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8.13. 동북아 역사기행 6일째
“이곳에 용성조사님이 대규모 농장을 마련했어요”

안녕하세요. 동북아 역사기행 6일째입니다. 오늘은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를 집중적으로 탐사했습니다.

새벽 5시, 가장 먼저 새벽 시장을 찾아 아침식사를 했습니다. 기행단 모두가 이제 새벽시장 보는 것이 익숙해졌고, 재미도 솔솔 합니다.

아침 식사 후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발해의 독특한 유적인 강동 24개석입니다. 돈화시의 주택가 한 가운데 놓여있는 24개석은 발해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유적입니다.

“상경용천부에서 중경현덕부, 동경용현부, 남경남해부 이 사이에 난 길에 이 24개석이 여러군데 발견되었습니다. 이게 과연 무엇일까요? 첫째, 주요 교통로에 있는 ‘역참’이라는 주장도 있고요. 역참인데 돌을 왜 저렇게 놓았느냐 하기도 하지만 주요 교통로에 있기 때문에 역참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둘째, 왕이 죽으면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갈 때 관을 보관하던 곳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셋째, 양식 창고라는 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춧돌이 이렇게 여러 개 놓여있다는 것은 그 위에 엄청나게 무거운 것을 올렸다는 것을 말하거든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확정적으로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어요.

현재 확인된 사실은 주요 교통로에 있다는 것, 그리고 기와가 발견됨으로써 건물유지라는 것입니다.”

강동 24개석을 간단히 본 후 이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 유적지를 탐사하기 위해 안도현으로 향했습니다. 가장 먼저 만난 독립운동 유적지는 용성 조사님이 독립운동 근거지를 확보하기 위해 마련했다는 명월촌과 봉녕촌의 선농당입니다.

버스 안에서 스님은 왜 용성조사님이 1922년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급하게 이 땅을 구입했는지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이곳 안도현 명월촌과 봉녕촌은 백두산록을 끼고 있어요. 백두산은 안도현 소속인데 백두산록은 안도현에서 왕청현을 거쳐 연해주로 연결됩니다. 지금도 이 산록은 삼림지대에요. 이렇게 길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당시 독립군들이 몰래 이동하기에 아주 중요한 요지입니다. 용성 조사님께서는 안도현의 그 통로에 농장을 내신 겁니다.

농장을 낸 배경을 말씀드릴게요. 용성 조사님께서는 1919년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하셨을 뿐만 아니라 3.1운동이 천도교 중심이 아니라 여러 종교가 연합한 공동 운동이 되게끔 많은 노력을 하셨습니다. 불교계의 큰 원로인 용성 조사님이 잡혀가면 곤란하다 해서 처음에는 그 책임을 한용운 스님이 지기로 하고 용성 조사님은 도장만 빌려줬다는 식으로 하자는 모종의 합의가 있었어요. 그러나 용성 조사님도 독립선언문에 서명을 했기 때문에 결국 감옥에 잡혀가서 6개월간 조사를 받고 1년 6개월의 형을 받아 감옥에서 거의 2년을 보내셨습니다. 1919년 3월에 투옥돼서 1922년 3월에 나오셨어요.

그런데 자유시 참변이 일어난 때가 용성 조사님이 감옥에 계실 당시인 1921년 6월이었습니다. 감옥에서 나와 보니 독립군이 러시아 땅인 자유시에 갔다가 궤멸되고 다 뿔뿔이 흩어졌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겁니다. 흩어진 독립군이나 그 가족들이 살 곳이 마땅치가 않은 상황이었던 거죠. 그래서 우선 새로운 독립운동 근거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셔서 그 당시에 전라도 남원에 있는 만석꾼으로부터 후원금을 받았습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재벌이죠. 또 순종황제비와 상궁들에게서 후원을 받았어요.

이렇게 그 당시 일본 돈으로 3만여 원을 확보해서 이곳 명월촌과 봉녕촌에 각각 700정보의 땅을 구입했습니다. 한 정보가 3천 평이니까 각각 210만 평 정도죠. 개척되지 않은 지역과 개척돼서 논도 좀 있고 마을에 사람도 몇 명 사는 지역을 합쳐서 안도현 안에 두 군데를 구입했어요.

형식적인 이름은 ‘선농일치(禪農一致)를 한다’, 즉 농사짓고 참선한다고 해서 ‘선농당(禪農堂)’이라고 붙였습니다. 참선도 하고 농사도 짓는 곳이라는 뜻이죠. 그리고 독립운동가 가족들이 찾아오면 농사지을 땅을 다 제공하고 3년까지는 소작료도 일체 안 받았습니다. 땅을 공짜로 주면 소문이 나버리니까 임대해서 빌려주는, 즉 소작을 주는 형식을 취했어요. 그러나 당시 3:7이었던 소작제와 달리 5:5 형식을 취하고, 그것도 첫 3년은 받지 않고 3년 후부터 받는 식으로 했습니다. 독립운동가 가족뿐 아니라 기존에 살면서 농사짓던 사람들도 똑같이 대우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외부적으로는 불교 이상촌을 꾸린다는 간판을 내걸고 거기에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운영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1922년에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돈을 구해서 여기 땅을 구입하셨어요.

선농당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나자 용성 조사님은 1927년에 당시의 북간도 중심지였던 용정에 대각교당(大覺敎堂)을 세웠습니다. 선농당은 비공식적으로 운영하던 것이었고, 대각교당은 공식적인 포교당이었습니다. 여기서 교민들을 위한 교화활동을 했는데, 홍범도 장군과도 연결이 되어 가까이 지내게 되었어요.

여기가 이런 활동을 벌였던 유적입니다. 이런 활동은 다 비밀리에 했기 때문에 역사에 남은 기록은 전혀 없고 스님의 활동기록에만 남아 있어요.

그래서 오늘 이 길로 가면서 그 자리를 살펴보려고 지금 버스를 세웠습니다. 저기 산 밑에 집들이 있는 모습이 보이죠? 저기가 봉녕촌 자리입니다. 지금은 ‘양병진’으로 마을 이름이 바뀌었어요.

명월촌 자리는 지금 지명이 ‘명월진’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여기 사는 사람이 소수였어요. 여기저기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삼림지역을 조금씩 개척해서 살던 지역입니다. 그리고 선농당에서는 원래 살고 있던 사람도 그곳에 계속 살도록 해주었어요.

그런데 일부 다른 소문에 따르면 ‘한국에서 스님이 와서 땅값을 터무니없이 많이 주고 속아서 샀다’ 이런 얘기가 나왔다고 합니다. 급하게 땅을 사는데다가 스님 이름으로 직접 땅을 사지 못하고 여기 사람 이름으로 사야 하다 보니 중간에 누가 농간을 좀 부렸겠죠. 그러나 큰일을 하려면 그런 부분은 감수를 해야 해요.

이렇게 남의 이름을 빌려서 땅을 샀기 때문에, 훗날 일제 말기에 가면 소유권 분쟁이 또 생깁니다. 명의를 빌려준 사람이나 거기서 소작 지은 사람들은 용성 조사님이 자기들한테 땅을 기부했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사실은 이름을 빌려서 한 것인 데도요. 명의상 소유권자일 뿐인데 실제로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고, 거기에 소작 형식으로 들어온 사람들 중에는 독립운동 관계자가 아닌 사람들도 섞여 있으니까 그 사람들도 ‘스님이 우리한테 땅을 줬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여기엔 이유가 있었어요. 용성 조사님이 활동하던 1938년에 한국에서는 일제가 대각교 해산명령을 내려 대각교의 재산을 다 압류해버립니다. 그러니 한국은 아니지만 이곳에 있는 재산도 대각교 재산인지의 여부가 문제가 됐습니다. 대각교 재산이면 이곳도 다 압류 대상이에요. 그 당시는 여기도 일본이 다 관장하는 만주국이었으니까요. 그러니 압류를 안 당하려면 ‘우리는 대각교하고 관계가 없다. 스님이 우리에게 준 땅이다’ 이렇게 주장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땅을 경작하던 사람은 제 것이라고 주장하고, 명의 소유권자도 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지금 우리도 외국에 가서 뭘 하려면 모두 현지 사람의 이름을 빌려서 하게 됩니다. 수자타 아카데미도 그래요. 우리가 인도에 JTS 법인을 만들어서 땅을 구입하고 학교에 엄청나게 투자를 해놨지만 법적으로는 인도 사람들의 것입니다. 실질적으로는 제가 JTS 이사장이지만 법적으로는 인도 사람이 이사장이에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만에 하나 이게 자기들 것이라고 법적으로 주장하면 우리는 손 털고 나와야 합니다. 인도의 법제도가 외국인에게 땅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요.

소유권 분쟁 뒤에는 대각교 해산명령이라는 배경과 이유가 있었어요. 평소에 아무 사건이 없으면 문제가 안 되는데, 무슨 사건이 생기면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지역이었지만 이렇게 개발이 되면서 독립군들이 결집하게 됐어요. 농장을 구입한 이듬해인 1923년에 벌써 고려혁명군이 이곳 명월구에서 재건을 하게 됩니다. 당시에는 지명도 별로 없었는데, 첫 번째 지명이 옹성납자(甕聲磖子)였어요. 거기 가보면 바위가 이상하게 생겼는데, 거기에 바람이 불거나 물이 치면 소리가 웅웅 울렸다고 해요. 소리가 울리는 곳이라 해서 옹성이라고 불렀어요. 중국말로는 옹성납자입니다.

그러다가 맑은 물에 달이 비치는 곳이라고 해서 그 지역을 명월촌이라고 불렀습니다. 나중에는 명월구가 되었고요. 여기는 동네에 ‘촌’, ‘구’, ‘자’, 이런 말을 붙이거든요.

1930년이나 1931년이 되면 이 명월구가 동만주 지역 항일연군의 중요한 근거지가 됩니다. 북한의 김일성전집에도 김일성이 참여한 중요한 독립운동 회의를 한 곳이라고 나와 있어요. 그래서 북한에서 명월구회의 50주년 기념우표까지 발행할 정도거든요. 무명이었던 장소가 1930년대에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는 걸 보면, 용성 조사님의 농장이 독립운동 근거지 마련의 중요한 기반이 되지 않았겠느냐, 이렇게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1938년에 이르면 만주국에서는 독립군들을 잡을 목적으로 똑똑한 조선 청년들만 모집해서 간도특설대라는 것을 만듭니다. 정식 군인도 아니고 경찰도 아닌데 정부가 관여해서 비밀부대 같은 역할을 한 거예요. 이 간도특설대가 독립군 잡이를 합니다. 평복을 입고 동네에 숨어 다니면서 정보를 수집해서 기습을 했습니다. 독립군이 유격전을 벌이듯 이 사람들도 그런 유격 기습전을 통해 독립군을 궤멸시키는 역할을 했는데, 그 간도특설대가 출발한 곳도 그 명월구입니다. 명월구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명월구가 그만큼 독립운동의 중요한 근거지였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어요.

명월촌은 지금 안도현의 중심지가 돼서 이름도 명월진으로 바뀌었는데, 그 당시에는 그냥 연길현의 한 산골 마을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간도특설대가 있었던 자리는 현재 비석이 남아있습니다.

제가 여기 와서 난민을 돕는 활동을 했지만, 난민 돕는 일은 옛날에 두만강변에서 수월 스님이 먼저 하셨어요. 경허 스님의 3대 제자 중 첫 번째 제자가 수월 스님입니다. 수월 스님이 이곳에서 난민들을 많이 구제하셨습니다.

또 우리가 통일운동을 지금 해외 교포 근거지를 중심으로 하잖아요. 저도 매년 미국이나 독일, 호주 등 해외 교포들이 많이 사는 곳을 찾아다니고 있는데, 용성 조사님이 그런 선례를 남기셨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면서 교민 근거지인 이곳 용정에 대각교당을 내고, 이 근방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서 이런 농장을 마련하고 선농당이라는 이름을 내걸었어요.

이렇게 보면, 우리가 뭘 창의적으로 한 것 같지만 이미 선조들도 다 그 어려운 때에 그런 아이디어를 내서 그런 활동들을 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런 어려운 시기에 그런 시도를 했다는 것은 그 당시에서 보면 굉장히 큰일입니다. 지금 평가하면 별 거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 당시의 어려운 조건에서는 어마어마한 일이었어요.

수월 스님은 용성 조사님보다 더 먼저 살다 가신 분입니다. 두만강변 도문의 일광산에 움막을 지어 소를 먹이며 일반인처럼 사셨는데, 짚신을 꼬고 주먹밥을 해서 항상 괴나리봇짐에 담아서 나갔어요. 그걸 난민들에게 직접 주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지나는 길목의 나무에 매달아놓았대요. 그러면 지나가던 난민이 필요하면 가져가서 먹거나 썼습니다. 옛날엔 다 짚신을 신었잖아요. 짚신은 부지런히 걸을 경우 일주일 가량 되면 바닥이 떨어져요. 그래서 한양까지 가려면 짚신을 몇 켤레를 메고 가야 해요. 가다가 떨어지면 갈아 신어야 하니까요. 짚으로 꼬아 만든 신발이라서 빨리 닳아요. 그래서 배고픈 사람은 주먹밥을 먹고, 신발 없는 사람은 짚신을 신고 가도록 짚신과 주먹밥을 나무에 달아매 놓으셨습니다. 아픈 환자들도 도와주었고요. 그러다가 거기도 일제의 탄압이 미치니까 더 안쪽 라자구로 들어가서 살다 열반하셨어요.

사실은 수월 스님 관련 유적지도 복원을 해보려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종교적인 건 하도 엄격하게 금지하니까 어려워요. 집안에서도 국동대혈 밑에 관음굴 입구를 닫아버리는 거 보셨죠? 하물며 외국인이 와서 하는 활동은 아주 엄격하게 금지하고, 그게 민족 문제하고 관계되면 단속이 더 심합니다. 그래서 손을 못 대고 있지만, 사실 이게 자유롭게 된다면 이 지역에는 우리 선조들이 나라를 빼앗기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노력한 흔적, 피눈물 나는 유적이나 유물이 수없이 많아요.

그런 것들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다 지워지겠죠. 세월이 흐르면 유적은 흔적이 없고 사람들의 기억은 사라져버립니다. 우리가 이렇게 다니는 것도 옛일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느 한 사람이 기억해봐야 그 사람이 죽으면 없어지니까, 그래도 이렇게 1년에 300명 정도씩 와서 함께 기억을 하면 낫잖아요. 내가 죽으면 네가 기억하고, 네가 죽으면 내가 기억하고요. 또 여러분은 자손들이 있으니까 자손들한테도 이런 얘기를 해주고, 그러면 또 그 자손들도 여기 와서 직접 보고요. 이렇게 해서 기록이 되는 것은 기록에 남고, 구전이 되는 것은 구전으로 전해지는 거예요.

옛날에는 다 글을 모르고, 알아도 못 쓰게 하는 일이 많다 보니, 말로 전해 내려오다가 어느 유식한 사람이 얘기를 듣고 ‘와, 이런 얘기가 있었나!’ 하고 비로소 글로 써서 남겼어요. 우리의 옛날 역사도 다 구전해 내려오다가 채록이 되어서 나온 것이지만, 지금 그런 채록 결과를 내놓으면 요즘 학자들의 입장에서는 ‘다 지어냈다, 가짜다’ 이런 식으로 얘기합니다. 용성 스님의 활동이나 우리가 난민을 도운 것도 나중에 역사가 흐르면 역사가들에게는 다 가짜가 될 거예요. ‘아무것도 안 해놓고는 괜히 과장했다. 그 당시 신문에도 안 났는데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느냐’ 이렇게 되겠죠. 그러나 억압이나 감시 속에서 비(非)법적으로 비밀스럽게 하는 활동은 증거도 남길 수 없고 공개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봐야 해요.”

한적한 시골마을로 보일 뿐이어서 자칫하면 그냥 지나갈 뻔 했지만, 스님의 긴 설명을 듣고 나니 기억하지 못하면 정말 역사에서 사라지겠구나 하는 말씀에 가슴에 더욱 와 닿았습니다.

‘양병진’이라는 푯말이 나타나자 스님의 목소리가 더 높아졌습니다.

“농장이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여기서부터 저 산 사이까지 이 골짜기 전부였어요. 여기서 한 2km 밑까지 쭉 들판입니다. 이게 봉녕촌이었습니다. 210만평이니까 아주 큰 땅이죠. 제가 20년 전에 와서 동네 사람에게 물어봤어요. 여기에 마을이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 일본 사람이 그 마을을 불태워서 없애버렸대요. 아마 1940년 쯤 되나봐요. 그래서 그 마을 이름을 절단났다는 뜻으로 절단마을 부락이라고 불렀대요.

지금은 봉녕촌이라는 이름은 없고 봉서촌이라는 마을만 있어요. 이 들판이 다 용성 조사님이 운영했던 농장이라고 보시면 돼요 “

말로만 듣던 봉녕촌, 명월촌의 규모를 눈으로 직접 보니 입이 떡 벌어졌습니다.

버스는 다시 명월촌의 옛 이름인 옹성납자라고 불리는 바위 앞에 도착했습니다. 정말로 도심 한 가운데에 커다란 바위가 떡 하니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용성 조사님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뒤로 하고, 이제 기행단은 청산리 전투터로 향했습니다. 빗줄기가 점점 거세졌습니다. 청산리 골짜기로 들어가는 비포장도로 앞에서 버스가 멈춰 섰습니다.

며칠 사이 비가 많이 내려 비포장도로 위로 토사가 군데군데 쌓여 있었습니다. 스텝이 작은 차를 타고 가서 도로를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대형버스가 가기는 어렵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오늘 청산리전투를 기념하는 비석이라도 보려고 왔는데, 토사가 밀려 내려와서 버스는 도저히 가기 어렵다고 해요. 전투터는 기념비에서 다시 6km를 더 가야합니다. 옛날에는 걸어서 전투터까지 갔어요 오늘은 비가 와서 기념비까지라도 가보려고 했는데 어렵게 됐네요. 그래서 돌아가야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

“네!”

“오늘은 하는 일 마다 잘 안 되네요 의병 훈련으로는 딱이예요. 그러나 전투에서 지고 전쟁에서 이기면 됩니다.” (모두 웃음)

모두 공감하며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비가 너무 많이 내렸지만 빗 속에서 대종교 3인묘를 참배했습니다. 원래 일송정까지 오를 예정이었지만 웃비가 소강 상태에 이를 때까지 점심 식사를 먼저 하기로 했습니다.

대종교 3인묘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스님은 대종교 3인묘에 모셔져 있는 나철, 김교헌, 서일, 세 분이 어떤 분이었는지 설명한 후 왜 우리가 이 분들의 묘소를 참배하는지 그 의미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묘소를 보고 안 보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렇게 고귀한 세 분이 이곳에 머물고 있다는 게 중요해요. 나라의 독립이 이루어졌는데도 이분들을 아직도 고국에 모시지 않고 있는 것은 통일이 안 됐기 때문입니다. 이분들에게는 ‘어디가 고국인가?’라는 문제입니다. 분단이 되어 두 개의 고국이 되어버렸으니까요.

일본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 끌려갔다가 일본에 정착해 살았는데, 분단이 되어 두 개의 나라가 형성되자 자기의 국적을 어디로 해야 하는지를 못 정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감옥에서 세상을 떠난 안중근 의사의 유해도 누가 그 유해를 발굴하느냐가 문제예요. 중국하고 협조를 한다 해도 ‘그렇게 해서 발굴하면 누가 유해를 가져갈 권리가 있느냐’ 이런 문제죠. 그래서 이건 우선 남북이 합의를 해야 중국에서 발굴 조사를 허용할 거예요. 독립운동은 현재의 두 정부 모두 어느 한쪽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을 하기가 어렵잖아요. 공동의 유산이고 역사니까요.

독립운동의 많은 부분이 아직도 정리가 안 되는 것은 그것이 과거의 역사여서라는 이유도 있지만, 분단 상태인 남북의 정체성 싸움이 아직 결론이 안 난 상태이고, 또 그것에 대한 평가가 남한 내의 진보·보수에 따라 또 다르기 때문입니다.

간도특설대도 그런 예의 하나입니다. 민족 독립의 측면에서만 보면 간도특설대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당연히 매국노예요. 마땅히 반민특위에 제소되어 처벌을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6.25 전쟁을 기준으로 보면 ‘이 사람은 북한군에 맞서서 싸운 사람이다’ 이렇게 평가가 되는 거예요. 평가 자체가 완전히 다르잖아요. 이런 문제가 우리 사회 안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잠들어 있는 대종교 3인은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참으로 위대하고 감사한 분들이에요. 이분들을 북한에서는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이분들은 오직 독립의 원을 품고 이곳에 와서 학교 세우고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마저도 충분한 예우로 모시지 않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 실정입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 속에 가난해서 건너 온 조선인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까지 바쳤던 독립운동가들이 살았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찡했습니다.

대종교 3인묘에 도착해서도 비는 줄기차게 쏟아져 내렸습니다. 우산을 쓰고 흙탕물이 흘러내리는 길을 긴 행렬을 이루며 올랐습니다.

나지막한 언덕 위에 서일, 나철, 김교헌 선생님의 무덤 세 개가 나란히 모셔져 있었습니다.

“애국지사님들께 고이 영면하시라고 묵념을 하겠습니다.”

모두 고개를 숙이고 묵념에 들었습니다. 빗소리만 토닥토닥 들려왔습니다.

대종교 3인묘를 내려와 용정으로 향했습니다. 용정 시내 한복판에 유명한 냉면집을 찾았습니다. 삼삼오오 순서를 기다리며 냉면 한 그릇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대중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스님은 택시를 타고 용성 조사님이 용정에 세운 절인 대각교당 터를 찾았습니다.

“여러분은 냉면을 맛있게 드세요. 저는 여러분이 식사하는 동안 잠시 답사를 좀 다녀오겠습니다.”

대각교당 터는 용정 서시장 남문 맞은편에 위치한 3층짜리 백화점 건물이었습니다. 스님이 26여 년 전에 이곳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대각교당 터와 담벼락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백화점 건물이 들어서 버려서 그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지난 3월에 이곳에 답사를 왔을 때 대각교당 터를 도저히 찾지 못했는데, 조선족 분들에게 수소문하여 오늘 드디어 그 위치를 찾았습니다.

기념사진을 찍고 기행단이 식사를 하고 있는 냉면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점심에 잠깐 비가 멎었습니다. 일기예보를 확인해보니 2시부터 비가 다시 온다고 했습니다. 스님은 2시가 되기 전 일송정을 보여주기 위해 서둘렀습니다. 윤동주를 비롯해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다녔다고 하는 대성중학교를 보고 곧바로 일송정으로 향했습니다.

“제가 오후 2시까지만 비를 멈춰달라고 하늘에 허락을 받아두었어요. 그래서 서둘러야 해요.” (모두 웃음)

일송정에 올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당시 이곳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선조들의 마음을 잠시 느껴보았습니다. 그리고 다 함께 ‘선구자’와 ‘고향의 봄’을 불러보았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고향을 떠나 낯선 중국 땅에서 어렵게 생활하면서도 조선 민족의 기개를 놓치지 않았던 그분들의 마음이 노래 가사에서 고스란히 전달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따뜻한 남쪽 고향을 그리워했을 그 마음도 잠시 느껴보았습니다. 용정을 내려다보며 다함께 노래를 부르니 가슴이 더욱 애잔했습니다.

2시가 지나 일송정을 내려가는데 다시 조금씩 비가 흩날리기 시작했습니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스님과 진행 스텝들은 최선의 역사기행을 만들어 갑니다. 의병들도 변덕스러운 날씨와 일정에 맞춰 재바르게 움직였습니다.

다음 유적지는 봉오동전투터입니다. 한 시간 반을 달려왔지만 봉오동전투터까지 가보지 못하고, 봉오저수지 앞까지만 갈 수 있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저수지까지도 못 오게 했는데, 겨우 허락을 얻어 저수지 입구만 볼 수 있었습니다. 봉오저수지 앞에서 스님에게 ‘봉오동 전투’에 대해 설명을 들었습니다.

아쉬운 마음을 내려놓고 버스에 올랐습니다. 이어서 중국과 북한의 국경 지대인 ‘도문’으로 향했습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동쪽에 위치한 도문시는 변경도시로서 북한이 고난의 강행군 시기를 겪을 때 수많은 탈북자들이 이곳을 통해 국경을 넘어왔다고 합니다.

지금은 철조망이 높게 드리워져서 경계가 삼엄해졌지만, 당시에는 대낮에도 초병의 눈을 피해 도강을 하는 탈북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중국과 북한을 연결하는 조중우호다리 앞에서 1990년대 중후반 탈북자들이 겪었던 처참한 아픔에 대해 설명을 들은 후 버스에 올랐습니다.

두만강을 따라 한반도 최북단 함경북도 온성군 풍서리가 보이는 곳까지 달렸습니다. 스님은 달리는 차 안에서 두만강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반도 최북단 풍서리가 보였습니다.

완전히 어둠이 내린 후 연길에 있는 숙소에 도착해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오늘 저녁식사에는 특별한 손님들도 함께 했습니다. 동북아역사기행 초기부터 내용 구성을 도와주셨던 방학봉 교수님 내외, 난민돕기 사업을 두 팔 걷고 나서서 도와주었던 조선족사기피해협회 사람들이 참석해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한 분 한 분 일어나 스님과의 인연, 역사기행과 난민돕기에 얽힌 사연들을 이야기했습니다. 스님은 참석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한 후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어떤 일을 할 때 스님 혼자 하는 게 아니에요. 스님이 무슨 신통이라도 있어서 그렇게 많은 일을 하나보다 하지만, 어디를 가나 그 많은 일을 하려면 사실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런 분들이 다 도와주신 결과입니다. 인도에 가면 인도 분들이 도와주듯이 어디든지 이런 분들이 계셔서 일이 이루어져요. 한국에서 여러분이 있어서 정토회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개인은 작지만 이렇게 힘을 합하면 큰일을 해낼 수 있다는 점을 한 번 새겨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통일이 되고, 한중 관계가 좋아지고, 이런 얘기 정도는 다 밝혀도 되는 날이 올 수도 있겠죠. 이분들이 살아계실 때 그런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이분들의 공로를 공개적으로 칭송해도 되는 시대가 오면 좋겠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스님은 숙소에 와 계신 조춘호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조선생님은 역사기행 시작부터 스님과 함께 역사기행을 만들어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3년 전 뇌출혈이 와서 쓰러진 후 거동이 불편해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스님은 힘없이 앉아 있는 조선생님을 격려했습니다.

“이제 마음을 좀 가라앉혔어요? 아직도 빨리 나아서 일하려고 조급해 하고 있어요?”

“지금도 조급합니다.”

“조급해 하면 악화돼요. 좋아질 것을 너무 바라지 말고, 안 나빠지는 것만 해도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해요. 이제는 포기할 줄 알아야 해요. 역사기행은 둘째 딸이 잘 맡아서 하고 있으니까 알아서 하라고 다 넘겨줘야 해요. 딸이 자기보다 더 잘 해요. 너무 걱정하지 마요.”

기운을 듬뿍 실어준 후 병문안을 마쳤습니다. 스님이 병문안을 하는 동안 이승용 총장님이 저녁 강의를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강의장으로 내려온 스님은 대중들에게 반가운 소식을 전했습니다.

“공지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백두산 입장권을 구했답니다. 스텝들이 애를 많이 썼어요.” (모두 박수)

내일은 다시 한 번 백두산 천지 등정을 시도합니다. 엊그제 기행단은 백두산을 찾았지만, 태풍으로 인해 산문 앞에서 돌아서야 했습니다. 오늘도 비가 많이 와서 다른 유적지를 돌아보았고, 내일 그나마 강수확률이 50%라 백두산을 가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내일도 또 산문이 폐쇄될 가능성이 있어 여러 여행사에 연락해봤지만 입장권을 끊어주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스텝들이 백방으로 알아보고 간절하게 요청해서 입장권을 끊었습니다. 기행단은 무척 반가워하며 박수를 쳤습니다.

“아이고. 수행자가 그렇게 좋아하면 어떡해요.” (모두 웃음)

스님의 따끔한 말을 들어도 다들 몹시 기쁜 얼굴이었습니다. 조별로 나누기를 한 뒤 설레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내일은 연길에서 출발해서 4시간 30분을 달려 이도백하에서 다시 백두산 북편으로 올라 천지를 볼 예정입니다. 또 비룡 폭포와 소천지, 녹연담, 지하산림을 본 후 훈춘에서 하룻밤 머무를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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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나윤

감사합니다. 🙏

2023-11-09 12:01:05

맑음

용성스님, 수월스님을 비롯한 선각자들과 수많은 독립운동가들 같은 훌륭한 분들께 감사하고 이를 찾아내어 잊지않게 구전, 체험시켜주시는 스님께 감사하다. 해야할 일을 찾아서만들어 함께 동참시키고 기꺼이 협조하고 이끌어가는 분들 모두 고맙다. 하루동안 저 많은것을 하고 간것도 대단하다.

2019-09-04 22:58:27

정병욱

마래에 우리의 생활 터전이 될 수도 있을거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2019-08-30 07:5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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