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6.8. 통일역사기행
“원한에 사로잡힐 때가 아닙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전국 각지에서 모인 신규 통일의병 600여 명과 함께 무열왕릉, 황룡사지, 사천왕사지, 선덕여왕릉 등 경주 일대를 순례한 후 동국대학교에서 제8차 통일의병대회를 함께 했습니다.

이른 아침 무열왕릉에는 전국에서 전날 밤 혹은 오늘 새벽 1시 또는 2시에 출발한 통일의병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습니다.

7시 30분, 대중이 모두 무열왕릉에 도착하자 삼귀의, 반야심경과 함께 제8차 통일의병대회가 시작됐습니다. 스님은 반갑게 인사를 하고 왜 경주에서 통일의병대회를 하는지 알려주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통일의병이 되기 위해서 마지막 관문인 통일의병대회에 참가하였습니다. 아직 통일의병이 된 게 아니에요.(모두 웃음)

우리는 오늘 경주에 경치가 좋아서 놀러 온 게 아닙니다. 역사기행은 백제땅에 가서도 할 수 있고, 고구려 땅에 가서도 할 수 있지만, 우리가 지금 교훈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은 ‘통일의 시너지 효과’입니다. 통일이 단순히 1+1=2와 같은 산술적 증가가 아니라 기하급수적인 국력의 신장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아무도 우리 역사 속에서 그런 사례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자꾸 남의 나라만 쳐다봤죠. 그런데 이 곳 경주에서 그런 사례가 있었습니다.”

비가 그친 하늘은 더욱 맑았고, 무열왕릉을 에워싼 나무도 더욱 푸르렀습니다. 햇살에 피로를 녹이며 대중은 스님의 이야기에 빠져들었습니다.

무열왕릉, 신라 성장의 비밀

김춘추라는 이름으로 더욱 유명한 무열왕은 신라가 삼국 통일하는데 기반을 다진 왕입니다. 스님은 한반도 동남쪽에 치우친 작은 부족 국가에 불과했던 신라가 어떻게 비약적인 성장을 할 수 있었는지 그 원인에 대해 강조했습니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쪽에 치우쳐 외래 문물과 교류가 없었던 폐쇄된 작은 국가였는데, 법흥왕에 이르러 비약적인 성장을 하기 시작합니다. 법흥왕 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을까요?

신라가 비약적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

법흥왕 때 두 가지 정책을 시행합니다. 하나는 내부를 혁신하는 개혁 정책이고, 다른 하나는 외래 문명을 받아들이는 개방 정책입니다.

개혁 정책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율령 반포입니다. 그동안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해오다가 처음으로 행정 체계를 마련하고 법을 제정한 것입니다. 고구려나 백제는 벌써 몇 백 년 전에 한 일인데 신라는 그만큼 늦었습니다.

개방 정책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불교의 공인입니다. 고구려와 백제, 가야는 불교가 들어오자마자 바로 수용을 했는데, 신라는 불교를 철저하게 금지시켰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에 비유하면 국가보안법 같은 것을 정해서 공산주의를 반대하듯이 불교를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법흥왕 때 와서 처음으로 불교를 공인한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외래 사상을 처음으로 받아들인 거죠.

이렇게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함으로써 신라는 발전의 본 궤도에 올랐습니다. 이런 정책만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낸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특별한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신라와 가야의 합의 통일입니다. 신라와 가야는 바로 이웃에 있었는데 앙숙이었습니다. 가야가 번성했을 때는 가야 땅이 현재 울산의 언양 가까이까지 되었습니다. 거꾸로 가야가 밀리고 신라가 커지면서 신라가 울산에서 양산으로 밀고 내려가서 지금의 부산까지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낙동강이 신라와 가야의 국경이 되었습니다. ‘낙동강’이라는 명칭의 연원이 가락국의 동쪽에 흐르는 강이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어요. 진짜 그런지 안 그런지는 아무도 모르지만요.(모두 웃음)

처음에는 가야가 신라를 공격했는데, 신라가 궁지에 몰리자 고구려 군대를 끌어들여서 가야의 침공을 막아냈습니다. 이후 100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신라가 가야보다 더 강성해졌습니다. 신라는 낙동을 넘어서 가야를 공격하려고 했고, 가야는 신라의 공격을 목숨 걸고 막아내려고 했습니다. 두 나라 사이의 긴장감이 굉장히 높았습니다. 신라의 보수 세력은 ‘100년 전의 원수를 갚자’라고 주장하면서 가야를 무력으로 제압하려고 했고, 가야는 ‘우리는 500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이다. 어떤 경우에도 신라 침공을 막아내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우자’ 이런 분위기였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신라에는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합리적인 세력이 있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진보 세력이라고 볼 수 있겠죠. 이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제 신라는 큰 나라가 되었다. 우리가 과거의 원한에 사로잡혀서 가야를 공격해서 복수하는 데에 우리의 국력을 쏟을 것이냐. 지금 우리의 경쟁 상대는 가야가 아니고 고구려와 백제이다. 가야는 죽기 살기로 저항하겠다는데, 작은 가야한테 힘을 쏟아 거기에 국력을 소진했다가 고구려나 백제의 침공을 받으면 오히려 나라가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러니 가야를 평화적으로 포용하고 힘을 모아서 장기적으로 백제나 고구려의 공격에 대응해야 한다.’

신라는 국가 규모가 월등하게 작았기 때문에 고구려나 백제에 대응할 상상도 못 할 때였습니다.

우리의 경쟁 상대는 북한이 아니라 일본과 중국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문제의식과 비슷합니다. 신라의 젊은 세력은 우리가 지금 이렇게 관점을 갖는 것과 똑같은 생각을 했던 겁니다.

‘우리가 과거의 원한을 갚기 위해 북한을 공격하는 데에 에너지를 소진해서 주변 강대국인 일본이나 중국에 뒤쳐질 것인가. 오히려 남북한이 통합을 해서 일본이나 중국과 경쟁할 생각을 해야지, 왜 북한하고 경쟁하려고 하느냐. 북한은 이제 더 이상 우리의 경쟁 상대가 아니다.’

오늘날에도 일부 보수 세력은 ‘북한을 좀 손봐야 한다’ 이런 입장이긴 하죠. 예나 지금이나 거의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가야와의 통합으로 비약적으로 성장한 신라는 결국 고구려, 백제와 경쟁하게 되고 고구려, 백제에게 협공당한 신라는 바다 건너 당나라와 동맹을 맺고 맞서게 됩니다.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켰습니다. 당나라가 백제, 고구려 땅에 도독부를 설치하고 통치하려고 하자 신라가 반발했습니다. 이에 당나라는 신라에도 계림도독부를 설치했습니다. 신라는 당나라에 맞서 8년 간 전쟁을 하고, 삼국통일을 이루었습니다. 스님은 외세를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의 정신을 오늘날 어떻게 본받을 수 있을지 설명해주었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했기 때문에 삼국이 통일된 것이 아닙니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당나라는 거꾸로 신라까지 복속시키려고 했습니다. 신라는 당나라와 50여 년 간 동맹관계였지만 당나라와 전쟁을 했습니다. 이 전쟁은 8년간 계속됐습니다.

이것을 현재 상황에 대입해서 가상해 본다면, 한‧미 연합군이 북한을 공격하여 승리하자 미국이 북한에 군정을 실시하니까 한국에서 불만을 터뜨렸고, 그래서 미국은 우리까지 제압하려고 했고, 우리가 여기에 반대해서 미국과 전쟁을 벌인 것과 같습니다. 8년 간 전쟁을 해서 이 땅에서 당군을 몰아냈다는 얘기인데, 지금 대한민국이 이렇게 하는 게 가능할까요?”

“불가능합니다.”

“옛날 조상들은 확실히 달랐습니다. 8년 간 전쟁을 해서 당나라 군대를 몰아냈습니다. 당나라와 싸운다는 것은 신라 입장에서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습니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사람의 힘만으로는 안 되고 신‧불의 힘을 빌려야 된다고 해서 세운 절이 사천왕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잠시 후에 사천왕사에 가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결국 서기 676년에 당나라와 8년 전쟁을 끝으로 당나라 군대를 이 땅에서 몰아냅니다. 우리는 이것을 삼국 통일이라고 말합니다. 백제와 고구려가 망해서 삼국 통일이 된 게 아닙니다. 외세인 당나라가 완전히 물러난 676년이 삼국 통일이 완성된 해입니다.

오늘 이곳에서 강조하고 싶은 얘기는 첫째, 신라가 어떻게 가야와 합의 통일을 해서 비약적 발전을 했느냐입니다. 둘째, 황룡사, 사천왕사, 선덕여왕릉에 가는 이유는 통일 전쟁 시기에 그들이 어떻게 힘을 모았나를 살펴보기 위해서입니다.

신라는 국가적 위기를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큰 뜻을 내서 삼한 일통을 발원하고 역사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당나라와 힘을 합했지만, 마지막엔 그런 당나라의 간섭을 물리치기 위해 8년 전쟁도 불사했고, 신앙의 힘까지 빌어서 위기를 이겨냈습니다. 나중에 고려가 원나라의 침입을 받을 때 팔만대장경을 만들어서 원나라의 침공을 막아내려고 했던 것도 여기에 연원이 있습니다. 신라의 성공 케이스가 영향을 준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신라니 백제니 고구려니 하는 것보다 이런 정신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북한을 경쟁상대로 보지 않고 북한과 합의 통일을 이뤄낸다면, 통일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중국과 일본을 제압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국과 일본까지도 협력해서 동아시아 평화공동체를 만들자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지금은 세계적 경쟁을 해야 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세계 문명의 중심이 동아시아가 되도록 하는 것을 새로운 100년의 목표로 해야 합니다. 이런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함께 모인 것이 통일의병입니다.”

신라의 삼국통일에는 한계도 있지만, 분명 오늘의 대한민국이 배울 점이 있었습니다. 한 시간 동안 설명을 듣고 일어나 스님과 무열왕릉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황룡사 9층 탑, 통일을 발원한 선덕여왕

이렇게 무열왕릉 순례를 마친 후 다시 버스를 타고 황룡사지로 향했습니다. 황룡사지 너른 벌판에는 망초꽃과 온갖 풀이 자랄 대로 자라 바람에 일렁거리고 있었습니다.

중문터 앞에 대중이 모두 모이자 스님은 황룡사가 지어진 연원과 그 과정에 대해 설명을 했습니다. 빈터에서 스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웅장했던 황룡사가 눈 앞에 그려졌습니다.

황룡사에 대한 설명을 듣고 스님을 선두로 다 함께 중문터를 지나고 9층 목탑터를 지나 금당터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금당 뒤쪽으로 민족의 역사와 의병의 역사를 상징하는 28개의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9층 목탑이 있었던 자리를 바라보며 금당의 삼존불이 위치했던 좌대 위에 깃발과 황룡사 9층 탑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앞에 보이는 터가 황룡사 9층탑터입니다. 신라인들은 이곳에서 국난을 극복하고 삼한이 통일되기를 발원했습니다. 지혜로운 선덕여왕과 모든 백성들이 정성을 기울여 발원해서 만일, 30년이 지나기 전에 결국은 그 원이 성취되었습니다. 우리는 만일을 목표로 26년 전에 기도를 시작했는데 4년 안에 될지 모르겠어요.(모두 웃음)

우리도 마음을 모아서 지금 이곳에서 다 함께 통일 발원기도를 하겠습니다."

스님이 간절하게 발원을 한 후 다 함께 정성을 기울여 기도를 했습니다.

"나라만 통일되는 게 아니라 북한의 모든 동포들이 굶주림에서 벗어나고, 스트레스가 높은 한국 사람들의 스트레스가 해소되기를 바랍니다. 나라만 발전할 게 아니라 모든 국민들이 행복하기를 발원합니다. 통일국가에 사는 모든 국민들이 행복해지는 그런 통일국가를 저희가 만들어가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탑터를 한 바퀴 돌고 사천왕사로 향했습니다.

호국사찰 사천왕사와 선덕여왕릉

사천왕사는 당나라의 20만 대군이 신라를 침공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막기 위해 정성을 기울여 기도를 했던 곳입니다. 스님은 신라가 어떻게 당나라를 물리쳤는지 재미나게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선조들이 1300여 년 전 이곳에서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위해 정성껏 기도를 올렸듯이 스님과 통일의병들도 이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남북의 평화적 통일을 발원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또 이곳 사천왕사는 통일의 과정에서 불어닥친 외세의 위협을 막기 위한 기도를 했던 곳이기 때문에 우리도 남북통일 과정에서 강대국의 간섭과 방해에 잘 대응할 수 있기를 함께 기도했습니다.

“남북이 평화로워지고 통일이 되는 길에 모든 장애가 제거될 수 있도록 옹호하여주옵소서.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없어지고, 평화체제가 구축되어 북한의 핵도, 일본이나 미국의 공격도 없어지기를, 우리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평화가 정착되어 우리 조국만이 아니라 주변 나라까지 함께 번영하기를 기도드립니다.”

발원을 마치고, 스님은 그 자리에서 선덕여왕의 리더십에 대해서도 들려주었습니다. 선덕여왕릉으로 옮겨서 설명을 하면 이동하고 자리 잡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이었습니다.

설명을 마치고 대중은 숲길을 따라 선덕여왕릉으로 향했습니다. 뜨거운 햇살 아래 한참 앉아있다가 시원한 숲길에서 산 바람을 맞으니 상쾌했습니다.

스님은 “시원하니까 무슨 노래 생각나요?” 하고 수신기로 동요를 불러주었습니다.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의병 몇 명이 돌아가며 바람이 들어간 동요를 불러주었습니다. 수신기 너머로 들려오는 맑은 동요를 들으며 걷다보니 금세 선덕여왕릉에 도착했습니다.

선덕여왕릉 주위에는 솔숲이 넓게 있어서 아주 시원했습니다. 대중들은 솔숲 곳곳에 삼삼오오 자리를 펴고 앉아 땀을 식히며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길을 비켜서 자리를 깔도록 하세요.”

스님은 다른 관광객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주었습니다. 스님도 도시락으로 점심식사를 하는데, 스님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안 받겠습니다.”

스님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법사님들에게라도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것도 거절 당했습니다.

“법사님들도 주면 안 돼요. 주려거든 나 없을 때 주세요.”(웃음)

이렇게 역사기행을 모두 마치고 곧바로 경주 동국대학교 100주년 기념관 대강당으로 향했습니다. 오후에는 제 8차 통일의병 임명식이 열렸습니다. 

전체댓글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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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태

스님께 감사드리며
여러 봉사자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_^

2019-07-08 01:05:57

정지나

100년의 앞을 본다...굶주림해결,행복해지기...
다시 살피고 살펴봅니다 나를!
감사합니다 꾸벅^^

2019-06-22 23:30:22

허성숙

대구달성군 산골마을
200년 선산과 집터 출가외인이 산소관리하고 소유하지만 산소관계로 맘이 무겁습니다
외지인은 조상님 벌초도 안하고 자시들고향생각에 누울자리 찿아다니고
고향산천 개인선산과 집이 문린 산골에 사는 저로서는 맘이 무겁습니다
아들없이 맞딸이라 친정집안 혈육에 대한 처신을 어찌해야하는지요?
스님말씀 간곡히 기다리겠습니다

2019-06-12 10:4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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