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6.5 종교인모임, 수행법회
“스트레스 받지 않고 일하는 방법”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평화재단에서 종교인모임을 하고, 서초 정토법당에서 수행법회를 한 후 저녁에는 대구에서 즉문즉설 강연을 했습니다.

아침 7시 평화재단에서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을 함께 하면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오늘도 종교인들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어떤 기여를 할 것인지 머리를 맞대고 논의했습니다. 목사님, 신부님, 주교님, 교령님, 스님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이자 김명혁 목사님이 식사 기도를 했습니다.

식사가 끝나자 곧바로 회의 안건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지난 5월 초에 북한의 식량 위기 상황이 UN 보고서에 발표된 후 종교인 모임에서는 지난 한 달 동안 정부의 대북 인도적 식량 지원이 어떻게 될지 지켜보기로 하고 지난 모임을 마쳤는데요. 오늘 모임에서는 인도적 식량 지원이 지지부진한 상황을 우려하며 인도적 식량 지원이 즉각 추진될 수 있게 호소문을 발표하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평화재단에서 작성한 호소문 초안을 함께 읽어 내려갔습니다.

“유엔을 위시한 국제사회는 대북 식량 지원을 위해 적극 나서 주기 바랍니다. 인도적 지원은 경제 재재의 대상이 아닙니다. 한국 정부는 대북 인도적 지원을 즉각 추진할 것을 호소합니다. 우리 국민들도 지금 경제적 어려움이 있지만 북한 동포들은 기아의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대북 식량 지원 모금운동에 적극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몇 가지 문구 수정을 한 후 호소문을 언론에 보도 자료로 배포하기로 하고 모임을 마쳤습니다.

10시부터는 수행법회가 시작되었습니다. 3주 전, JTS에서는 식량 부족을 겪고 있는 북한 주민들에게 옥수수 1만 톤을 보내기 위해 모금을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먼저 모금에 동참해준 대중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 뵙고 벌써 3주가 지났네요. 지난 3주간 다 잘 계셨어요? 지난 3주 동안 우리는 배고픈 북한 어린이들을 위해서 아끼는 돈을 보시했고, 또 길거리에 나가서 북한의 식량 위기 상황을 알리고 모금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지난 3주 동안 보시하고 봉사한 인연 공덕으로 모금에 참여한 인원이 만 명이 넘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6월 30일까지 남은 25일도 부지런히 활동해주시기 바랍니다.” (모두 박수)

이어서 스님은 ‘일과 수행의 통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길거리에서 모금운동을 해보면 좋은 소리만 듣는 게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절에서 기도나 하지, 길거리에서 모금운동은 왜 하나?’라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고, 어떤 분들은 ‘차라리 내 돈 내고 말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들에게 욕 듣는 게 싫었을 거예요. 그렇다고 내 돈을 내는 것만으로는 모금에 한계가 있고, 그렇다고 모금을 하려니까 사람들의 저항이 따르죠. 고민을 덜려고 정토회에 왔는데 또 새로운 고민이 생기죠? (모두 웃음)

인생이 늘 이렇습니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는 것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저항 때문에 그만두는 게 아니라 저항이 따르는 일도 필요하면 지속적으로 하면서 스트레스도 받지 않는 것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명상하고 절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런 활동을 하면서도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일과 수행의 통일이라고 해요.

먹고살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돈을 벌려면 노동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일을 해보면 힘들고, 내가 필요한 만큼 돈을 벌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이 스트레스가 자꾸 쌓이면 스트레스를 풀어야 해요. 안 그러면 병이 나니까요.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예요. 이걸 ‘놀이’라고 해요.

노는 데는 돈이 듭니다. 그래서 놀이와 노동은 정 반대예요. 놀이는 돈을 쓰는 행위이고, 노동은 돈을 버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스트레스를 참는데도 한계가 있고, 놀기 위해 돈을 쓰는 것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돈을 벌려고 직장에 다니다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놀고, 놀다가 돈이 떨어지면 다시 직장에 다니는 삶을 늘 반복합니다.

일을 하면서 생기는 스트레스를 줄여야 지속적으로 돈을 벌 수 있습니다. 소비하지 않고 스트레스 푸는 방법이 바로 ‘수행’입니다. 노는 것에도 수행이 필요해요. 놀려면 돈이 많이 들잖아요. 그런데 욕망을 절제하면 노는 데 돈이 좀 적게 들어요. 그래서 노는 것을 좀 더 오래 지속할 수 있어요. 이렇게 노동과 놀이를 적절하게 일치시키는 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수행입니다. 지금은 돈 버는 일과 노는 일이 따로 있고, 스트레스받는 일과 스트레스를 푸는 일이 따로 있습니다. 수행도 또 따로 있어요.

붓다 담마의 핵심은, 일하는 시간, 노는 시간, 수행하는 시간, 이 세 가지를 일치시키는 거예요. 노동의 목표는 돈을 버는 겁니다. 놀이의 목표는 즐거움이에요. 수행의 목표는 헐떡거리는 마음을 잠재우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수입도 되고, 즐거움도 가져오고, 마음의 평정심도 가져온다면, 일, 놀이, 수행이 일치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세 가지를 일치시키는 게 쉽지 않습니다.

이것을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자원봉사입니다. 자원봉사는 노동을 놀이처럼 하는 거예요. 놀면 돈을 줘야 하는데, 돈 안주고도 놀 수 있으니까 굉장히 좋은 거죠. 그래서 정토회 자원활동가들은 초과근무를 많이 합니다. 노동이 아니라 놀이이기 때문입니다. (모두 웃음)

노동이면 절대로 초과근무를 안 합니다. 자원봉사는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노동과는 차원이 달라요. 또 자원봉사를 하는 데는 돈이 많이 안 들잖아요. 차비가 좀 드나요? (모두 웃음)

그런데 자원봉사에는 일의 성격도 있고, 놀이의 성격도 있습니다. 자원봉사를 하면서 직장 다니는 사람과 똑같은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도 있어요. 일주일에 하루 정도 와서 봉사를 하면 놀이 수준이에요. 그런데 일주일에 5일 동안 봉사하는 사람은 거의 직장에서 노동하는 수준입니다. 숫제 직장이라도 다니면 돈을 버는데 돈도 못 벌고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그만두려는 사람들도 있어요. (모두 웃음)

동물은 이미 저절로 일과 놀이가 일치되어 있어요. 소는 풀을 뜯는 노동을 따로 하고, 뛰어노는 놀이를 따로 할까요? 풀 뜯으면서 놀까요?”

“풀 뜯으면서 놀죠.”

“먹고살기 위해서 하는 일이 놀이가 되면, 노동이 곧 놀이이고, 놀이가 곧 노동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노동과 운동도 분리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노동 따로, 운동 따로, 놀이 따로, 수행 따로 하니까 바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하는 일이 생산도 되고, 놀이도 되고, 수행도 되고, 운동도 된다면, 삶이 훨씬 효율적이게 됩니다. 자연은 원래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도 자연의 일부니까 이렇게 되는 게 정상이에요.

그래서 노자는 ‘무위자연’이라고 했습니다. 자연으로 돌아가면 아무런 괴로움이 없어진다고 했어요. 그런데 여기에 뭐가 끼여서 이렇게 된 걸까요?

첫째, 욕심입니다. 일은 적게 하고, 돈은 많이 받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렇게 될 수 없잖아요.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는 거예요. 이게 욕심입니다. 둘째, 일을 하는 과정에서 자기 의견이 옳다고 고집을 합니다. 상대하고 부딪치니까 스트레스를 받는 거예요. 이게 성냄입니다. 셋째는 이치에 밝지 못합니다. 헛된 생각을 하는 거예요. 이게 어리석음입니다. 이치를 깨닫게 되면 일을 하면서도 스트레스를 안 받을 수 있어요. 소가 풀을 뜯듯이 내가 먹을 것을 내가 만드는 것은 마땅한 거예요. 일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면 특별히 스트레스를 푸는 행위가 필요 없어요. 일한다고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노는 게 필요한 거죠.

명상이라는 것도 일하면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움직임을 멈추는 거예요. 그러나 명상의 이치를 알게 되면, 명상도 생산하면서 할 수 있어요. 고추를 따면서 알아차림을 유지하고, 고추를 심으면서 동작을 알아차리면 그게 곧 수행이에요. 꼭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서 호흡을 알아차려야 명상을 잘하는 걸까요? 행선을 한다고 왔다 갔다 하는데, 그럼 아무것도 생산을 못 하잖아요. (모두 웃음)

그냥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니라 고추를 따고 고추를 심으면서 알아차림을 유지한다면, 노동이 곧 수행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도가 무르익으면 ‘평상심이 곧 도’라고 하는 겁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절하는 것도 그것이 수행이고, 운동이고, 놀이입니다. 절하면서 노는 거예요. 똑같이 몸을 움직이는 건데, 춤추는 동작을 하면 노는 거고, 절하는 동작을 하면 노동이에요? (모두 웃음)

요리하면서도 놀 수 있어요. 돈 받고 요리하면 노동이지만, 집에서 주말에 ‘야, 뭐 먹을래?’ 하고 요리하는 건 재미있잖아요. 그런데 이제는 너무 지쳐서 재미가 없는 거겠죠. (모두 웃음)

어떤 관점에 서느냐의 문제예요. 남이 해준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도 맛을 즐기는 놀이지만, 이건 소비적인 거예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요리하는 것도 재미있잖아요. 그걸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있고요. 그런데 우리는 이 요리하는 것과 먹는 것을 분리시켜요. 누구는 요리하고, 누구는 먹고, 누구는 일하고, 누구는 놀아요. 지금까지는 이것이 분리된 사회였어요. 낮은 사람은 늘 일해야 했고, 높은 사람은 늘 놀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양쪽 다 피폐해졌어요. 한쪽은 너무 노동이 지나쳐서 인생이 피폐하고, 다른 한쪽은 너무 쾌락에 빠져서 인생이 피폐해진 거예요. 이걸 조절하는 건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부자들을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적대관계에 서 있는 게 아니에요. 한쪽은 과소, 즉 너무 적어서 문제이고, 다른 한쪽은 과잉, 즉 너무 많아서 문제예요.

우리가 삶의 가치관을 바꿔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것만 조절을 하면 사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님이 늘 ‘다람쥐도 사는데 사람이 왜 못 살아요?’라고 하는 거예요. 다람쥐도 괴롭다고 자살하지는 않는데, 사람이 아무리 못나도 다람쥐보다는 낫지 않느냐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늘 남편이 어떻고, 아내가 어떻고, 자식이 어떻고 하면서 하소연을 해요. 그러면 제가 키우는 동물이 있냐고 묻습니다. 얼마 전에 강연장에서 어떤 분은 개를 키운대요.

‘개는 당신한테 뭐 해줍니까?’
‘제가 직장 다녀오면 요렇게 두 발 들고 반갑게 맞아줘요.’
‘그런데 남편은 요렇게 안 반겨준다는 거죠? 부부관계는 하세요?’
‘....’
‘개는 그런 건 안 해주지만 남편은 그건 해주잖아요. 매일 요렇게 반겨주는 것과 한 달에 한 번 안아주는 걸 비교하면, 어느 쪽이 밥 해먹일 가치가 있어요?’ (모두 웃음)

왜 강아지는 아무것도 안 해도 기꺼이 밥을 해먹이면서 그 이상을 해주는 남편에게 밥 해 먹이는 것을 문제 삼느냐는 겁니다. 그건 남편의 행위에서 오는 게 아니에요. 강아지한테는 기대를 안 하고 있고, 남편은 돈 벌 것이라고 기대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편에게는 ‘돈 벌라고 내가 널 만났지, 놀라고 만난 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강아지에게는 ‘처음부터 데려올 때 돈 벌라고 선택한 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차이밖에 없어요. 사실은 둘 다 아무것도 안 해요. 하나는 반겨만 주고, 하나는 안아만 주는 거죠. (박장대소)

이렇게 얘기하면 여러분이 ‘이게 무슨 법문이고 수행이냐’라고 하겠지만, 우리가 이 속에서 어떤 이치를 깨달아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죽어서 천당 간다’, ‘다음 생에 다시 부자로 태어난다’ 이런 게 아니에요.

내가 지금 괴로워하고 있는지 진단해 보세요. 화가 난다, 짜증이 난다, 미움이 있다, 슬프다, 외롭다, 허무하다, 이게 모두 ‘괴롭다’에 들어갑니다. 이런 부정적 심리상태가 곧 괴로움입니다. 이렇게 부정적 심리상태에 있다고 아는 게 바로 고(苦) 성제입니다. 이걸 자각하는 게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의 발견입니다.

그러면 이 괴로움의 원인이 뭘까요? 그 원인을 계속 규명해보면 처음에는 이랬다 저랬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다 보면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에요.

‘동산에 달이 떠서 당신을 슬프게 했습니까? 당신이 동산에 달이 뜨는 걸 보고 슬퍼한 겁니까?’

이렇게 수도 없는 예를 들어야 ‘아, 내가 그 모습을 보고 괴로워했습니다’라는 대답이 나와요. 달이 뜨는 걸 보고 슬퍼할 수도 있지만, 달이 뜨는 걸 보고 기뻐할 수도 있듯이, 그런 행동을 보고 기뻐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치적으로는 기뻐할 수도 있고 괴로워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나는 괴로워하는 것으로 이미 확정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괴로움은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서 일어나는 거예요.

이런 자각을 조금씩 해나가면 사실은 괴로워해야 할 마땅한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괴로워하고 있어요. 욕심이 끼어 있거나, 성냄이 끼어 있거나, 이치를 모르는 어리석음이 끼어 있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거예요.

운전을 배울 때 처음에는 운전 교습소에서 줄 그어놓고 그 안에서 왔다 갔다 하는 연습을 하지만, 조금 지나면 차를 몰고 길거리에 나가서 주행 연습을 하게 되잖아요. 그렇게 연습을 하다 보면 앞에 급정거하거나 끼어들기하는 사람이 있어도 나는 앞 차와의 간격도 조절하고 옆 차의 눈치도 봐가면서 운전을 통해서 편리함을 추구할 수 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는 옆에서 욕을 하는 사람도 있고, 욕심내는 사람도 있고, 온갖 사람이 있지만, 나는 그들을 탓하거나 그들에게 물들지 않아요. 그건 그들의 삶이고, 나는 이런 세상에 물들지 않고 내 삶을 조절해 나갈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일을 해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스트레스를 받지 않거나 덜 받고, 그런 스트레스를 푼다고 쾌락을 즐기는 과다 소비를 하지도 않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가 일과 수행을 일치시켜 나갈 수 있어요. 일하는 게 수행입니다. 그것이 곧 놀이고, 그것이 곧 수행이에요. 그래서 일과 수행의 통일이라고 하는 거예요.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의 삶이 달라져야 해요. 명상할 때만 주위 사람이 부처처럼 보이고, 명상 끝나면 하는 짓이 일반 사람과 똑같아요. 그러면 그게 어떻게 전법이 되겠어요? (모두 웃음)

우리가 세상에 살다 보면 아직 우리 수준에서는 물이 들기 쉬워요. 그렇기 때문에 매일 아침 ‘내가 수행자다’ 하고 정진을 하면서 하루 동안 물든 걸 빼는 거예요. 그래도 살다 보면 또 물이 들죠. 그러면 3개월에 한 번, 6개월에 한 번, 5일간 시간을 내서 정진하면서 또 때를 씻어 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꾸준히 정진을 해나가도록 합시다.

지금 북한 돕기 하는 것도 그래요. 우선 배고픈 사람은 먹어야 합니다. 자연 생태계로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슴도 배고프면 먹을 것을 줘야 해요. 배부른 자가 배고픈 자를 돕는 것은 인간이 가야 할 길, 즉 사람의 도리라고 해서 ‘인도(人道)’라고 합니다. 이걸 인도주의라고 해요. 그런 좋은 일을 하지만, 사람들은 어리석기 때문에, 반대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걸 이해하는 거예요.

‘아, 저 사람은 저걸 몰라서 저렇구나.’

설명해줘도 안 될 때가 있죠. 우리도 어떤 설명을 듣고 한 번 만에 딱 이해될 때가 많지 않잖아요. 안 보려고 하고 안 들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이해가 부족할 수도 있고요. 그렇게 우리가 이 운동을 하면서 반대하는 사람도 이해하고, 반대하는 가운데도 나는 이 일을 할 수가 있어요. 여러분도 매일 아침마다 절하고 기도할 때 하기 싫음이 일어나죠? 그래도 절하고 기도하잖아요?”

“예.” (모두 웃음)

“그게 놀이라면 어떨까요? 눈뜨자마자 만사 제쳐놓고 그것부터 할 텐데요. ‘어떻게 하면 안 할까?’ 이런 생각을 몇 번 하다가 할 수 없이 하잖아요. (모두 웃음)

수행은 그 싫은 마음을 이겨내는 거예요. 그렇게 자기 까르마의 저항을 이겨내듯이 모금 캠페인을 하면서 우리는 사회적 저항을 이겨내는 겁니다. 내가 내 까르마의 저항을 이겨내야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듯이 사회적 저항을 이겨내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항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저항 없이 사람들이 참여하면 많이 도와줘서 좋고, 저항이 있으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돼서 좋아요. 비가 오면 농작물에 좋고, 날이 맑으면 소풍 가기 좋은 것과 같습니다.

이런 관점을 갖고 모금활동을 하면 좋겠어요. 저항을 받을 때 막 싫은 마음이 들다가도 ‘아, 이것도 좋은 일이다. 여기에 내가 무너지는 게 문제지’ 이렇게 저항을 인정하고 꾸준히 해나가면 그 저항이 막 세게 부딪히다가도 나중에는 약해집니다. 우리가 절을 할 때 하기 싫은 마음이 확 올라오다가 나중에 약화되는 것과 같아요. 108배를 해보면 70배쯤 했을 때가 제일 힘들어요. 처음에는 괜찮다가, 조금 하기 싫다가, 70배쯤 가면 딱 그만해버리고 싶어요. 그런데 또 그 고비만 넘어가면 괜찮아요. 108배를 마치면 기분이 좋고요. 모든 저항이 다 그래요. 그러니 저항을 받을 때 멈추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거기서 딱 멈춰버리면 자괴감이 들고 상처가 남아요. 그런데 그걸 극복해서 이겨버리면 아무렇지도 않아요. 오히려 보람이 생깁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의 일상이 수행이 되도록 해보세요. 수행자는 노동을 놀이로 합니다. 놀이가 되면 일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회사에서든 집에서든 뭐든지 기꺼이 그냥 할 수 있어요. 별로 스트레스가 없으니까 남들처럼 악을 쓰고 놀 필요도 없게 돼요. 사람들이 노는 걸 굳이 따라갈 필요도 없고 부러워할 필요도 없어요. 그렇게 노느라고 소비하는 물자와 시간을 우리는 여유롭게 생산 활동에 쓰는 겁니다.

이렇게 관점을 바꾸면 나도 좋고 세상도 좋아요. 나도 좋고 정토회도 좋은 변화는 곧 우리가 사는 세상도 이롭게 하는 거예요. 정토회는 좋지만 세상에 해를 끼치는 것이나, 나는 좋지만 정토회에 해를 끼치는 것이 없잖아요. 그렇다고 정토회를 좋게 하기 위해서 내가 엄청나게 희생을 한다거나, 세상을 좋게 하기 위해서 정토회가 엄청나게 희생을 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런 관점에서 정진을 해나가시기 바랍니다.

개인 정진도 열심히 해야 하고, 정토회의 일상적인 활동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이번 6월 말까지는 북한 동포 돕기 모금 활동을 좀 적극적으로 해주십사 하는 부탁 말씀을 드리며 오늘 법회를 마치겠습니다.”

법문을 마치고 대중이 명상을 하는 사이 스님은 조용히 빠져나와 바로 두북으로 향했습니다. 낮밤 없이 하루를 쪼개어 사는 스님은 차에서 단잠을 잤습니다.

“밤처럼 푹 잤네.”

모내기를 마친 논에 뜨거운 햇살이 가득 내리쬐고 있었습니다.

지난주에는 INEB 스님들을 안내하느라 농사일을 많이 하지 못했습니다. 두북에 도착하여 늦은 점심을 먹고 농사일을 한 뒤 저녁에는 대구에서 즉문즉설 강연을 했습니다.

전체댓글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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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태

스님께 감사드리며
여러 봉사자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_^

2019-07-04 22:28:01

박재후

내가 하는 일은 놀이 나 마찬가지 임을 알면서도
투덜거렸네요
은퇴하고 싶다고 ...은퇴한셈치고 놀러 왔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좋네요 놀러오니 밥도 주고
아름다운 또 하루가 갑니다 바이

2019-06-19 16:51:01

정지나

나에대한 후회는 좌절감과 상처가 내게 남겨집니다...
조금씩 조금씩 살피고 살펴서 어색하고 저항감이 생기지만
그때그때 알아차려봅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2019-06-17 23: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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