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환인 ▶ 백암산성 ▶ 심양공황
2016.8.21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9일째 “백암산성”


 

안녕하세요? 오늘은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의 마지막 9일째 날입니다. 새벽 5시에 환인을 출발해 백암산성으로 향했습니다. 

 

원래 국도로 가면 4시간 30분이면 갈 수 거리인데 중간에 터널이 무너져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고속도로를 타고 푸순을 지나 1시간 더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가야 할 길이 멀다보니 식당에 들를 시간이 없어서 식사는 버스 안에서 청년들이 좋아하는 빵과 옥수수로 대신했습니다. 

 


 

환인에서 백암산성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지난 8박9일 동안의 역사기행 소감을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소감문을 발표하는 중간중간에는 노래를 한 곡씩 불러가며 여행이 끝나가는 아쉬움을 달래기도 했습니다. 역사기행의 감동을 즐거운 노래로 재미있게 표현하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팀은 8월13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톡공항에 도착하여 연해주에 있는 여러 항일독립유적지와 발해 유적지를 발로 밟은 후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와서 두만강 유역을 지나 북간도의 항일독립운동유적지, 발해 유적지를 지나 백두산 천지에 오른 후 압록강을 따라 내려오며 집안과 환인에 있는 고구려 유적지를 둘러보았습니다.

 

소감문의 내용을 모두 소개할 수는 없지만 몇몇 인상적인 구절들만 함께 나눕니다. 

 


▲ 8박9일 동안의 소감 나누기

 

“지금의 시대적 과제는 통일임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통일에 기여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그동안 나만 생각하는 삶을 살아왔는데, 역사기행을 하면서 처음으로 함께 행복한 삶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역사의 변방이 아닌 역사의 중심이 되는 우리 나라를 만들어가겠습니다.” 

 

“염주성에서 우거진 갈대숲을 손과 발로 헤치시며 제자들을 위해 새 길을 만드시던 스님의 뒷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저 모습이 스님의 일생이셨겠구나 싶어 가슴 저리게 뭉클했습니다. 스님은 남들이 걷지 않는 곳에 새 길을 만드시느라 평생 고된 삶을 사셨지만 저희들은 스님이 먼저 닦아주신 그 길 위에서 통일의 새 역사를 쓰겠다는 다짐을 해보았습니다.”

 

“북녘땅의 뙈기밭을 보면서 너무나 안타까웠고, 통일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꼈습니다. ‘저들의 고통을 내가 먼저 알게 되었을 뿐이고, 먼저 알게 되었으니 그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라는 스님의 말씀은 큰 울림으로 가슴에 남았습니다.”

 

“청산리전투터에서 시낭송을 할 때 ‘당신의 군복이 무슨 색깔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라는 시구가 가슴을 울렸습니다.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다같이 두려움에 떨었을 그 당시 청년들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습니다. 더 이상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발원할 수 있었습니다.”

 


 

“역사책에서만 보던 것들을 직접 내 발로 밟고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특히 고구려의 무덤 벽화를 직접 보면서 지금까지도 그 그림이 남아있을 수 있다는 사실과 어쩜 저렇게 아름답게 그림을 그렸는지에 대해 감탄했습니다.”

 

“우리 역사가 중국이나 서양보다 결코 뒤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국내에 있는 유적지보다 훨씬 스케일 장대하고 컸다는 사실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유럽이나 중국 여행을 갔을 때 스케일에 주눅이 들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통일이 되면 우리가 다녀왔던 고구려 발해 유적지를 보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을 통해 쉽게 찾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통일이 되면 중국의 조선족, 러시아의 고려인들과 국경이 맞닿게 되어 교류도 활발해질 것이고, 그들의 아픔도 더 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통일이 되면 우리는 세대적 자부심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통일을 간절히 꿈꾸게 된 여행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살아 있음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듣고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역사가 중요하다고 우리 민족은 이랬다고 과연 누가 알려주려고 할까요. 최선을 다해 역사를 우리에게 알려주려고 하시는 스님에게 감사의 마음과 존경의 마음이 올라왔습니다. 민족의 뿌리에 대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습니다.”

 

8박9일 동안 150여 명의 청년들이 정말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느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소감문을 듣다 보니 당시의 감동이 다시 되살아나서 눈물이 핑 돌기도 했습니다. 

 

소감문 발표가 끝나자 버스 창 밖으로 높은 빌딩들이 우뚝 솟은 심양시가 보였습니다. 스님은 잠시 창밖을 보라고 하면서 심양시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저기 보이는 도시가 심양입니다. 옛날 이름으로는 봉천입니다. 우리 민족에게는 배달시대에는 배달의 영토였고, 고조선시대에는 고조선의 영토였고, 부여시대에는 부여의 영토였고, 고구려시대에는 고구려의 영토였습니다. 그 때의 중심은 심양이 아니었고, 심양보다 조금 남쪽에 있는 요양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요동성’이라고 불렀습니다. 

 


▲ 창밖으로 멀리 보이는 도시가 심양.

 

심양은 지금 동북3성의 중심도시입니다. 인구는 900만 명 정도입니다. 우리가 다녔던 곳이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인데, 이 세곳을 합쳐서 동북3성이라고 부릅니다. 옛날 말로는 만주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만주는 대평원입니다. 만주의 동쪽은 백두산을 둘러싼 산지 지형이고요. 만주의 서쪽인 내몽고 자치주 쪽은 사막으로 연결되는 초원이고요. 그 사이에는 대평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동북3성의 면적은 79만 제곱킬로미터입니다. 남한 면적의 8배입니다. 남북한 합한 면적의 4배에 달하는 광활한 영토입니다. 우리 민족이 활동했던 무대는 여기에 내몽고 자치주와 하북성까지 포함되니까 100만 제곱킬로미터가 훨씬 넘는 동북아대륙입니다. 

 

동북3성에서 생산되는 식량이 한해에 1억1천톤 정도 됩니다. 길림성에서 생산되는 옥수수만 1800만톤입니다. 북한에서 필요로 하는 식량이 한해에 600만톤입니다. 사료를 제외한 순수 식용으로는 400만톤 정도가 필요합니다. 현재 북한이 400만톤 생산하고 있으니까 겨우 먹고 사는 수준인 겁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북한에 옥수수 100만톤 지원하는 것은 큰 일이 아니에요. 

 

만약 북한이 앞으로 중국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안보도 중국에 의존하고, 경제도 중국에 의지하게 되면 북한은 빠른 속도로 성장하게 될 겁니다. 남한이 미국의 영향권 아래에서 여러 가지 발전도 했지만 외교안보적으로는 자주성을 잃었듯이 북한도 중국에 의지하면 발전이 빨라지겠지만 자주성은 잃어 가겠죠. 그렇게 되면 통일은 점점 어려워질 것입니다. 

 

미국과 중국이 협력하면 남북이 지금 갈라져 있어도 서로 협력할 수가 있는데, 앞으로 미국과 중국은 경쟁이 치열해질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북한이 중국의 지원을 받게 되면 미국과 중국의 대리전으로 남한과 북한이 갈등하는 구조가 되기 쉽습니다. 어쨌든 중국은 동북3성만 갖고서도 북한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줄 수 있는 토대를 갖고 있습니다. 그 동북3성의 중심도시가 이곳 심양입니다.”

 

북한이 중국으로 기울게 되면 통일은 점점 멀어지게 된다는 스님의 지적에 가슴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쉽게도 현 정부의 통일 정책은 스님의 우려대로 북한과의 갈등을 더욱 촉발시키며 북한이 중국으로 더욱 의존하게 몰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통일 정책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히 느껴졌습니다. 

 

스님의 설명이 계속되는 사이 등탑시를 지났습니다. 저 멀리 나지막한 산 주위에 성벽이 둘러쳐진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산을 가르키며 저곳이 백암산성임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백암산성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저기 왼쪽에 10시 방향에 산이 하나 보이죠. 중턱 즈음에 성벽 쌓은 것이 보이죠. 저기가 백암산성입니다. 산의 오른쪽은 엄청나게 높은 절벽이여서 성벽을 안 쌓아도 될 정도입니다. 고구려의 성은 항상 절벽을 끼고 쌓았습니다.

 


▲ 백암산성

 

산 꼭대기에 망대가 보이죠. 저 위에 올라가면 이 주위가 확 트여서 전망이 훤히 보입니다. 요동벌에서 주욱 평야가 이어지다가 여기서부터 산이 시작됩니다. 여기서부터 환인에 있는 졸본성, 집안에 있는 국내성까지는 점점 산이 높아져서 1000미터까지 높아집니다.

 

대련부터 시작해서 요양을 지나 장춘까지 연결해서 쌓았던 것이 천리장성입니다. 수나라와 당나라는 이 방어선을 뚫기 위해 고구려를 침입해 들어왔고 고구려는 이 방어선에서 대부분 그들을 막아냈습니다. 수나라 양제 때의 1차, 2차 침입은 여기서 다 막아내었고요. 그러나 나중에 100만 대군을 이끌고 왔을 때는 여기가 뚫렸습니다. 압록강 건너 평양 가까이까지 침공했지만 고구려는 살수대첩으로 이것을 막아냅니다. 

 

당 태종이 침입했을 때는 요동성이 함락되었습니다. 그러나 안시성에서 양만춘 장군이 끝까지 막아내면서 결국 당 태종은 부상을 입고 돌아갔습니다. 그로부터 20년 후에 당 고종 때 다시 침입을 했지만 연개소문이 이를 막아냅니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죽자 아들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면서 결국 아들 남생이 당나라에 투항하고 당나라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면서 내우외환으로 고구려는 멸망합니다. 나라를 잃은 고통이 30여 년 정도 지나자 그들은 발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워서 다시 그 기상을 살려나갔습니다. 

 

당시 선조들의 기상이 어땠는지를 잠시 후 백암산성에 올라가서 느껴보려고 해요. 지금까지는 성을 봐도 많이 허물어진 것만 봤습니다. 복원을 했더라도 요즘 만든 것이다 보니 감흥이 덜 한데, 백암산성은 당시에 쌓았던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올라가는 서남쪽은 성벽이 많이 무너졌어요. 이유는 성벽 아래에 마을 사람들이 돌을 다 주워가서 자기 집 담장을 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위쪽에 서쪽 성벽은 아직도 7~8m 되는 성벽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산성이다 보니까 규모는 작은 편입니다. 당시에 주도시는 요동성이었습니다. 요동성의 외곽에서 요동성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 백암산성입니다.

 

이 성은 547년 고구려 24대 양원왕 때 성을 개축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언제 처음 쌓았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요. 개축한 뒤 549년에 돌궐족이 침입해 들어왔다고 해요. 성을 얼마나 견고하게 쌓았는지 저 조그마한 성을 돌궐족 군대 1만명이 공격했는데도 함락시키지 못했다고 해요. 돌궐족은 엄청나게 전투력이 센 민족이었거든요. 

 


 

이렇게 견고한 성인데도 불구하고 당 태종이 요동성을 함락시켜버리니까 여기를 지키던 장수도 겁을 먹고 바로 항복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안시성의 양만춘은 요동성이 함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싸워서 당태종을 격퇴시켰죠. 그러니 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첫째, 지형지세가 좋아야 되고, 둘째, 성이 견고해야 하지만, 셋째, 무엇보다 그것을 지키는 사람이 강인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요동성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이곳에 왜 저렇게 웅장한 산성을 쌓았을까 궁금했는데,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스님의 설명이 끝나자 버스도 곧바로 백암산성의 남서쪽 입구에 멈춰섰습니다. 스님이 가장 먼저 앞장서서 성벽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스님과 청년들은 남서쪽 입구로 들어가서 남쪽 성벽을 잠시 살펴본 후 서쪽 성벽 위를 걸었습니다.  

 


▲ 서쪽 성벽 위를 걷고 있는 청년들

 

성벽 위를 앞장 서서 걷던 스님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백암산성의 이곳 저곳에 대해 설명을 계속 했습니다. 

 

“여기 보이는 이것이 ‘치’입니다. 치는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한 것이죠. 그런데 이 성의 특징은 치가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도 있습니다. 안에 치가 있는 이유는 성벽 위에서 방어할 수 있는 면적을 넓히기 위해서입니다. 여기 보세요. 성벽 안에도 치가 있잖아요. 

 


 

치와 치 사이의 거리는 평균 50~60미터입니다. 이것을 무엇을 말할까요? 화살을 적을 향해 쏠 때 정확하게 맞출 수 있는 거리가 30미터 정도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60미터의 거리를 두고 양쪽에서 공격을 하면 명중을 할 확률이 높아지죠.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치를 다 쌓았다는 것은 그만큼 성벽을 견고하게 방어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저기 보세요. 치가 계속 있잖아요. 

 

여기 있는 돌은 다 석회암이예요. 이 산 전체가 석회암 돌산이에요. 여기서 돌을 캐서 이 성을 쌓은 겁니다. 지금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7~8미터 정도입니다.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9미터였는데 최근에 1미터가 훼손된 거에요. 원래 성벽의 높이는 10미터 정도였다고 합니다. 성벽 위에 여장이 2미터 정도 되니까 총 성벽의 높이는 12미터 정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성의 또 하나의 특징은 성벽으로부터 한 5미터 밖에 나지막한 성벽을 하나 더 쌓았어요. 이것을 ‘덧성’이라고 해요. 덧성을 쌓은 이유는 장애물을 하나 더 만들어서 적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 일종의 이중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남쪽은 절벽이 조금 있어서 절벽 위를 따라서 성을 쌓았기 때문에 높이 쌓을 필요가 없었어요. 동쪽은 절벽이 높아서 성벽이 아예 필요가 없었고요. 항상 공격을 받았던 곳은 서쪽이었습니다. 서쪽 성벽은 아주 두껍고 높게 쌓았어요. 북쪽은 8부 능선에서 성벽을 쌓았기 때문에 성벽을 높게 쌓을 필요가 없었어요.” 

 

스님의 자세한 설명을 들으며 성벽 위를 걷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간간히 시원한 바람이 이마에 맺힌 땀방을도 식혀주었습니다. 

 

성벽 위만 걸으면 성벽의 웅장한 맛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스님은 중턱 부근에서 성벽을 내려갔습니다. 성벽 밖으로 나가서 웅장한 성벽을 바라보면서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자, 지금부터는 성벽의 웅장한 모습을 보기 위해 잠시 성벽을 내려가겠습니다. 역사서에는 이곳에서 549년에 전투가 벌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으니까 이 성은 최소 1500년 전에 쌓은 것이고, 길게는 2000년 전에 쌓은 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보니까 성벽이 더 웅장하죠?”

 

“네!” 

 


 

아래에서 성벽을 올려다보니 정말로 1만명의 돌궐족이 침입해도 거뜬히 막아낼 수 있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웅장한 성벽을 뒷배경으로 스님은 줄지어 오는 순서대로 10명씩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성벽 앞에 서니 정말로 고구려 병사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기념사진을 찍은 후 이번에는 북쪽 성벽 위를 걸었습니다. 북쪽 성벽이 끝나는 지점에서 아주 높은 절벽과 만났습니다. 절벽 앞으로는 태자하라는 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태자하를 가리키며 고구려의 기상을 한번 느껴보라고 하면서 청년들을 북돋워 주었습니다. 

 


▲ 동쪽 성벽으로 흐르고 있는 태자하

 

“저기 보이는 강이 태자하입니다. 어제는 비가 와서 홀본산성에서 경치 구경을 못했잖아요. 오늘은 날이 좋아서 구경을 잘 할 수 있게 된 거예요. 역사기행의 마지막날 고구려의 기상을 마음껏 느끼고 가시기 바랍니다.”

 

잠시 넋을 잃고 태자하를 바라보던 청년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기념사진을 찍은 후 백암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인 망대에 올랐습니다.  

 


▲ 망대

 

망대 위에 올라서니 사방이 탁 트여 있어서 주위가 한눈에 다 들어왔습니다. 어떤 적군이 침입해도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천연의 요새를 선택했던 선조들의 지혜에 다시 한번 감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망대에서 내려와서는 성벽 안쪽으로 난 길을 통해 입구로 내려갔습니다. 내려가는 길에는 요동벌에서 시원한 바람이 계속 불어왔는데, 스님 말씀대로 고구려의 기상과 민족의 정기가 온 몸으로 스며드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역사기행의 마지막날 선조들이 청년들에게 텔레파시로 에너지를 가득 전해주는가 봅니다. 통일 운동에 더욱 매진하라고 말입니다. 

 


 

백암산성 둘러보는 것을 끝으로 제22차 동북아 역사기행을 모두 마쳤습니다. 이제 심양공항으로 가서 비행기 타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일정만 남았습니다. 심양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스님은 마지막으로 청년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더 해주었습니다. 

 


 

“자, 따라해 보세요. 첫째, 내가 내 인생의 희망이 되어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내가 내 인생의 희망이 되어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둘째, 내가 나라의 희망이 되어 평화통일을 꼭 이루겠습니다.” 

 

“내가 나라의 희망이 되어 평화통일을 꼭 이루겠습니다.”

 

“첫째는 여러분들의 인생이 행복해야 돼요. 연애하다가 남자가 가버렸든 여자가 가버렸든 우는 것은 잠시여야 해요. 눈물 한 방울만 뚝 떨어뜨리고 ‘내가 더 좋은 남자 만나라고 네가 갔구나’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돼요. 그렇게 행복하게 살려면 수행을 해야 합니다. 

 

둘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의 일원으로서 내가 나라의 희망이 되어 우리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꼭 이루겠다는 다짐을 역사기행을 마치며 꼭 하시기 바랍니다. 통일을 이룩하려면 사회적인 실천활동을 해나가야 합니다. 특히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나에게 주어진 권리와 의무를 잘 실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번 여행이 여러분들의 삶에 작은 희망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스님의 마지막 격려 말씀 속에서 청년들에 대한 애정을 가득 느낄 수 있었습니다. 청년들은 뜨거운 박수갈채와 환호를 보내며 스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 스님을 향해 환호하는 청년들

 

오후 2시에 심양 공항에 도착한 청년들은 곧바로 출국 수속을 밟기 위해 카운터 앞에 길게 줄을 섰습니다. 스님은 줄을 서고 있는 청년들에게 다가가 차례대로 한 명 한 명 악수를 했습니다. 

 

“수고했어요.”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 청년 한 명 한 명에게 다가가 악수하는 스님

 

스님과 악수까지 하고 난 청년들은 통일에 기여하는 삶을 살겠다는 발원을 더욱 굳건히 한 모양입니다. 2시간의 비행 끝에 인천공항에 도착한 청년들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도 역사기행에서 느낀 기운을 주체하지 못하고 다시 전체가 모여서 ‘통일, 해버리자!’라고 큰 목소리로 외치며 단체사진을 찍은 후 해산했습니다. 

 

청년 역사기행단은 이후에도 다양한 후속 프로그램과 실천활동들을 계속해나갈 예정이라고 합니다. 집으로 향하던 한 청년은 “통일에 기여하는 삶을 살겠다는 다짐이 빈 말이 되지 않기 위해서 어떤 실천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할 것”이라고 포부를 말했습니다. 

 

이상으로 1차(일반팀)와 2차(청년팀)에 걸쳐 진행된 제22차 동북아 역사기행 이야기 연재를 모두 마칩니다. 동북아 역사기행은 오늘 끝나지만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법륜 스님의 하루는 내일도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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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 34

0/200

반야심

스님 감사합니다.

2016-08-26 21:40:05

한국인

역사 기행을 통해서 많은 가르침 감사합니다.

2016-08-26 13:35:57

봄선

여기에 참석한 이 청년들이 이 나라를 통일시키고, 미래를 이끄는 지도자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_()_...

2016-08-26 06:5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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