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8.2.19 정초 순회법회(2) 부산울산
“아무리 다짐하고 노력해도 변하지 않는데, 어떡하죠?”

유난히 추웠던 겨울도 물러난 듯 봄기운이 느껴지는 포근해진 날씨에 마음도 덩달아 행복해졌습니다. 정초법회가 열리는 해운대법당 입구엔 소박한 법복을 입은 봉사자들이 봄볕처럼 환한 미소로 도반들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법회가 열리는 윗층은 이른 시간인데도 많은 도반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오늘 퍼포먼스 할 노래도 미리 연습하며 웃음꽃이 법당 가득 번졌습니다.

참석한 정회원은 224명으로 법당이 가득 찼습니다. 2시가 되자 삼귀의와 반야심경으로 법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어 유수스님이 특유의 환한 미소로 모두에게 새해 덕담 같은 인사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정초법회에 많이 오셔서 감사합니다. 법륜스님께서 정회원들이 올해 어떻게 수행정진하며 봉사해야 하는지 지침을 주시기 위해 이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새로운 마음을 다지는 한 해가 되시고 더욱 정진하시길 바랍니다”

모두의 수고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부산울산지부 사무국장 소임을 맡고 있는 전은주 보살님의 인사 말씀이 있었습니다.

“설은 잘 쉬셨는지요? 며칠 동안 어떻게 지나간 줄 모르겠습니다. 오늘 참 좋습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것이 인연인 것 같습니다. 수고하신 모든 인연에 감사드리고 모두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으로 오늘 참석한 정토회별 정회원을 소개했습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동래정토회(동래, 화명, 금정), 부산울산지부의 각종 행사를 도맡아 하고 있는 해운대정토회(해운대, 기장, 대연, 정관, 반여), 최근 명지 신생법당을 탄생시킨 사하정토회(사하. 명지), 영도법당을 새로 열고 활력이 넘치는 서면정토회(서면, 영도), 멀리 있으면서 모든 행사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울산정토회(울산, 화봉, 언양, 옥교, 방어) 등 부산울산 지부에서 모두 224명이 참석했다는 사회자 멘트에 서로 격려하며 큰 박수로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이어서 부산울산지부 1년 동안의 활동을 담은 영상을 보았습니다. 1년 동안 많은 일을 해낸 부산울산지부 도반들의 모습이 참으로 자랑스러워 보였습니다. 평화집회 등 유난히 굵직한 행사가 많았던 해인지라 모두 힘들다고 했지만 얻은 것이 더 많은 한 해가 분명해 보였습니다. 머리도 끄덕이고 손뼉도 치며 1년을 돌아보는 뜻깊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대연법당 도반들의 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머리에는 리본과 토끼 머리띠를 하고 하얀 남방과 청바지, 선글라스까지 갖춘 발랄한 복장에 모두 열심히 박수를 쳤습니다. 모두가 하나 되어 손뼉을 치며 웃음소리가 법당 안에 가득 찼습니다. 이어서 까만색 옷을 입고 모자까지 쓴 대연법당 도반들의 등장은 예사롭지가 않았습니다. ‘나팔바지’라는 신나는 노래에 맞춰 아이돌처럼 춤추는 도반들 모습에 모두 정말 행복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흥겨운 시간이 끝나고 스님의 법문이 시작되었습니다. ‘복을 짓되 복을 탐착하지 마라’ 며 진정한 수행자의 자세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정회원이라면 수행자로서의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그 사이에 활동을 하고 생활을 하다 보니 잃어버렸다고 해도 일단 일체로부터 자유롭고 행복한 부처가 되고자하는 마음을 내었으니까 다시 초심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바쁜 와중에 언제 법회에 참석을 하고, 언제 봉사활동을 다 하냐고 불평을 하면 안 돼요. 원래 보살은 하는 일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가 봉사인데, 불평을 하는 사람들은 법문을 더 많이 듣고, 봉사활동도 더 하도록 해야 합니다. (대중 웃음)

원래 법문도 매일 들어야 하는데, 생활을 하면서 활동하니까 최소 일주일에 한 번 듣는 것으로 줄였고, 생활에 있어서 모든 활동이 봉사여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으니까 일주일에 최소 몇 시간만이라도 봉사를 하자고 줄인 거예요. 그러니 지금 하고 있는 활동은 발심자로서의 최소치입니다.

법회를 하는 날에는 하던 장사도 문을 닫고 법회에 참석해야 해요. 행여 손님이 많은 날이라서 문을 계속 열게 되면 그 날 들어온 돈은 다 보시를 하고요. (대중 웃음) 이렇게 수행자로서의 삶을 중심에 놓는 방식으로 관점이 탁 바뀌어야 합니다.

직장을 구할 때에도 수행자로서의 수련과 봉사활동이 허용되는 곳은 선택하고, 아무리 좋은 자리라도 그런 활동이 허락되지 않아서 수행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없다면 가지 않는, 이렇게 수행자로서의 관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결혼을 선택할 때도 수행자로서의 삶에 지장이 없을 때 선택을 하는 식으로 관점이 잡혀야 해요.

여기 있는 분들 모두 세속 생활을 오랫동안 해보셨잖아요? 아예 안 해본 사람이라면 미련이 남는 게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데, 직장도 다녀보고 결혼도 해보고 아이도 낳아보고 다 해봤는데도 미련이 남은 걸 보면 그게 그렇게도 좋은가 봐요. (대중 웃음)

그런 생활을 아예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 가지고는, 우리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길만 가지고는 자유롭고 행복한 길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불법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는 길이고, 거기에 대한 뚜렷한 관점이 잡히면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그 외의 것은 인연따라 성사되면 성사되는 대로 가고, 그렇지 않으면 그뿐이에요. 이렇게 관점이 제대로 잡히면 무릎 아프게 하루에 300배, 500배씩 절하지 않고 매일 기본적인 수행만 해도 이 세상을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건 애쓴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무엇보다 관점을 바로 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보면 관점은 잘 잡지 않은채 애만 많이 써요. 그러면 머리에 열만 납니다. ‘나는 수행자다’라는 관점이 탁 잡히면 그 뒤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아셨지요?”

“네!”

“이렇게 관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여기 그래도 문제가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몇 분 계시다고 하니까 이제 그분들 이야기를 들어볼 거예요. (대중 웃음) 연초를 맞아서 ‘내가 수행자’라는 관점이 무슨 뜻인지 잘 아셨지요? 자, 그럼 다 같이 따라해 봅니다.”

“나는 수행자입니다.”
(대중 합창) “나는 수행자입니다.”

“나는 법을 전하는 수행자입니다.”
(대중 합창) “나는 법을 전하는 수행자입니다.”

정회원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과 우리가 어떻게 관점을 잡고 나아가야 하는지 잘 알려주셨습니다. 여동생 문제로 고민을 털어놓은 보살님과 앞사람의 질문에 답을 찾아서 스님께 물을 게 없어졌다는 보살님. 그리고 새터민 사업에 대한 고민을 말씀하신 보살님, 집전 봉사의 어려움을 털어놓은 보살님까지 스님의 명쾌한 말씀에 모두 답을 찾은 모습이었습니다.

즉문즉설이 끝나고 스님께 세배 드린 후, 사회를 맡은 김수진 보살님의 선창으로 이 자리에 참석한 활동가가 모두 ‘우리의 소원’을 율동과 함께 불렀습니다. 하나 된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는 통일 한국이 반드시 올 듯했고, 간주가 나오자 “유수스님 감사해요. 법륜스님 감사해요!”라며 224명이 큰 목소리로 감사한 마음을 전했습니다. 짧았지만 감동의 순간이었습니다.

그중에서 정관법당에서 오셨다는 김인아 보살님은 “수행적 관점을 바로잡고 나를 바르게 세우는 연습을 하겠습니다. 수행은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지혜의 문제임을 알았습니다. 오늘 스님의 법문은 또한번 나를 일으켜 세우는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라고 소감을 말해주었습니다.

울산법당에서 오신 정희진 보살님은 “새해에 존경하는 스님을 모시고 법문 듣고 세배 드리니 설렜습니다. 정회원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았습니다. 그리고 수행자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겠습니다.”라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끝으로 정토회별로 사진 촬영을 하고 스님은 모든 참석자와 악수를 했습니다.

미래를 준비하는 한국사회의 모델이 되어주기 바란다는 스님의 마무리 말씀대로, 오늘 법회에 참석한 모든 정회원의 가슴에 수행자로서의 관점이 분명히 세워졌으리라 믿습니다.

이어서 저녁 7시30분부터는 저녁부 정초 정회원 법회가 시작했습니다. 고조된 분위기에서 조명이 꺼지며 지난 부산울산지부의 1년을 돌아보는 영상이 시작되었습니다. 다양한 활동사진들이 잔잔한 배경음악과 함께 흘러갔습니다. 영상 중간에 ‘여러분 모두가 이 영상의 주인공입니다’며 ‘우리 모두를 위해 박수 한번 칠까요?’라는 메시지가 나오자 대중들의 2017년 한해를 돌아보며 뜨거워진 마음이 큰 박수로 터져 나왔습니다.

신나던 축하공연 순서도 끝이 나고 진중하고 장엄한 분위기 속에 스님의 법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총 8명이 질문하였습니다. 나누기를 하면 나의 부족한 점이 타인에게 노출되고 내가 못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분, 대학도 졸업하고 나이도 많이 먹은 아들이 군대를 안 가서 힘들다는 분, 무아라고 할 때의 나라고 하는 의미에 대해서 한번 되짚어 달라는 분, 그렇게 독립운동 열심히 해놓고 정작 해방되니 남으로 북으로 갈라져서 남북 서로가 원수처럼 된 이 상황이 안타깝다는 분, 아들의 진로가 걱정되어 기도문을 달라는 분, 담당 소임을 하다 보니 법당책임자와 학생 사이를 조율해야 하는 상황에 자주 마주하게 되는데 어떻게 본인 관점을 잡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분, 부처님 살아계시던 당시에는 수많은 대중 앞에 마이크도 없이 어떻게 설법을 하셨으며 불사와 관련된 질문을 하신 분도 있었습니다.

이 중 2년 간의 수행, 보시, 봉사에도 본인은 정작 바뀐 것 없어 수행 방법에 의심이 든다는 분의 질문을 소개합니다.

“지난 2년 동안 스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아침에도 늘 새벽 3시 50분에 싹 일어났습니다. 항상 그 시간에 일어나서 법당에 나가서 기도를 하고, 법당에서도 뭐든지 시키면 ‘예’하고 해왔습니다. 합창단도 하고, 경전반에서 춤출 때도 중심된 역할을 했습니다. 나름 수행, 보시, 봉사 모두 열심히 해왔는데도 저를 돌이켜보면 2년 전과 크게 달라진 점이 없는 것 같습니다. (대중 웃음)

스님께서 100일 기도를 하면 자기 자신의 모습을 알 수 있고, 3년 기도를 하면 자기 변화가 일어난다고 하셨는데, 저는 2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제 자신이 잘 안 보입니다. 제가 부족해서 그런 것인지, 생각이나 수행하는 방법이 잘못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혹시라도 불교대학 프로그램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대중 웃음)

직장을 다니는 제 모습도 그대로이고, 아내와 다투는 모습도 그대로이고, 아이들과 지내는 모습도 그대로입니다. 제가 너무 더디게 가는 것 같아서 개선책이나 다른 방법이 있는지, 제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네, 별 문제없어요. 지금까지 해오신대로 앞으로도 꾸준히 해나가시면 돼요.”

“그런데 100일이 훨씬 지났는데도 제 자신이 안 보입니다.”

“왜 괴로운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자기 자신을 가만히 살펴보세요. 질문자는 믿음도 있고 한 번 하기로 한 건 해내는 힘은 있지만, 급한 성격이 있고 살피는 힘이나 돌이키는 힘은 부족한 것 같아요.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를 살피는 것, 즉 ‘알아차림’입니다. 수행이라는 것이 결국 알아차림에서 시작됩니다.

기도를 하면서 자기를 가만히 살펴보는 과정을 반복하다보면 집에서 문득 화가 날 때도 예전 같으면 그냥 화만 내고 말았을 것을 이제 ‘어, 그런데 내가 화를 왜 내지?’하고 생각해보고, ‘아, 내가 이럴 때 화를 내는구나, 화를 자주 내는구나, 아내의 이야기를 등한시하며 듣는구나’하고 알게 됩니다. 질문자는 이런 생각이나 알아차림이 전혀 없나요?”

“이야기를 들으니 조금은 있는 것 같습니다. 100% 알아차리는 것은 아니고, 조금 알아차립니다.”

“그래요. 조금 알아차리더라도 알아차림이 있는 거예요. 그리고 지금도 알아차림이 크지 않다고 해서 자기 자신을 문제 삼으라는 것이 아니라 ‘아, 나에게 이런 알아차리는 면이 많지 않구나’하고 자신에 대해 자각하는 거예요.

다른 예로, ‘내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을 쓰고 걸려하는구나, 누군가 이런 유혹을 하면 거기에 내가 자주 넘어가는구나, 누가 돈 버는 이야기를 하면 내가 솔깃해하는구나’ 이렇게 자기를 안다는 것은 결국 자기 업식(業識)을 안다는 의미입니다. 즉, ‘자기를 안다’고 할 때의 ‘자기’는 다름 아닌 ‘자기의 까르마’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알아차리는 연습을 하면 자기의 까르마가 외부 경계에 따라서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알 수 있는 거예요.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는 이걸 ‘성격’이라고 볼 수도 있겠죠. 그렇게 자기의 까르마의 반응을 보고 알아가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 반응을 보고 ‘어떤 반응을 좋고 어떤 반응은 나쁘다’고 따질 필요는 없어요. 그저 그렇게 반응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아, 내 까르마가 이렇게 형성되었고, 이렇게 반응하는구나’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 어떤 반응들은 나에게 손해를 끼칩니다. 내가 버럭하고 화를 자주 내면 주변에서 비난을 받거나 사람들이 싫어하게 돼요. 그 피해가 견딜만하면 그냥 ‘미안합니다’ 사과를 하고 견디는 방법도 있고, 피해가 심각해서 ‘내 업에 끌려가서 이런 피해를 계속 보는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 그 반응을 더 면밀하게 살펴서 더 이상 그렇게 반응하지 않는 길을 찾는 방법도 있어요. 화를 참는 게 아니라 나에게 오는 손해가 크다는 것을 알고 조금씩 화를 내는 횟수로 줄이고, 그 강도도 줄이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아, 내가 이렇게 반응하는구나, 내 까르마가 이렇게 반응하는구나’ 아는 것을 자기 자신을 안다고 하고, 그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행동을 달리하는 것이 곧 자기를 변화시키는 거예요. 그러다보면 주변에서 ‘절에 다니더니 조급함이 많이 줄었네, 성질이 많이 줄었어, 요즘 내 말을 전보다 귀담아 들어주는 것 같아’ 등의 반응이 나타나요. 이런 것이 곧 자기 변화예요.

지금 질문자는 3시 50분에 일어나기로 했으면 그때 일어나고, 이건 아주 좋은 성질이에요. 그런데 그건 질문자가 가진 성질이지 그렇게 하는 것이 수행은 아닙니다. 수행에는 알아차림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알아차림을 통해서 자기에게 손실이 되는 행동을 막아내는 까르마의 변화가 일어나야 해요.

그렇다고 시작부터 180도 확 바뀌는 것을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변화는 처한 상황이 너무 견딜 수가 없을 때 일어납니다. 그래서 엄청난 고난에 처했을 때 사람이 확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어요. 반면 큰 문제가 없는 사람들은 확 바뀌지 않아요. 안 바뀌어도 큰 문제가 없는 사람은 바뀌더라도 천천히 바뀝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바뀌어야 될 필요성을 무의식에서 덜 느끼기 때문이에요.

『관무량수경』에 등장하는 위제희 부인도 착한 사람이다보니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면 뭐든지 좋아했어요. 어릴 때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서 결혼도 큰 왕국의 왕이 될 사람과 결혼을 했고 나아가 아들까지도 그 왕국의 왕이 될 세자였으니 속세의 복으로 따지면 정말 많은 복을 타고난 사람이었어요. 그러다보니 평소 부처님의 말씀은 늘 훌륭하고 좋다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 또한 훌륭한 수행자라고 착각했습니다. 수행자라기보다는 그저 믿고 따르는 착한 신도였지요.

그러다가 어느 날 아들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아버지를 가두고 왕좌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남편이 이기면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죽음에 처하고, 아들이 이기면 되려 남편이 죽음에 처하는 싸움이 시작된 거예요. 결국 아들이 이겨서 남편이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되는데, 그런 남편을 살리려고 보살피는 노력을 하다가 역적으로 몰려서 결국 자기 자신도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됩니다.

이건 아주 높은 위치에 있는 여인이 아니라면 또 겪지 않을 불행이에요. 그러니 가만 보면 어느 순간에는 이 세상 누구보다 복이 많은 것처럼 보였던 위제희 부인이 동시에 그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이 세상 그 누구도 겪지 않을 불행한 상황에 처하게 된 거예요. 남편이 바로 자기 아들의 손에 죽게 되었으니까요. 게다가 그걸 말리다가 자신까지도 역적으로 몰려서 곤궁에 처하게 되었으니 엎친 데 덮친 격이죠.

그렇게 위제희 부인 자신도 갇히게 되었는데 그때가 되어서야 ‘이 세상의 복이라는 것이 뜬구름과 같고, 복이 곧 재앙이구나’하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선 부처님께 법을 청하게 됩니다. 그 전에도 부처님의 법을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은 그저 착한 신도로서 법을 접한 것이었고, 감옥에 갇혀서는 진심으로 법에 대해 묻게 된 거예요. 그리고 위제희 부인의 그 질문에 답을 한 것이 바로 『관무량수경』입니다.

깨닫기 위해서 꼭 재앙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위제희 부인의 예에서처럼 인연이 도래하는 대로 법을 접하고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질문자도 지금처럼 좋은 결심을 가지고 앞으로도 꾸준히 살아가면 돼요. 거기다가 앞으로는 조금씩 살피는 일까지 같이 해나가면 됩니다.

질문자처럼 큰 문제가 없는 사람은 살피는 힘이 약하기 마련이에요.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큰 문제가 없으니 무의식에서 살펴야 될 필요성을 크게 못 느낍니다. 그렇지만 그런 와중에도 조금씩 알아차리면 필요한 부분에서 변화를 줄 수 있어요.

무난하지만 그래도 아내한테 물어보면 질문자에게 문제나 개선할 점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습니다.”

“아들한테 물어보면 또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습니다.”

“회사에서도 동료나 선후배에게 물어보면 뭔가 있겠지요?”

“네.”

“그게 무엇인지 자기 자신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자기 자신을 살피다보면 ‘아, 이런 부분은 아내가 조금 힘들겠구나, 이런 부분은 아이들이 조금 힘들겠구나, 이런 부분은 직장 동료나 선후배들이 조금 힘들겠구나’ 이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문제가 그리 심각하지 않고 ‘남들도 그 정도는 다 있어’ 할 정도면 지금 그대로 살아가면 되는데, 그런 문제가 상대방으로부터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나에게 손실로 다가올 위험이 있습니다.

지금은 몰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비난으로 돌아올 수도 있고, 나중에 나이 들어서 외로워질 수도 있어요. 아내의 경우에는 평소에는 별 문제가 안 되다가 그런 게 누적되어 한계에 부딪치면 어느 날 보따리를 싸서 떠나거나, 나이 들어서 이혼을 요구하게 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어요. 아내가 당장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괜찮았다가 나빴다가 괜찮았다가 나빴다가를 반복하다보면 사람마다 임계점이 있는데, 그 임계점을 넘어버리면 그때 가서는 아무리 빌어도 해결이 잘 안 됩니다.

내 입장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내린 결정 같아 보이고 황당해보일지 모르지만 그게 다 속에서 쌓인 거예요. 이건 남편들도 마찬가지예요. 남편이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이랑은 더 못 살겠어’하고 나가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데 정작 아내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릅니다. 이런 경우는 대개 참고 참다가 임계점을 넘어가는 경우라고 볼 수 있어요. 이걸 해결하려면 임계점을 넘기 전에 알아차리고, 평소에 자신을 잘 살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대개 자신을 살피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재앙이 닥치는 것처럼 느낍니다. 평소 생각지도 못한 일이 갑자기 일어나는 거예요.

질문자도 자기에 대해서 알기 시작하면 미래에 다가올 과보를 미리 예측할 수 있습니다. 어떤 비난이나 재앙이 올 때도 이미 감을 어느 정도 잡고 있기 때문에 놀라지 않습니다. 길을 가다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죽는 것이야 사고니까 알 수가 없지만, 내 성질로 인한 것은 인연과보로 일어나기 때문에 조금만 지혜가 있으면 얼마든지 예측이 가능합니다. 그럴 때 자신을 아는 사람은 억울하고 분하지 않습니다. 마치 돈을 빌렸는데 ‘돈 받으러 왜 안 오지?’ 하다가 어느 날 찾아오면 ‘아, 역시 찾아오는구나’하고 알듯이, 내 성격으로 인한 것도 마찬가지예요.

지금도 질문자에게 살피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처럼 열심히 하면서 조금 더 살펴보세요.”

”네, 잘 살펴보겠습니다.” (대중 박수)

스님의 명쾌한 답변을 듣고 질문자의 표정도 의심 없이 밝아졌습니다. 법문 중 잠시 등장한 관무량수경의 위제희 부인이 부처님의 담마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얼굴이 환해지는 듯했습니다. 의문이 해소되어 기쁨에 찬 질문자는 우렁찬 큰 목소리로 감사를 표하였고 대중들도 큰 공감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모든 분들의 질문마다 대중들의 웃음과 깨달음의 호응이 연발되었고 점점 표정들은 밝아져 갔습니다. 저녁 10시 30분이 돼서야 대중의 질문과 스님의 답은 끝이 났습니다. 이미 스님의 예정된 법문 시간이 훌쩍 넘었음에도 스님도 대중들도 지친 기색 없이 집중했던 시간이었습니다.

법문이 끝나고 부산울산지부에서 준비한 영상이 나왔습니다. 부산울산지부 모든 법당의 정회원들이 ‘스승의 은혜’를 3절까지 한 소절씩 부르며 스님께 인사하는 영상이었습니다. 대중들은 자신들의 법당이 나오거나 아는 도반이 나올 때면 반가운 마음에 박수와 환호를 보내며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습니다. 영상의 끝에 스님이 등장하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화답하시는 부분에서는 대중들은 빵하고 웃음이 터졌습니다.

영상이 끝난 후, 모두가 ‘스승의 은혜’를 부르며 법륜스님과 유수스님께 각 법당의 책임팀장들이 꽃을 드리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모두가 하나 되어 진정으로 감사한 마음을 담아 부르는 ‘스승의 은혜’였기에 깊은 감동과 큰 울림이 모든 대중에게 전해졌는지 눈시울이 붉어진 대중들도 보였습니다.

이어 스님께 선 채로 새해 인사 삼배를 드리고 정근과 희사와 사홍서원으로 공식행사를 마쳤습니다. 마치고 나서는 해운대, 동래, 서면, 사하, 울산정토회 순으로 스님과 기념촬영을 하고 거리가 멀어 빨리 가야 하는 울산정토회부터 한 분 한 분 법륜스님, 유수스님과 악수를 하며 마무리하였습니다.

법회가 끝나고 참석한 정회원들 몇 분께 소감을 여쭈어봤습니다. 울산법당의 오민곤 님은 “나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나에 대한 집착을 놓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법문을 들으며 기도하면서 항상 저를 살피는 힘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하였고, 스님의 법문으로 가슴 어딘가 막혔던 부분이 확 뚫리는 시원한 느낌을 받았습니다.”라고 소감을 말해주었고, 서면법당 주영진 님은 “속세의 세태를 탓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혜롭게 헤아려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수행이다는 것을 법문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앞으로도 살아가면서 계속 수행정진 해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라고 깨달은 바를 나눠주었습니다.

동래법당 김암우 님은 “수행자는 복을 짓되 집착하지 않고 무주상보시를 실천해야 한다는 말씀을 다시 되새기는 계기가 되어 참 좋았고 ‘세속에 몸을 담고 있되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 수행자’라는 수행자로서의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는 말씀이 좋았습니다. 최근 정회원으로서 약간 해이한 부분이 있었는데 수행자로서 부끄럽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라고 말씀해주었습니다.

사하법당 윤수정 님은 “스님께서 즉문즉설 하실 때 한 분 한 분에 대한 질문을 정성스럽게 답해주셨던 것이 인상 깊었고, 마지막 스승의 은혜를 한 구절씩 법당별로 나눠 부른 영상이 감동적이었습니다. 정회원에게만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명확하게 짚어주셔서 정회원으로써 왜 제가 여기에 있는지 다시 한번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라고 소감을 말해주었습니다.

해운대법당 정연호 님은 “정회원 정지자가 늘어나고 있는 현시점에서 수행자로서의 자세를 돌아보게 해주시는 법문이었던 같습니다. 정토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이 새삼 자랑스럽게 느껴지며 스승님과 함께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합니다.”라며 감격하셨습니다.

오늘 행사의 시종일관 끊이지 않았던 것은 바로 대중들의 환한 웃음과 밝은 표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1년을 돌아보는 영상에서 나왔던 문구처럼, 정토회가 또 이렇게 한 해를 잘 보내며 앞으로도 잘 유지되고 많은 사람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저 환한 웃음과 밝은 표정의 정토행자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임을 다시금 느꼈습니다. 그들 모두가 정토회의 주인공임을 다시 한 번 자각하게 되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 삶을 바꾸는 공부
http://edu.jungto.org

함께 만든 이
최인정, 노희동, 이태기, 박용석

전체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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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자

감사합니다

2018-04-02 21:55:19

정지나

지금 인연에 오락가락하며 시시비비를 논하며 걱정근심에
있는 나를 다시 살피고 헤아려봅니다. 감사합니다. 용기있게 질문해주신 도반님과
집중을 다해 법을 설해주신 스승님^^

2018-02-23 10:07:36

오늘맑음

스님 법문을 읽으니 마음 한부분이 녹아내리는 느낌이 들면서 눈물이 납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스님, 고맙습니다 _()_

2018-02-23 09: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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