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5.11.29 (오전) 정토불교대학 가을학기 특강수련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새벽 6시부터 9시까지 문경 정토수련원에서 열린 정토불교대학 가을학기 특강수련에 참가해 즉문즉설 강연을 한 후 낮 12시부터 3시까지는 대전 정토법당에서 청년 정토불교대학 특강수련에 참가해 즉문즉설 강연을 했습니다. 먼저 새벽에 있었던 정토불교대학 특강수련 소식부터 전해드리겠습니다. 

 

강원경기동부, 인천경기서부, 대구경북 3개 지부에서 정토불교대학 수업을 듣고 있는 480여 명의 학생들은 어제부터 1박2일 동안 문경 정토수련원에서 특강수련을 진행 중입니다. 오늘은 새벽 4시에 기상해 예불과 108배 정진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스님도 새벽 정진을 마치고 6시에 강연이 열리는 대수련장으로 들어왔습니다. 

 


▲ 문경 정토수련원 대수련장

 

불교대학생들은 각 법당에서 그동안 영상으로 스님의 강좌를 들어왔는데, 평소 궁금한 점이 있었지만 영상 강좌 도중에 그 자리에서 바로 묻고 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새벽 6시부터 9시까지 무려 3시간 동안 스님과 집중적으로 궁금한 점을 묻고 답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스님이 법상에 오르자 전국에서 모인 480여 명의 불교대학생들은 무척 기다렸다는 듯 환한 미소와 함께 스님을 맞이했습니다. 

 


 

법상 위에 오른 스님은 불교대학생들의 얼굴을 한눈에 주욱 살펴본 후 먼저 안부를 물었습니다. 

 


 

“불교대학 다닌 지 3개월 다 되어 가죠? 즉문즉설보다는 공부가 어렵지요?”

 

“네.”

 

“원래 공부란 것은 강의를 듣고 모르는 게 있으면 바로 질문해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동시에 여러 군데 몸을 나툴 줄은 알지만 아직 도력이 부족해서 여러분들을 제 앞으로 동시에 오게 하는 능력은 없어요. (모두 웃음) 

 

아직은 쌍방 통화가 아닌 일방 통화만 되고 있습니다. 제가 동시에 여러분들에게 나퉈서 여러 곳에서 강의하는 건 되는데, 여러분들이 수업 끝나자마자 바로 묻는 건 아직 안 돼요. 그래서 오늘, 3개월 만에 모두 한 자리에 모여서 그 동안 공부하면서 의문이 생겼지만 못 물어보던 것들을 물어보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이렇게 가볍게 인사를 한 후 곧바로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불교대학생들은 사전에 질문지로 궁금했던 점들을 모두 써내었습니다. 스님은 올라온 질문지를 하나씩 읽어가며 답변을 해주었습니다. 

 


 

총 15명의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할 수 있었습니다. 나머지 추가 질문이 더 있었지만 시간이 부족해 다 답변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갑작스런 사고를 어떻게 인연과보의 원리로 설명할 수 있는지 질문한 내용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스님은 흔히 ‘인연과보’의 원리와 ‘인과응보’의 원리를 혼돈하기 쉽다며 그 차이점에 대해 명쾌한 설명을 들려주었습니다.  

 

“인연과보에 대해 질문하고 싶습니다. 가까운 친인척의 갑작스러운 사망이나 중병은 저의 과보입니까? 아니면 그 분의 과보입니까? 과보가 아니라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과보로 보아 기꺼이 받아들이고 무엇을 과보가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합니까? 과보가 아닌 것은 왜 일어나는지요?”

 

“‘인연과보(因緣果報)’와 ‘인과응보(因果應報)’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제 이야기를 들을 때까지 인연과보와 인과응보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많았을 겁니다.  

 


 

잘 하면 상을 주고 잘못하면 벌을 준다는 게 인과응보예요. 모든 자연신앙에는 인과응보 사상이 있습니다. 유럽도 그렇고, 인도도 그렇고, 중국도 그렇고, 한국도 그래요. 가장 대표적인 표현이 ‘천벌 받을 거다’라는 말이죠. 하늘이 가만 두지 않으리라는 뜻입니다. 기독교 식으로 말하면 구약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하나님 말을 안 들으니까 소돔과 유황불로 지져버리고 소금기둥으로 만들어서 응징하는 거예요. 남의 눈을 멀게 했다면 다음 생에 애꾸눈이 된다거나 남의 돈을 훔쳤다면 다음 생에 갚아야 한다는 게 인과응보입니다. 징벌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거예요.

 

불교의 인연과보는 그런 징벌적 사고가 아니라 원인과 결과의 관계입니다. 쉽게 말하면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거예요. 가치관이 개입된 게 아니에요. 콩을 심어야 콩이 나지, 애초에 콩을 안 심었는데 콩이 날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가치관적으로 접근해서 ‘좋은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생기고 나쁜 일을 하면 나쁜 결과가 생긴다’ 이렇게 적용하면 인과응보와 비슷해집니다. 그래서 혼돈이 생겨요. 그러나 원래 인연과보는 가치관적 접근이 아닙니다. 과학적 접근이죠. 

 


 

‘내가 어떤 사람에게 기대를 가지면 실망한다.’ 이건 가치관적 접근이 아니라 실제예요. 기대를 많이 가지면 실망이 크고, 기대를 별로 안 가지면 만족이 큽니다. 그러니 내가 어떤 기대를 갖느냐, 내가 어떤 관점을 갖느냐에 따라 그게 괴로울 일이 되기도 하고 괴로울 일이 아니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하고 실망 안 하기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합니다. 내가 어떠냐, 내 마음이 어떠냐를 중시하는 거예요.

 

어떤 물체가 있는데 ‘착한 사람이 밀면 움직이고 나쁜 사람이 밀면 안 움직인다’고 말한다면 가치관적인 접근, 윤리적인 접근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물체가 움직였다는 것은 힘이 가해졌다는 이야기잖아요. ‘힘을 가하면 이 물체는 움직인다’ 이렇게 접근하면 원인과 결과를 보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든 현상이 일어나면 반드시 원인이 있고,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습니다. 그것에 다시 윤리 도덕관을 접목하면 인과응보와 비슷해집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인연과보는 윤리 도덕관을 접목하기 이전의 문제입니다. 

 

그럼 그것을 왜 ‘인연과보’라고 할까요? 흔히 ‘인과’라고 하지만 정확히는 ‘인연과보’예요. 왜 ‘인(因)’이 아니라 ‘인연(因緣)’일까요?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난다는 건 인과예요. 그런데 콩을 심었지만 콩이 안 날 수도 있어요. 땅이 건조하거나 흙의 온도가 낮으면 싹이 안 납니다. 그런 밭의 조건을 ‘연(緣)’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만 갖고 되는 게 아니라 인연이 만나야 과보가 생기는 거예요. 

 


 

인을 직접적 원인, 연을 간접적 원인이라고 합니다. 이 원리는 환경을 중요시합니다. ‘인과’라고 하면 환경을 무시해요. ‘인연과보’라고 하면 인연이 만나야, 즉 인연이 맞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씨앗과 환경 조건이 같이 결합해야 하기 때문에 ‘인연’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예컨대 사람이 나쁜 짓을 한다고 생각해봅시다. 나쁜 짓은 나쁜 짓인데, 산속에서 자기 혼자 한다면 별로 과보가 없어요. 인은 있지만 연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남을 주먹으로 한 대 때렸다고 생각해봐요. 길 가다가 남을 한 대 때렸다면 그 조건에서는 나쁜 짓이 돼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이려고 덤비는 걸 말리다가 내가 한 대 때려서 그걸 해결했다고 하면 때린 건 똑같지만 과보가 달라요. 때린 행위라는 원인은 똑같지만 그 원인이 발생할 때 주어진 환경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과가 아니라 인연과보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지극히 과학적인 이치예요.

 

그런데 이걸 가치관적으로 접근해서 ‘좋은 일을 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난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내가 좋은 일을 해도 환경에 따라 좋은 결과가 날 수도 있고 나쁜 결과가 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나쁜 짓을 했다고 반드시 나쁜 결과가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조건에서 나쁜 짓을 했느냐에 따라서 우연찮게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어요. 제가 아는 사람은 둘이 싸우다가 밀쳤는데 상대가 넘어져서 머리를 다쳤어요. 그래서 병원에 데려가 검사를 했는데 뇌종양이 발견됐습니다. 종양을 발견했으니 넘어져서 다친 것은 오히려 잘 된 일이 되었습니다. 그냥 놔뒀으면 죽을 뻔했는데 조기발견해서 살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다고 이 사람이 밀친 게 처음부터 잘 한 건 아니잖아요. 밀친 건 잘못이지만 결과는 좋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5.16 쿠데타를 일으킨 건 헌정질서를 문란시킨 것이니 처음부터 법률적으로 잘못된 거예요. 그런데 이걸 잘 됐다고 말하면 앞으로 누구든지 쿠데타를 일으켜도 된다는 뜻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니 결과가 좋았다고 해서 원인을 미화하면 안 돼요. 그런데 그 결과로 산업화에 성공한 건 사실이에요. 원인이 잘못됐다고 결과가 다 잘못됐다고 말해도 안 되고, 결과가 좋다고 원인이 다 좋다고 말해도 안 됩니다. 

 


 

의도와 결과는 이처럼 조건이 어떠냐, 어떤 환경에서 작용했느냐에 따라 네 가지 종류로 나타납니다. 의도가 좋았는데 결과도 좋을 수 있고, 의도가 좋았는데 결과는 나쁠 수도 있고, 의도는 별로 안 좋았는데 결과는 좋을 수도 있고, 의도가 별로 안 좋았는데 결과 역시 나쁠 수도 있습니다. 인과응보와는 달라요. 인과응보는 의도가 좋으면 결과가 좋고 의도가 나쁘면 결과가 나쁘다는 이야기예요. 

 

그런데 이 인연과보에서 볼 때는 의도가 좋으면 결과가 좋을 확률이 의도가 나쁠 때에 비해 높아요. 의도가 나쁘면 의도가 좋을 때보다 결과가 나쁠 확률이 높고요. 그래서 우리가 선택을 할 때는 100% 결과가 좋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의도를 좋게 갖는 편이 낫습니다.

 

‘콩을 심으면 싹이 난다’ 이 말은 100% 확실한 것은 아니에요. 콩을 심어도 조건이 맞지 않으면 싹이 안 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콩 싹이 났다면 100% 콩을 심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런 게 수학에서 말하는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이에요. 결과를 가지고 이야기할 때는 어떤 원인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어떤 원인이 있었다고 해서 반드시 어떤 결과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환경 문제가 작용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반드시 그렇다’고 하지 않고 ‘그럴 확률이 높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윤회와 인과응보로 따진다면 장애가 있는 아이를 낳았을 때 대부분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아이를 낳았을까?’라고 합니다. 장애가 있는 아이를 어떤 죄의 과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그러나 장애는 어떤 죄의 과보도 아니에요. 그냥 다를 뿐이죠. 

 

여기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장애인이라도 행복할 권리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여자로 태어난 것은 어떤 죄의 잘못이 아니며, 여자라도 남자와 다름없이 인간다운 존엄과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똑같은 존엄과 권리가 있어요. 피부가 검은 사람도 흰 사람도 똑같은 존엄과 권리가 있습니다. 이게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인과응보의 가장 대표적인 게 인도의 윤회사상인데, 우리가 이런 식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지금의 불교가 얼마나 세계의 인권 존중 추세에 어긋나는지 몰라요. 설령 불교가 원래 그리 가르쳤다 해도 ‘이건 맞지 않는다’고 해서 고쳐야 할 판인데 부처님이 가르치지도 않은 걸 고집할 이유가 뭐가 있어요? 그러니까 젊은이들이 절에 안 오고 시대에 뒤떨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불교를 잘못 믿었기 때문입니다.

 


 

왜 잘못 믿게 되었을까요? 불교가 인도화하면서 힌두적인 걸 받아들이고, 그 상태에서 다시 우리에게 전래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통(傳統)과 정통(正統)을 구분해야 해요. 과거로부터 전수받은 것은 다 전통이에요. 전통에는 좋은 것도 있지만 안 좋은 것도 있습니다. 남녀를 차별하는 전통, 신체 장애를 죄악시 하는 전통은 나쁜 거예요. 그러면 이런 거는 개선해야 해요. 정통은 ‘바른 것’이라는 개념이에요. 우리 정토회는 정통 불교를 계승한다고 하지, 전통 불교를 계승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전통을 다 부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전통은 특별하게 진리에 어긋나지 않으면 가능한 계승하는 게 좋습니다. 제가 입고 있는 승복은 전통이니 바꿔도 됩니다. 그러나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즉 이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거나 진리에 어긋나지 않으면 굳이 바꾸지 않고 전통으로 존중하는 게 좋습니다.

 

후쿠시마에 지진이 나서 많은 사람이 죽은 걸 보고 ‘일제 강점기 때 못된 짓 한 벌이다’라고 하면 불교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전통적인 인과응보 사상에서 본 거예요. 그러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일본 사람들이 독도는 자기네 땅이라 우기고 위안부 사과도 하지 않고 일제 침략 사과도 안 하는 건 나빠요. 그래도 사고가 나서 사람이 죽고 재앙을 입으면 도와줘야 한다는 것이 불교의 자비 사상입니다. 여러분은 이걸 잘못 생각해서 ‘천벌을 받았다’, ‘전생에 죄가 많아 쥐로 태어났나 보다’, ‘성질이 독해서 뱀으로 태어났다’ 이러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생명은 다 제 나름대로 진화해온 거예요. 모든 것은 인연과보로 움직일 뿐입니다. 인연과보에 대해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지은 인연의 과보는 피할 수가 없다, 

깊은 산속 깊은 바다 속에 숨는다 하더라도.

지은 인연의 공덕은 없어지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지은 인연의 과보는 피할 수가 없다, 깊은 산속 깊은 바다 속에 숨는다 하더라도’라는 말에는 이어지는 뒷 문장의 말뜻도 이미 들어 있습니다. 지은 인연의 과보라는 것은 좋은 인연, 나쁜 인연을 다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복을 지었으면 복이 따라오고 죄를 지었으면 죄가 따라온다는 의미예요. 그런데 이 말은 ‘나쁜 짓을 했으면 과보가 따른다’라는 의미로 주로 쓰일 때가 많기 때문에 제가 ‘지은 공덕은 없어지지 않는다’라는 뒤 문장을 만들어 추가 설명한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다 저축되어 있어요. 쉽게 이야기해서 지금 돈을 빌려서 썼다면 나중에 갚아야 하고, 지금 저축을 해두면 나중에 목돈을 타게 되는 이치입니다. 그게 달리 되지는 않아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죄를 지어놓고도 벌을 받지 않겠다는 것은 빚을 내서 실컷 써놓고 ‘부처님, 이 돈 안 갚아도 되게 해 주세요’ 하고 비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자꾸 도망가지 말고, 여러분에게 주어진 조건을 받아들이세요. 예쁜 여자 종아리가 만지고 싶어서 만졌으면 감옥 가도 후회하지 말고 ‘그래도 한번 만져봤으니 이런 대가를 치러도 괜찮다’ 이러면 됩니다. 그러나 감옥 가기 싫다면 만지고 싶더라도 만지지 말아야지요. ‘만지고 싶은데 어떻게 안 만져요?’ 이런 소리 하지 말란 말이에요.” (청중 웃음)

 


 

스님의 재미있는 비유에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답변을 다 듣고나니 정말 우리는 인연과보와 인과응보를 혼돈해서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불교는 과학적으로 사물을 파악하고 이해하도록 해주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명쾌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새벽 6시부터 시작된 강연이라 아무리 좋은 스님의 말씀이지만 눈을 비비며 졸려하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두들 조금이라도 잠을 깨어보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서 강연을 계속 듣는 열의를 볼 수 있었습니다. 

 


 

15개의 모든 질문에 대해 답변을 마치고 나니 어느덧 3시간 20분이 훌쩍 지났습니다. 스님은 3시간 넘도록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열정적으로 답변을 해주었습니다. 중간에 목이 좀 아프신 듯 기침을 여러 차례 하셨지만, 스님과의 만남을 오랫동안 기다렸던 대중들을 위해 더 힘을 내어 강연을 하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마칠 시간인 9시를 넘기고도 20여 분이 흐르자 스님은 “답변해주지 못한 질문이 더 있지만 어쩔 수가 없다”고 하면서 마지막으로 마무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깨달음은 아상과 권위를 버려야 한다고 하면서 평범한 여러분들이 가장 공부하기 좋은 것이라고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저희 정토회에는 부자나 사회적 지위가 아주 높은 사람, 인기 연예인들이 잘 안 옵니다. 이런 사람들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히려 더 필요하지만 대중과 같이 앉아서 하는 걸 못 견뎌 해요. 그래서 늘 소수만 대상으로 특별 과외 하듯 비공개 법문을 해줄 수 없냐고 졸라요. 깨달음의 장도 이런 데 와서 같이 자면서 하는 거 말고, 돈을 얼마든지 내도 좋으니까 고급 호텔에서 편안하게 할 수 없냐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천만 원쯤 받을 수도 있고, 그런 사람들을 확 교화시켜야 사회에 영향력을 줄 수 있지 않느냐고 하는 권유도 여러 번 들었어요. 

 


 

그러나 깨달음이라는 것은 그렇게 해서는 안 돼요. 자기의 아상과 권위를 버려야 깨치는데 그걸 안 버리는 걸 조건으로 걸어놓으니, 버리라고 한들 버려지겠어요? 불교대학을 다닌다고 하더라도 조금 잘난 사람들은 오늘과 같은 이런 자리에 안 옵니다. (청중 웃음) 

 


 

한 방에 같이 자고 화장실에 가면 바람이 들어와서 엉덩이가 시원한 걸 자기 체면에 안 받아들이려고 하거든요. ‘나’라는 것을 내려놔야 깨달음의 길로 가는데 그걸 못 내려놔요. 

 

정토회가 부자나 높은 사람들을 싫다고 내치고 막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이런 환경에 오기가 어려운 거예요. 일반 절에는 갈 수 있습니다. 특별대우를 해주니까요. 여기는 특별대우를 안 해주잖아요. 밖에서 뭘 했든 여기 오면 다 똑같이 해야 하니까 못 와요. 

 

또 너무 가난하고 생활이 어려운 사람도 여기 오기 힘들어요. 오지 말라는 건 아닌데, 시간을 내어 저녁마다 공부하고 봉사에 참여하거나 지금처럼 1박 2일 프로그램에 오기가 현실적으로 좀 어렵죠. 그래서 이 문제는 좀 특별 대책이 필요해요. 이 사람들의 처지에서는 현재와 같은 정토회 프로그램에 참여하기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생활이 너무 어려워도 진리를 추구하기가 어렵고, 생활이 너무 좋아도 진리를 추구하기가 어렵습니다. 생활이 적당할 때 공부하기가 좋아요. 그러니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들은 딱 공부하기 좋습니다.” (청중 웃음)

 

부자나 사회적 지위가 높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는 것이라는 말씀에 모두들 함박 웃음을 지으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3시간이 넘도록 열정적인 강연을 해준 스님에게 다시 한번 뜨거운 박수 갈채를 보내주었습니다.  

 


 

이렇게 불교대학 특강수련을 마치고, 대수련장을 나와 곧바로 대전으로 출발했습니다. 

 

11시 30분에 대전 시내에 도착해 국수로 간단히 점심을 먹은 후 12시부터는 대전 정토법당에서 청년 정토불교대학 수강생들을 위한 특강수련에 참가해 즉문즉설 강연을 해주었습니다. 청년들과의 즉문즉설 강연 소식은 다음 이야기에 계속 이어집니다...

 

※ 법륜 스님과 함께하는 '인도 성지순례' 참가자 접수가 진행 중입니다.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인도의 10대 성지를 내 발로 직접 밟아보고 그 감흥을 느껴보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아래 배너에서 직접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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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왕

스님?기독교 천주교에서는 왜 모든걸 하느님이 창조했다합니까?공기 물 풀한포기 모두 하느님의 창조물이라니---자연까지도 극히 과학적인 인연법 아닌가요? 오늘천주교인을 만나 답답해서 혼났어요 이럴땐 어떻게 해야하나요

2015-12-03 17:55:30

손경화

오늘에서야 알았습니다.
인연과보와 인과응보의 차이를.
스님의 말씀은 정말 어렵고도 심오한 진리들을 중생들을 위해 쉽게 찬찬히 알려주시니 그 자체로도 감동이네요.!!
늘~~-감사해요.
오늘도 저의 행복과 맺은 인연들을 위하여 좋은 연들 만들어가는 삶 채워가겠습니다.^^

2015-12-03 11:03:18

안도현

진리에 따른 말씀 큰 도움이 됐습니다. 감사드립니다~~!

2015-12-02 10:4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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