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서초법당
새로운 100일을 준비합니다

서초법당에 없어서는 안 될 맥가이버 같은 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만나보니 서초법당뿐만 아니라 정토회에 꼭 필요한 분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금의 정토회가 있기까지 굵고 궂은 소임을 도맡아 해오며, 정토회 도반들의 전폭적인 사랑으로 오랜 세월 정토회와 함께 할 수 있었다는 오택 님의 사연, 함께 만나보시죠.

100일 법문의 인연

1995년 우연히 법륜스님의 고등학교 후배라는 분으로부터 월간정토를 소개받아 정토회를 알았습니다. 인터넷이나 유튜브 같은 것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여서 따로 스님 법문을 듣기 위해 카세트테이프를 사서 들었습니다. 테이프를 사러 갔다 서초동 본부가 완공되어 스님이 개원 100일 법문을 한다는 안내 문구를 보았습니다. 1999년, 개원법문을 백일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 들었습니다. 시골에 계신 어머니까지도 모시고 와 법문을 함께 들었습니다. 나이 드신 어머니도 이렇게 불교가 쉬운 거였냐며 너무나 좋아하셨습니다. 딱 1년 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지금 생각해도 어머니께 100일 법문을 듣게 해 드린 일이 아주 잘한 일중 하나입니다.

백일법문을 들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안 보이는 곳에서 수고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도 무슨 일이든 해보겠다고 봉사를 신청했습니다. 컴퓨터 수리, 조립, 회원 관리, 기본서류, 삼보 수호비 봉투부터 필요한 제반 서류들을 수정하고 교정하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수천명이 넘는 회원 관리의 기초를 잡고 컴퓨터에 익숙지 않는 사람들에게 컴퓨터 사용법을 가르쳐 주는 일도 했습니다.

서초 본부의 설비를 점검하는 중인 오택 님
▲ 서초 본부의 설비를 점검하는 중인 오택 님

저는 목수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늘 아버지의 일하는 모습을 보고 자라 그런지 초등학교 때 책상과 의자도 직접 만들었고 중학교 때는 라디오를 조립할 정도로 손재주가 많았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마을에 전기가 처음 들어왔는데 그때부터 동네의 고장 난 전기, 가전제품들을 고쳐주었습니다. 그런 경험으로 정토회에서도 자연스레 법당의 하드웨어 설비에 관련 봉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3층 서초동 법당은 원래는 7층의 건물로 만들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북한 동포가 굶어죽는다는 것이 국제사회 문제로 알려졌습니다. 스님의 뜻에 따라 건물을 축소하고, 굶주리는 북한 동포를 도왔습니다. 건물이 계획대로 지어지지 못해 관리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공양간과 화장실은 환기가 잘되지 않았고, 난방시스템도 잘못되어 보일러 시스템도 바꿀 수밖에 없었습니다. 돈이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지만 단돈 10원도 절약하던 시기였습니다. 비용을 적게 들이면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원인분석만도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부품 구입을 위해 청계천, 세운상가, 황학동 벼룩시장, 용산선린상가, 포천 돌공장 등등을 누비며 발품도 많이 팔았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 거리 연등 설치작업이나 행사에 필요한 작업을 할 때 보면 대부분 전문지식을 가진 봉사자들이 아닙니다. 잘못하면 대형사고가 날 수도 있는 가슴 덜컹거리는 일을 볼 때도 있었습니다. 제가 필요한데 잘 쓰일 수 있다는 자부심으로 지금까지 정토회와 인연이 된 것 같습니다.

봉사, 결국 나를 위한 것

“거사님은 회사를 안 다니고 봉사할 수 있으면 더욱더 좋고, 회사를 꼭 다녀야 할 조건이면 봉사할 수 있는 부서에서 근무하면 좋겠다.”라고 스님께서 연말 활동가 모임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듣는 순간 바로 '나는 가정이 있는데... 너무 세게 말씀하시는 것 아닌가?' 라는 분별심이 올라왔습니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스님께서 저렇게 말씀하시는 건 다 이유가 있겠다 싶었습니다. 회사에서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50대 중반까지 기관사업무를 천직으로 생각하고 일했습니다. 그 이후엔 중간 간부로 신입사원 및 직원직무교육을 담당하고 현재는 정년을 1년 앞두고 있습니다.

서초 본부의 설비를 점검하는 중인 오택 님
▲ 서초 본부의 설비를 점검하는 중인 오택 님

2000년도 초중반에는 주 4~5일을 정토회에 나와 활동했습니다. 말이 4~5일이지 정토회 일은 7일도 부족했습니다. 문경수련원에서 열리는 입재식을 비롯해 정토회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행사의 시설 준비와 방송시설을 제가 많이 준비했습니다. 시도 때도 없고 회사에 출근하나 집에 있으나 전화통에 불이 났습니다. 몸과 마음은 점점 힘들어지고 오히려 회사에 출근해서 지하철 기관사로서 운전실에 앉아 일할 때를 휴식 시간으로 느낄 정도였습니다. 함께 일하던 일부 실무자들과 많은 갈등도 겪었습니다. 어떤 날은 너무너무 힘들어 법사님과 두 번 상담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해결되는 답은 없고 이런 고비를 3번은 넘겨야 한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안되면 지도법사님과 면담자리를 마련해 주겠다 하셨지만 제안도 거절하고 일단 100일을 무작정 쉬었습니다.

정토회를 안 가면 시간도 많고 도반들과 부딪히는 스트레스도 없고 자유로울 것 같았습니다. 막상 쉬면서 등산도 하고 다른 절도 나가보고 했지만 아이러니하게 편하지도 자유롭지도 않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정토회 안 간다 말도 못 했습니다. “저놈 정토회 미치더니 별수 없군”이라는 말은 듣기가 싫었습니다. 자발적 100일의 휴가를 보내며 정토회를 위해 내가 온 힘을 다해 봉사했다는 생각들이 조금씩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오히려 정토회에 제가 많은 의지를 하고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 그리고 동네 어르신들로부터 칭찬을 많이 받고 자라서 그런지 내가 옳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상대가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하면 너그럽게 받아주지 못해 괴로웠습니다. 돌아보면 함께했던 도반들이 고집 센 저를 어르고 달래면서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돌이켜 보면 미안한 마음이 들고 저를 지켜주고 기다려준 법사님과 도반님들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와이에서 가족과 함께
▲ 하와이에서 가족과 함께

도반의 정성으로 세상으로 나온 아들

아내와 저는 정토회의 소중한 도반으로 서로 의지하고 살고 있는데 아들 문제로 마음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아들은 중학교 때 하고 싶은 축구를 못 하게 된 이후로 무기력증과 졸음으로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힘들어했습니다. 아들은 제주도에서 6개월만 내려가 쉬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연고도 없는 제주도에 어린 아들을 혼자 보내기도 힘들고 온 가족이 함께 가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고민하다 제주도에 사는 도반에게 방 얻을 때까지만 도와달라고 전화로 부탁했습니다. “정토회에 네 아들 내 아들이 어디 있나? 다 우리 자식이지. 그냥 보내세요. 우리 집에서 내가 데리고 있을게” 선뜻 아들을 보내라는 말에 그다음 날 제주도로 보냈습니다. 제주도에서 생활하면서 차츰 아들은 조금씩 무기력증이 나아지고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아들은 그 도반 집에서 지내면서 많은 감동을 받고, 많이 울고, 그 정성 덕분에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부모도 못 한 일을 피도 안 섞인 도반이 해결해 준 것이 너무나 신기해 비결을 물으니 “글쎄요, 나는 아무것도 한 것 없는데 그냥 삼시 세끼 밥만 차려 줬는데."라고 했습니다.

오택 님 아들이 쓴 책
▲ 오택 님 아들이 쓴 책

나중에 알고 보니 도반은 꼭두새벽에 친정어머니를 위한 밥을 차리고, 남편 출근 전 밥을 차리고, 본인 밥을 차려 먹고 매일 늦게 일어나는 아들이 일어나는 때에 맞춰 밥을 정성스레 차려 줬다고 합니다. 아들이 늦게까지 잠을 자니 그 새벽에 아들이 깰까 봐 조심조심 매일 4번씩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아들이 한없이 잠만 자는 줄만 알았는데 그 도반의 정성을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들은 제주도에 있는 동안 《축구와 사회》라는 책도 썼고 대학교도 입학해 내년에 졸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아들이 지금은 동영상 웨딩촬영 일도 하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무기력하기만 했던 아들을 세상으로 나오게 해준 그 도반께 감사드리고 평생의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주 도반(가운데 )과 함께
▲ 제주 도반(가운데 )과 함께

효율이 아닌 수행의 관점으로

지금은 코로나로 인해 모든 법당의 법회며 모든 일이 온라인으로 전체가 돌아가서 회관을 특별하게 관리할 일이 많이 줄었습니다. 하지만 내년에 정토회 본관으로 이사하게 되면 관리할 일도 많아지고 건물 마감 전에 모든 시설물들을 익히고 공정을 파악하기 위해 하루에 2번씩 15층 건물을 부지런히 오르내리며 꼼꼼히 살피고 눈으로 하나하나 다 익히고 사진도 찍으면서 개원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효율성을 따지고 경제성을 따지는 세상의 눈으로 정토회를 이해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많은 사람이 큰마음을 내어 정토회에 들어왔다가 결국, 지쳐서 떠나는 모습도 많이 봤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세상의 눈으로 정토회 일을 하다 보니 불평도 많이 생겼고 실무 봉사자들과 많이 부딪혀 큰소리를 냈던 적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과정 하나하나가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두 수행의 과정이고 완벽하진 않지만 이만큼 가는 것도 완성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기에 지금까지 붙어있는 것만도 큰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정토회에 있지 않았더라면 저의 못된 성질과 아이의 문제로 인해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정토회에 오래 있다 보니 함께 부대끼고 부딪혔던 분들이 어느새 법사님들이 되어 수행공동체를 이끌고 있습니다. 저는 정토회 도반들의 과잉(?)보호 속에 수행이 덜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내년에 또 한 번의 불사로 두 번째 100일 법문을 들을 수 있습니다. 더 많은 분들이 스님 법문을 듣고 저 같은 행운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오택 님의 이야기를 통해 정토회의 역사를 들을 수 있어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무심코 스쳤던 많은 과정이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손길로 준비되고 완성되었다는 것을 다시금 새겼습니다. 집에 앉아서 손가락만 까닥하면서 온라인 화상회의 등으로 바빠했던 제 모습이 아주 부끄러워졌습니다. 내년 또 한 번의 100일 법문이 많은 이들에게 행운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글_박문구 희망리포터 ( 서초법당 서초 정토회 )
편집_임도영 ( 광주전라지부 )

전체댓글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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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블리

굉장히 감동적입니다.
거사님의 이야기는 큰 울림을 주네요.
제주도에 사는 도반도 참 훌륭하십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21-01-04 11:15:22

유주영

오택 거사님의 수행담 잘 읽었습니다. 공감이 되고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나네요. 수고에 감사합니다.

2021-01-04 02:53:05

이순애

오택거사님 감사합니다.
운전실에 앉아 일할 때를 휴식시간으로 느낄 정도였다는 부분에서는 혼자서 웃다가
또 눈물도 맺히곤 했습니다.
거사님께서 해 오신 봉사와 수행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2020-12-17 11:3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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