 나머지 자금은 어디에서 왔느냐는 거죠.

시간이 조금 흐르면 또 주목할 만한 사건이 있어요. 이건 우리 역사 기록에는 없는 내용이지만, 중국 공산당 역사에서는 1931년에 열린 명월구 회의가 유명합니다. 농민에 뿌리를 두면서 한쪽에서는 농사짓고 한쪽에서는 싸우는 유격전을 어떻게 할 것인지, 부상자를 어떻게 치료할지를 논의한 유명한 회의를 중국 역사에서는 명월구 회의라고 부릅니다. 북한 역사에도 1931년에 이 명월구 회의를 김일성 장군이 주도했다고 나와요. 김일성 장군의 당시 나이가 19세 정도밖에 안 되는데, 어쨌든 북한에서는 명월구 회의 50주년 기념우표도 발행할 정도입니다. 아무튼 이 명월구라는 곳이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난데없이 등장해요.

그리고 중일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1938년에 일본은 만주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을 완전히 궤멸시키고자 간도특설대를 조직해요. 이 간도특설대가 다름 아닌 명월구에 설치되면서 동북 3성의 항일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용성스님이 명월구에 마련한 선농당은 1939년 일제에 의해 불이 질러져서 완전히 소멸되어 버렸습니다. 도문 스님으로부터 이 사실을 처음 들었을 때 저는 솔직히 잘 안 믿어졌습니다. (모두 웃음) 그런데 1992년에 한중 수교가 되어서 중국을 갈 수 있게 되자 제가 제일 먼저 간 곳이 여기입니다. 진짜인지 확인하고 싶었거든요. (모두 웃음) 용정에 직접 가서 보니까 대각교당은 없어졌고, 사람들한테 물어보니 그때까지 대각교당의 담장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문 스님께 ‘스님, 담장이 아직 남아있습니다’라고 보고를 드렸는데, 이듬해에 다시 와서 오니까 담장도 없어져버렸어요. 담장을 확 밀어버리고 거기다가 백화점을 짓고 있더라고요. (모두 탄식) 명월촌과 봉녕촌을 차례로 찾아가서 들판과 산세도 보긴 했습니다. 지금 명월구는 안도현 명월진이 되었고, 봉녕촌은 양병진이 되어 있습니다.

아직 다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용성스님이 하신 이런 일들은 굉장했다고 보여집니다. 이런 것들을 불교계에서 관심을 좀 더 가지고 연구해 주셨으면 해요. 역사학계에서도 이 사실들의 일부라도 복원을 해주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한동민 박사님의 논문을 보면, 안수길 씨의 소설이 나옵니다. ‘북간도’를 쓴 소설가 안수길 씨가 1941년에 ‘원각촌’이라는 소설을 썼어요. ‘원각촌’의 내용을 살펴보면, 용성스님이 선농당을 마련하는 과정이 똑같이 나옵니다. 차이가 난다고 하면 용성스님이 아니라 혜룡 스님이라고 나오고, 구입한 땅이 700 정보가 아닌 600상이라고 나오는 정도예요. 상은 정보와 더불어 중국에서 쓰는 단위입니다. 한 상을 3천 평이라 하느냐 2천 평이라 하느냐 정도의 차이만 있지 나머지는 거의 내용이 똑같습니다. ‘원각촌’은 혜룡 스님이 중국에서 이상촌을 건설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소설이에요. 그런데 이 안수길이라는 분은 용정에서 대각교당을 총책임졌던 안용호 선생님의 아들이에요. 그리고 용성스님이 계신 서울 대각사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일요 불교학교 선생도 하신 분이에요. (모두 감탄)

그렇게 당시의 상황을 잘 아는 분이었으니까 거의 사실에 기반해서 소설을 쓰지 않았을까 합니다. 소설에서는 원각촌에 당시 40호 정도가 살고 있는데 곧 50호를 이주시킬 계획을 잡고 있다는 내용이 나와요. 또 그 당시 소작료가 5:5인데 이곳에서는 소작료를 3:7로 해서 수확이 10이라면 소작인이 7을 갖도록 했다고 해요. 그리고 땅을 개간한 사람은 5년간 무료로 땅을 주었고, 집을 지으면 50원을 지원해주었고, 세 집 당 소 한 마리씩 지원해주었다는 내용도 나옵니다. 이런 내용은 거의 사실에 기초해서 쓴 것 같습니다. 이런 연구들을 우리가 좀 더 해나간다면 앞으로의 연구 방향을 잡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시간이 있으면 홍범도 장군과 조중 연합군에 대한 얘기나 윤봉길 의사를 중국에 파견한 얘기 도 하면 좋겠지만, 방금 영상에도 내용이 나왔으니까 오늘 제 얘기는 이 정도로 말씀드립니다.”

용성스님의 행적을 모두 발표하기에 50분은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아직 역사적 사실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스님의 말에는 확신이 담겨있었습니다.

발제에 이어 토론이 시작되었습니다. 토론에는 최병헌(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명예교수), 이이화(역사학자), 김택근(전 경향신문 논설위원, 용성 평전 저자)이 참석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새로운 독립운동의 역사를 새로 쓸 인물의 등장에 열띤 토론을 벌였습니다. 토론의 현장은 내일 전해드리겠습니다.

전체댓글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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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

잘 새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1-03-01 08:44:10

정명데오

“3.1운동을 하였던 선배들처럼 우리들도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겨레를 사랑하고, 아시아를 사랑하고, 세계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껴 안는 귀중한 후배들이 되자.”라고 축사해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20-03-14 14:26:19

송미해

나라와 백성을 위해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독립운동하신 모든 분들과 그 후손들께
감사한마음 드립니다.

2019-03-02 17: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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