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3.7 BBS불교방송 ‘무명을 밝히고’ 촬영
“100년 전 용성스님의 행적이 오늘날에도 빛나는 이유는”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BBS불교방송 ‘무명을 밝히고’ 라디오 프로그램과 용성조사의 독립운동에 대해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새벽에 문경을 출발하여 서울에 도착한 스님은 아침 7시부터 평화재단에서 기획위원들과 오전 내내 회의를 했습니다.

11시부터는 BBS불교방송 ‘최윤희의 무명을 밝히고’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 측이 도착하여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뒤, 방송 녹음을 시작했습니다. 주제는 ‘독립운동가 백용성 스님’이었습니다.

“3.1 만세운동을 비롯해서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가장 대표적인 스님으로 우리는 만해 한용운 스님과 백용성 스님을 기억합니다. 만해 스님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그래도 많이 알려져 있지만 백용성 스님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은 게 사실이지요. 그래서 오늘은 독립운동가로서 백용성 스님의 행적을 자세하게 살펴보는 시간으로 준비했습니다.

오늘 대담은, 사단법인 백용성조사 기념사업회 이사장이자 정토회 지도법사 법륜스님과 함께 하겠습니다. 스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네, 반갑습니다. 방송 들으시는 분들이 많이 반가워하실 것 같습니다. 법륜스님께서는 올해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용성스님의 독립운동 관련 행적에 대해 그동안 우리가 잘 몰랐거나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여러 사실들을 새롭게 제기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용성스님의 행적을 연구하시게 된 게 언제부터였는지 먼저 여쭙고 싶습니다.”

“용성조사님의 알려지지 않은 행적을 가장 많이 아시는 분이 저의 은사스님이신 불심도문 큰스님이십니다.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절에 들어왔으니까 은사스님으로부터 용성조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올해로 50년째 듣고 있어요. 큰스님의 뜻을 기려 용성조사님의 행적을 밝혀야 하는데 저도 제 할 일이 바빠서 제대로 못했습니다. 그러다 이번에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서 큰스님께서 늘 말씀해오시던 내용에 객관적인 증거 자료들을 보완해서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족한 것은 앞으로 학자들이 연구할 수 있도록 이러이러한 것들을 보완해야 한다고 과제를 던졌습니다.”

아나운서는 먼저 3.1 운동을 적극적으로 이끌었던 용성조사님의 행적에서부터 독립운동가로서 다양한 활동에 대해 질문하였는데요. 오늘은 그동안 스님의 하루에는 실리지 않았던 용성조사님의 항일 불교운동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3.1 운동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 말씀 나눠보겠습니다. 용성스님께서는 당시 종로에 대각사를 세워서 대중포교를 활발하게 하셨지요? 3.1 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서 다시 대각사로 돌아가셨나요?”

“용성조사님께서 감옥에서 나오자 바로 대각사로 가자고 하셨는데, 마중 나온 제자들이 대각사가 아닌 어느 신도 집으로 스님을 모셨어요.

‘왜 신도 집으로 가느냐?’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도착해서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용성조사님이 감옥에 가신 뒤에 일제가 대각사에 있던 제자 스님들과 신도들에게 압력을 넣어서 절을 팔도록 한 거예요. 그리고 제자 스님들 일부가 절을 판 돈을 나눠 갖고서는 흩어져 버렸습니다. 절이 없어져버린 거예요. 그 소식을 들은 순정효황후와 상궁들이 돈을 모아서 원래 대각사가 있었던 자리(봉익동 1번지) 옆인 봉익동 3번지에 새로 민가를 사고 고쳐서 다시 대각사를 열었어요.

그 후 용성스님께서는 한글 경전 번역 작업을 시작하셨어요. 3.1 운동으로 감옥 안에 있으면서 보니까 기독교는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데도 모두 한글로 된 성경을 읽고 우리말로 된 찬송가를 부르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용성조사님은 ‘부처님의 좋은 가르침이 한문이라는 감옥에 갇혀서 대중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라고 생각하셨어요. 그래서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하셔서 한문으로 된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셨습니다. 물론 훈민정음 창제 이후 세종대왕 당시에 일부 번역한 게 있지만, 근대에 들어와서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은 용성조사님이 처음이셨습니다.

그리고 도심에 포교당을 처음 여신 분입니다. 그 당시 대부분의 불교 신자들은 부녀자들이었고, 주로 복을 비는 기복적인 신자였는데, 부녀 선원을 개설해서 재가자도 수행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여셨습니다. 또 일요 불교학교를 열어서 어린아이들에게 불교를 공부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풍금을 하나 사서 본인이 직접 연주해가면서 가르치셨어요. 그래서 용성조사님이 쓰신 찬불가도 여러 곡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근대 불교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활동을 하셨어요.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활동이었습니다.”

“오늘날 불교 포교에 있어서 대중화라고 할 수 있는 여러 분야의 기본 모델이군요. 이때 용성스님께서 다 전형을 제시하셨네요.”

“네. 우리말로 바꾼 것은 물론이고 의식도 굉장히 간소하게 만드셨어요. 용성스님께서 100년 전에 이미 그걸 제시하셨지만 지금도 우리가 그걸 못 따라가는 수준이에요.”

“과연 그렇습니다. 여유 있는 시대도 아니었고 민족의 암흑기였던 시대에 일제의 협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으시고 그런 활동을 하셨네요. 끝까지 용성스님을 보필하면서 당시 이런 활동들과 독립운동을 보좌하셨던 또 다른 스님들도 계셨나요?”

“네, 그렇죠.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워낙 강해서 그러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용성스님과 가까이 있으면 다 피해를 입으니까요. 제자들 중에도 수행 측면에서는 스님을 존중하지만 스님이 하시는 독립운동은 찬성을 안 하는 제자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런 분들은 다 곁을 떠나게 됐죠.

그리고 일제는 한국 불교를 일본화하기 위해서 스님들에게 결혼을 허용하는 정도가 아니라 강요하다시피 했고, 술 마시고 고기 먹고 가족을 거느리는 것을 조장했습니다. 본사 주지는 결혼한 스님들만 자격을 주었어요. 이런 식으로 한국 불교는 빠른 속도로 일본화 되었습니다.

용성조사님은 이에 반대해서 1926년에 조선총독부에 승려가 결혼하는 것, 가족을 거느리는 것, 술과 고기를 먹어서 계율을 파하는 것을 금지해달라는 요청서인 건백서( 建白書)를 제출했습니다. 총독부에서 안 받아주니까 ‘본사 몇 개라도 수행하는 승려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해달라’라고 2차 건백서를 제안했지만 그것도 안 받아들여졌어요.

그래서 ‘이건 불교가 아니다’라고 생각하시고 바른 불교를 새롭게 제시하셨어요. 불(佛), 즉 붓다는 깨달으신 분이잖아요. 크게 깨달은 분이 붓다니까 그걸 한문으로 바꾸면 ‘대각(大覺)’이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불교의 다른 이름으로 ‘대각교(大覺敎)’를 창시하셨습니다. 이게 잘못하면 신흥종교를 만들었다고 오해받을 수 있는데, 사실은 그런 게 아닙니다. 불교가 이미 불교 아닌 모습이 됐기 때문에 ‘불교’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하면 불교의 참모습에 대해 오해를 받으니까 바른 불교를 ‘대각교’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이름 붙인 겁니다. 그런 후 더욱더 전법에 매진하신 거예요.

용성조사님은 대각교 활동을 하면서 신자들에게 독립운동 정신을 고취시키고, 또 한편으로는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보이지 않게 계속 지원했습니다. 결국 1936년, 조선총독부는 대각교를 유사종교라는 혐의를 씌웠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사이비 종교라는 혐의를 씌워 해산을 시키고, 1938년에는 재산을 완전히 몰수해버렸어요. 이렇게 해서 대각교는 완전히 없어져 버렸습니다.

용성조사님께서는 이렇게 어려웠던 시기에도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불교를 대중화하고, 바른 불교를 전파하는 활동을 하셨어요. 용성조사님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20여 년 동안 3만 명에게 삼귀의계(三歸依戒)를 주셨습니다. 조선시대 때는 삼귀의계를 주는 전통이 없어져버렸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복원해서 말입니다.”

“네, 조선시대에는 할 수 없었으니까요.”

“네. 그런데 다시 삼귀의계를 부활시켜서 계를 주셨어요. 재가자도 불교 수행자가 되는 길을 열어주신 겁니다.”

“불교에 귀의할 수 있도록 해주셨네요. 용성스님께서 대각교를 창시하신 것은 요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발상의 전환이었는데, 그것이 한편으로는 오해도 받았었군요.”

“오해라는 게 딴 게 아니고 일본 제국주의가 유사종교 혐의를 씌워서 없앤 거죠. 결국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탄압받았다는 것은 오히려 바른 불교를 하셨다는 증거입니다. 그 당시엔 일본 제국주의에 순응해서 시키는 대로 한 것이 사실은 잘못된 불교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네. 그 당시 친일 불교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용성스님께서 나서셨는데 그밖에 또 어떤 노력들을 기울이셨나요?”

“1912년에 만해 한용운 스님 등이 일본 불교화에 반대해서 임제종(臨濟宗)의 전통을 잇는 운동을 하셨습니다. 그때 용성조사님이 개교 사장(開敎師長)으로 취임하셔서 첫 설법자로 활동하셨어요.

그 이후에는 주로 대각교를 중심으로 항일 불교 운동을 하셨습니다.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살던 북간도, 지금의 만주에 대각 교당을 세워서 그 지역의 유랑하는 사람들에게 전법을 했어요. 또 선농당(禪農堂)이라고 하는 대단위 농장을 만들어서 ‘일하면서 참선하고, 참선하면서 일한다’는 선농일치(禪農一致)를 주창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함양의 백운산에 화과원을 건립하셔서 스님들이 과수 농사를 지으면서 공부하도록 하셨습니다. 보시만 받아서 생활하는 게 아니라 자기 먹을 걸 자기가 생산하면서 참선하고 공부하도록 했어요. 이런 생산 불교를 주창하셨습니다. 또 거기서 모인 돈들을 몰래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내셨어요. 불교를 새롭게 하는 운동뿐만 아니라 당시 민족의 과제였던 나라의 독립을 위한 일을 함께 하셨습니다.”

“네, 지혜와 자비를 구족 하셨군요. 한쪽으로는 대중 포교와 교화에 매진하시면서 또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활동하셨던 용성스님이셨습니다. 안타깝게도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대각사와 화과원 등은 모두 일제에 의해서 침탈당하고 궤멸되기까지 했습니다. 이를 지켜보는 스님의 마음은 얼마나 절망스러우셨을까요?”

“용성 조사님께서는 만주의 독립운동 근거지인 선농당이 일본 밀정에 의해서 완전히 궤멸당하자 ‘사자 뱃속에서 생긴 충(蟲)이 사자를 쓰러지게 하는구나’라고 탄식하셨어요. 일본 제국주의가 아닌 같은 민족 내에서 제자가 스승을 배신하고, 동지가 동지를 배신하는 것을 비유하신 말씀이었죠. 그렇게 우리 민족이 사분오열되고 결국은 나라의 독립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걸 보시고 이런 유훈을 남기셨어요.

‘국론이 사분오열되지 않도록 하라.’
‘강대국의 종속국이 되지 말고 주인 된 나라가 되도록 해라.’

국론이 사분오열되지 않도록 하는 ‘국민통합’과 주인 된 나라가 되도록 하라는 ‘자주독립’을 강조하신 겁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이런 자주독립의 정신을 계승하는 길은 평화적 통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국론이 분열되어 있잖아요. 우리가 지금 평화 통일로 나아가고는 있지만, 국민 여론은 아직 사분오열되어 있어요. 평화 통일로 가는 속도를 조금 늦추는 한이 있더라도 국민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용성 스님이 뿌리셨던 씨앗을 꽃피우고 열매 맺게 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해주신 여러 구술과 증언들은 우리 불교계의 독립운동사 복원에 중요한 단초가 되겠다는 확신이 듭니다. 앞으로 이런 구술과 증언들을 역사적 사실로 확증하려면 더욱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요?”

“네. 이제 전문 학자들이 연구해서 보완을 해주셔야죠. 우리가 이런 구술조차 없으면 어떤 사실들이 있었는지를 아예 모르니까 연구할 수조차 없지만, 이렇게 아주 생생한 구술이 있으니까 그걸 출발점으로 삼아주시면 좋겠습니다. 또한 구술이 역사가 되기 위해서는 증거를 보완해야 합니다. 증거 자료를 찾고 보완해서 묻혀버렸거나 잊힌 역사를 다시 드러내고 회복하는 게 우리 후손들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녹음한 방송은 3월 8일 금요일 오후 5시 10분 BBS 라디오에서 방영될 예정입니다. 다시 듣기 서비스는 일주일 뒤 BBS 홈페이지에서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내일 스님은 도문 큰스님을 찾아뵙고, 지난 2월 한 달 동안 진행한 3.1 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큰스님의 조언도 들을 예정입니다. 내일도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전체댓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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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데오

"선농당(禪農堂)이라고 하는 대단위 농장을 만들어서 ‘일하면서 참선하고, 참선하면서 일한다’는 선농일치(禪農一致)를 주창하기도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2020-03-28 16:50:24

김지현

조선글 화엄경 책 사진에서 많은 이들에게 불법을 전하고자 했던 용성스님의 자비심이 느껴집니다.

2019-03-10 20:42:50

송미해

고맙습니다.

2019-03-10 10:5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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