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저도 북한에 동포가 죽는다. 모금한다 할 때 '이런 것은 대학생이나 국회의원이 하는 일이지. 왜 내가 하나? 나는 가정주부라 못한다.' 이런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다 스님의 법문을 듣고, ‘그래 자식을 안 낳고 어떻게 자식이 굶어죽는 아픔을 알겠나, 부자들이 어떻게 가난한 사람의 심정을 알겠나, 그럼 이건 내 일이다’로 바뀌고 '북한의 아이들이 굶어죽는 일은 엄마인 내가 할 일이다.'로 다가왔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모든 일을 내 일로 받아들이는 것이 결국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임진각 기도 마치고 도반들과 뒷줄 왼쪽 세 번째가 월광법사님▲ 임진각 기도 마치고 도반들과 뒷줄 왼쪽 세 번째가 월광법사님

복이 많아 복 지을 인연이 오다

제가 복이 많아서 복을 지을 수 있는 인연이 왔습니다. 그렇게 하다보니 제 문제도 해결되었습니다. 남북문제가 아니었으면 저는 게을러서 법사가 되지 못했을 겁니다. 마산 사람이 뭐하러 광화문에 올라오겠습니까? 그러니 이명박 대통령도 제게는 고마운 사람입니다. 이명박 대통령 아니었으면 절할 일이 어디 있었겠어요? 절할 일이 있으니 기도도 하고 법사도 빨리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남을 돕는 게 나를 돕는 거고. 남을 돕다보면 내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공부 못하는 건 굶어죽는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집안 일은 아무 걱정거리도 안되는 겁니다. 걱정도 다 돈이 있으니까 걱정이 되는 겁니다.

제가 마산여고를 졸업했는데, 당시에는 학교를 시험 봐서 들어갔습니다. 시험 당일엔 문 앞에서 부모님들이 기다렸지요. 저희 친정 어머니도 교문 앞에 서계시는데, 그때 지게를 진 할아버지가 “저년이 떨어져야 할 건데...저년이 떨어져야 할 건데...” 하는 걸 보셨답니다. 돈은 못 벌고 집은 가난한데, 아이가 붙으면 또 학비를 대줘야 하니 “저년이 떨어져야 할 건데”를 염불하신 것이죠. 우리가 아이 공부 못하는 것을 걱정하는 건 돈이 있어서 걱정하는 겁니다. 돈이 없으면 공부 못하는 게 오히려 효자가 됩니다.

문경수련원 마루 닦기▲ 문경수련원 마루 닦기

남편 입장에서는 그럴 만했습니다.

2002년부터 저는 직장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봉사 활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가족, 친지 그리고 거리의 시민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처음에 남편이 저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릅니다. 저보고 ‘미쳤다. 돌았다. 제정신이 아니다’라고 했었습니다. 거리모금 시작했을 때는 제발 길거리에 모금하러 나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혼하자고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릅니다. 이혼하자고 하면 잘못했다고 싹싹 빌고 또 거리모금하러 나가고, 못살겠다고 하면 또 잘못했다고 싹싹 빌고 법회 다니고 그랬습니다.

어느 날은 서울에 철야정진 기도하러 가려는데, 남편이 나가지 말라고 아파트 현관문을 철삿줄로 꽁꽁 묶었습니다. 근데 우리 남편 입장에서는 그럴 만 했습니다. 주말에도 나가고 주중에도 나가고 한 번을 집에 없으니, 남편도 하다하다 현관문을 굵은 철삿줄로 묶었던 겁니다. 제가 그걸 펜치 찾아서 풀고 나와서 길을 떠났습니다. 아이들에게도 네 엄마랑 이혼할 거라고 이야기 했었답니다. 그런데 아들이 ‘엄마가 나쁜 일 하는 것도 아니지 않냐’며 남편을 설득했다고 합니다.

남편이 너무 힘들어하니 한번은 제가 막 울었습니다. 밖에 나가서 남을 돕고 좋은 일을 한다고 하면서,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은 이렇게 힘들어 하니 이게 맞나 싶어서 설거지하면서 펑펑 울었어요. 그랬더니 남편이 놀라서 ‘왜 우냐고, 왜 우냐고’ 그랬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참 힘들었습니다.

"남편비위 잘 맞추고 잘 살겠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화 내지 않겠습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제 가슴에 남지 않겠습니다."
정토회 고문 각해보살님께서 제게 주신 기도문입니다.

지금은 남편이 “제발 당신이 남한테 욕 얻어먹는 거 싫으니까 집안에 결혼식, 명절 이런 때만이라도 좀 나타나 주라.” 그럽니다.

1223 평화대회 스리랑카 스님들과 함께 한 월광법사님▲ 1223 평화대회 스리랑카 스님들과 함께 한 월광법사님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정토행자의 길

정토회 와서 마음공부하지 않았다면, ‘남편 못살게 하고 아들 들들 볶고 결국 내가 괴로워서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자식에 대한 집착도 많고, 남편에 대해서도 의심하고 그랬거든요. 이제는 세상의 은혜를 알게 되니 가족, 스승, 도반, 친척, 친구, 선배, 후배, 옛날 직장 동료, 성주사와 한마음 선원 주지스님과 신도님들, 거리에서 모금과 서명에 동참해 주신 모든 분들, 일체중생, 자연의 은혜에 참 고맙습니다. 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전에는 제가 아들을 판사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토회에 와서 판사 만들려는 마음을 내려놓았습니다. 대신 아들에게 정토회를 말하니까 아들이 “엄마, 엄마가 나한테 바라는 게 판사에서 정토행자로 바뀐 거 아세요? 판사가 좋을 때는 판사 하라고 하다가 정토행자가 좋으니까 정토행자로 집착이 그대로 갔어요.”라고 했습니다. 깜짝 놀라서 미안하다 했습니다. 그래 놓고 가끔 메시지를 보냅니다. 요즘은 ‘내가 더 부지런히 수행 정진해야 아들이 이 길을 올 수 있지 않겠나. 부처님도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었듯이 이게 가장 큰 유산이다.’ 하면서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목포신항 콘테이너 법당에서 기도하는 월광법사님▲ 목포신항 콘테이너 법당에서 기도하는 월광법사님

반대는 해도 며느리가 자랑스러운 시어머니

아들이 고등학교 3학년 되고 4월에 학교를 그만다닌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래, 그만 다녀라. 엄마 아는 사람 중엔 초등학교 문 앞에도 못 간 사람도 많은데, 너는 고3까지 다녔으니 됐다. 그만 다녀라.” 했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너무 화가 나셨습니다. "우리는 옛날에 그 가난 속에서 아이들을 다 대학에 보냈는데, 너는 아무것도 어려움이 없으면서 맨날 걸뱅이(거지)가 되어 돈 통이나 들고 다니고, 뭐가 어려워서 그런 짓을 하러 다니냐. 손자도 안 돌보고." 그렇게 소리치셨어요. 시어머니께 그 소리를 들을때는 미운 마음이 들어서 한동안 갈등했지만, 나중에는 손자 대학 못 보내서 죄송하다고 손잡고 울면서 참회했습니다.

제가 팽목항에 좀 오래 있으면서 피부가 까맣게 탔습니다. 그때 시어머니를 뵈러 요양병원에 갔는데, 옆에 할머니한테 “저 며느리가 팽목항인가 뭐신가 저 있어 가지고 저래 꼬라지가 더럽다 아이가.” 하셨어요. 그런데 다음에 가니까 옆에 할머니가 콩나물국이라도 끓여 주라고 5만 원을 주었다며 받아주셨습니다. 한 번은 인도에 무슨 사고가 났을 때 시어머니를 뵈러가니 “너 인도 안 갔나? 그 사고 난 데” 하시는 것을 보고, 우리 어머니가 그렇게 반대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랑스러워하시는 것을 알게 되어 고마웠습니다.

앉아서 망상 피울 시간이 없다

팽목항에 처음에는 기도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사람은 거기에서 잘 수가 없었습니다. 봉사를 해야 된다 해서 낮에는 기도하고 밤에는 화장실 청소를 했습니다. 나중에는 유가족 식당에서 라면 끓여주는 일 했습니다. 식당에서 봉사 조금 하고 낮에는 천배씩 절 하고 쓰레기 분리수거하고 그랬죠. 현장에 가니까 기도가 더욱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다보니 앉아서 망상 피울 시간도 없었고 갱년기도 언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안산 다문화센터 3주년 기념 - 개원식 현수막 재활용 ▲ 안산 다문화센터 3주년 기념 - 개원식 현수막 재활용

다문화 센터 원장이 되어

안산에는 여러 나라 외국인들이 많이 와 있습니다. 아시아권이다 보니깐 동남아 지역에서 온 사람들도 많습니다. 스님께서 해외 나가시면 그 나라 스님들께서 ‘우리 나라 사람들이 한국에 가면 안 좋은 거 배워가지고 온다. 종교 바꿔 오고 술 먹는 거 배우고 고기 먹는 거 배워 온다. 우리 나라 사람들 좀 챙겨달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안산에 다문화 센터를 열었습니다. 지금은 제가 안산 다문화 센터 원장 소임을 맡아 3년이 지났습니다. 동남아 스님들이 오시면 법회도 하고, 그 나라 문화공연 장소나 연습 장소로 빌려주기도 합니다. 한국에 적응하면서 생기는 어려운 일이나 법률상담, 아픈 사람들 병원 진료도 하고, 한국어 교육, 다문화 가정의 어려운 일을 살펴서 한국 생활에 도움될 수 있는 일들 하고 있습니다.

다문화센터 나비장터에서 백악관 청원운동 앞줄 왼쪽 두 번째 월광법사님▲ 다문화센터 나비장터에서 백악관 청원운동 앞줄 왼쪽 두 번째 월광법사님

그동안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고 전쟁 난다고 할 때, 그 친구들이 ‘한국에 전쟁 나면 안 된다. 우리 한국에 돈 벌러 왔는데 전쟁 나면 우리는 어디로 가냐’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도 ‘한국에 돈 벌러 온 사람들이 평화롭게 일 하려면 평화운동을 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작년 평화 대회 때는 스리랑카 스님들과 근로자들, 태국 여성들이 함께 참가했습니다. 올해 초 평화협정 청원 서명에는 스리랑카 스님들과 근로자들 모시고 가서 다 같이 서명을 받았고,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 캄보디아 스님들과 근로자들, 네팔, 페루, 베트남에서 오신 분들도 적극 동참해주셨습니다.

또 우리가 도움만 주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도 복을 지을 기회를 주자는 취지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다문화 거리에서 JTS 거리모금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나비장터에서 넘쳐나는 물건들을 좀 더 필요한 곳에 가져가라고 해서 나비장터도 한 달에 한 번씩 하고 있습니다.

여기 안산에 동남아권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있다 보니 사람들이 드나들기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센터가 생기면서 사람들이 오고가고 하니 혈액순환이 되는 것 같습니다. 같이 소통하는 공간. 그래서 이 센터가 생긴 게 참 잘된 일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왔다갔다 교류하고 흑인에 대한 두려움도 없어지면서 고정 관념을 깨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 존재만으로도 참 소중하다. 저는 이런 공간을 열어주신 스님께 감사합니다. 또 후원해주시는 JTS 후원 회원들 덕분에 저는 다문화센터에서 재미나게 놀고 있습니다.

JTS 거리 모금에 동참해주신 동남아 근로자들, 앞줄 왼쪽 네 번째 월광법사님▲ JTS 거리 모금에 동참해주신 동남아 근로자들, 앞줄 왼쪽 네 번째 월광법사님

<정토행자의하루>기사 공유가 불편하다고 해서 분별심 올라와요.

바라는 마음이 없어야 됩니다. 기사를 아무도 안 읽어도 그냥 과정이 기쁨인 것을 알아야합니다. 저는 모금하면서 과정이 기쁨인 걸 좀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정토행자의하루>를 통한 전법도 내가 홍보하는 이 자체가 기쁨이어야 합니다. ‘즐거운 과정을 거친 결과는 옥이 아니고 똥이다.’ 스님께서 이런 관점을 잡고 과정을 즐겨라 하셨잖아요. 이 <정토행자의하루>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끼리 지금 이 만남이, 이 순간이 좋다.' 이런 과정을 즐기다 보면, 그 다음에 칭찬하고 비난하고 이런 것들은 연연하지 않게 됩니다.

제가 모금할 때 나는 똑같은 말을 하는데, 어떤 사람은 “정말 훌륭한 일을 하십니다. 대단하십니다.” 이렇게 칭찬하지만, “네가 미쳤나?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잠이나 자라. 신랑 밥이나 해 주라.” 이런 소리도 듣습니다. 그런데 그걸 보면서 ‘내 존재 자체는 미친년도 아니고 훌륭한 사람도 아니다. 나는 텅 빈 존재일 뿐이다. 이게 다 공이다.’ 하는 것을 체득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내 글에 대한 비난이나 내가 한 일에 대한 비난도 ‘아, 저분은 저렇게 생각할 수 있네.’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정토행자의하루>가 지금은 잘 안 읽는 것 같아도 언젠가 누군가는 읽게 됩니다. 제 기도문 중에 책 사주라는 기도문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안 되는 것 같았는데, 몇 년 뒤에 고맙다고 연락이 오더라고요. 그래서 좀 길게 보고 글 쓰는 그 자체에 기쁨을 느끼면 됩니다. ‘보고 안 보고는 내 소관이 아니다. 어떤 음식을 정성껏 만들어 맛보아 주세요’ 하는 마음으로 평가는 그들이 하는 겁니다. 또, 그들의 평가도 우리가 다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술가들 중에는 100년 뒤에 200년 뒤에 존중받는 작가들도 있잖아요. 지금은 "<정토행자의하루> 그거 아니야" 하더라도, 10년 뒤에 누군가는 그 글을 읽고 마음을 돌이키고, 자살하려던 한 사람이 다시 살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그 과정을 좀 더 중요하게 여기면 좋겠습니다.

환하게 웃으시는 월광법사님▲ 환하게 웃으시는 월광법사님

법사님 말씀 들으니 분별했던 마음이 부끄러웠습니다. 매일 아침 독송하는 보왕삼매론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 일이 쉽게 되면 뜻을 경솔한데 두게 되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여러 겁을 겪어서 일을 성취하라’ 하셨느니라.” 정토회도 법사님도 여러 겁을 겪어 성취해 나아가듯 <정토행자의하루>도 하루에 한 걸음씩 대중에게 다가가기를 바라봅니다.

‘대중 법사님의 이야기’를 기사로 만들며 저희의 좁은 시야로 법사님들의 이야기를 담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이었는지 절실히 느꼈습니다. 저희가 전한 이야기는 법사님들께서 걸어오신 길 중에 작은 한 부분입니다. 다만 오늘 우리가 나눈 이야기가 전국의 정토행자에게 전법의 씨앗이 되어 지혜의 싹이 트고 체득의 나무로 자라기를 바랍니다. 후배들을 위해 기꺼이 인터뷰에 응해주시고, 다양한 체험과 깊은 지혜를 나눠주신 법사님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속기_박선영 리포터 (진주정토회 사천법당)
사진_구자흥 리포터 (창원정토회 의창법당)
녹취_정명숙 리포터 (마산정토회 마산법당)
편집_목인숙 (경남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