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흥륭사 ► 상경용천부 ► 요전자 24개석 ► 강동 24개석 ► 동모산
2016.8.17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5일째 "발해 그리고 백두산"


 

안녕하세요?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5일째가 되었습니다. 오늘 스님은 청년 150명과 함께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와 동모산을 비롯해 요전자 24개석과 강동 24개석을 둘러본 후 이도백하에 도착해 백두산에 대해 강연했습니다.  

 

새벽 3시 20분. 오늘은 가야할 길이 멀기에 아주 이른 새벽에 일어나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연길 새벽시장에 들러 간단한 아침과 점심에 먹을 음식들을 사서 흑룡강성 목단강시 영안에 있는 상경용천부 성터를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저녁 강의까지 꽉 채워 움직이는 힘든 스케쥴 중에도 스님은 이동시간을 활용하여 즉문즉설을 했습니다. 이동하는 3시간 동안 청년들은 역사기행을 하며 궁금했던 점에 대해 많은 질문을 스님에게 했습니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한 청년이 “아버지는 독립운동가인데 아들은 친일을 한 것을 어떻게 보시는지?”라고 질문한 내용입니다. 스님은 청년에게 선택에 대한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독립운동이 아버지를 행복하고 당당하게 했다면 그건 아버지의 선택이고, 아들이 살기 위해 친일을 했다면 그것 또한 아들의 선택입니다. 어떤 일이 나를 행복하고 당당하게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더 나아간다면 어떤 일이 내가 살아가고 있는 공동체가 함께 행복할 수 있도록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무엇을 선택하든 그 사람의 인생이고 내가 선택한 내 인생이에요. 다만 남을 괴롭힐 권리는 없습니다. 그것을 제외한 다른 선택은 본인의 선택입니다.”

 

스님의 답변에 청년들은 스스로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즉문즉설을 재미있게 듣다 보니 어느덧 3시간이 훌쩍 지나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에 도착했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빼곡히 일렬로 늘어선 백양나무였습니다. 스님은 백양나무를 가리키며 “저것이 상경용천부의 외성입니다. 성벽 위에 나무가 빼곡이 심어져 있는 거예요”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 상경용천부의 외성

 

상경용천부 외성 안으로 들어온 후 가장 먼저 ‘흥륭사’라는 절에 도착했습니다. 흥륭사는 발해 시대 때 세워진 절인데 불상과 석등은 발해 시대 것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입니다. 

 

발해 시대의 대불을 참배한 후 다같이 예불을 올렸습니다. 예불을 마친 스님은 발해 멸망 후 1100여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선조들을 찾아와 죄송하다고 하면서 함께 찾아온 청년들이 동북아 역사기행을 무사히 잘 마치고 남북의 평화적인 통일에 기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발원해 주었습니다. 청년들은 함께 예불을 올리고 스님의 발원문을 들으며 하나된 마음을 느꼈다며 가슴 뭉클해 했습니다. 

 


▲ 흥륭사 발해 시대의 대불

 

법당을 나온 대중들은 발해의 가장 대표적인 유물인 ‘석등’을 배경으로 스님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석등은 국사 교과서에도 자주 나와서 다들 기억이 나실 겁니다. 

 


 

상경성 박물관으로 이동해서는 발해의 영토와 역대 왕들, 상경용천부가 복원된 모형 구조물을 보면서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스님으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발해의 3대 문왕은 57년간 왕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57년간 왕을 하니까 아들이 먼저 죽어 버린거에요. 아들이 먼저 죽으니까 왕위 계승권이 작은 아들과 손자에게 나뉘어져서 왕권의 혼란이 한동안 지속되다가 10대 왕에 와서야 발해는 다시 정비가 됩니다. 그래서 4대부터 9대까지 합해봐야 20여 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왕위에 올라도 1년 만에 죽고, 그 다음왕도 1~2년 안에 죽었으며 불안정한 상태가 지속되었던 거죠. 

 


 

그래서 한 사람이 오래 권력을 잡고 있는 것은 좋은 게 아닙니다. 오래 권력을 잡고 있으면 본인 시절에는 괜찮으나 그 이후에 혼란이 오게 됩니다. 일종의 절대주의가 형성되어서 자립성이 사라지게 되고 나중에는 어려움에 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이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후계자를 얼마나 잘 두느냐와 같은 계속성이 매우 중요합니다.

 

장안성과 상경용천부를 비교하면 크기가 거의 비슷합니다. 상경용천부가 약간 작죠. 천하제일 장안성과 규모가 거의 비슷하다는 것은 상경용천부가 그만큼 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깥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외성이고, 중앙을 관통하는 도로가 주작대로입니다. 방금 우리는 주작대로를 통해 들어왔습니다. 도로가 이렇게 체계적으로 나 있는 것을 보면 이 성은 계획도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상경용천부의 평면도

 

외성 안에 다시 내성이 있고, 내성 안에 궁성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3중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의 특이점은 뒤쪽이 툭 튀어나와 있습니다. 맨 뒤쪽 벽은 궁성의 성벽이면서 내성의 성벽이기도 한데, 또 외성의 성벽과는 일직선 상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3개의 성벽을 다 합쳐버리면 뒤쪽에서 공격받기가 쉽습니다. 때문에 내성과 궁성을 보호하기 위해 뒤쪽으로 외성을 더 빼내어 방어를 했던 것입니다. 

 

궁성 안은 또 셋으로 나뉘어서 가운데는 중궁, 오른쪽은 동궁, 왼쪽은 서궁입니다. 서궁은 왕의 가족들이 주로 사는 곳이고, 동궁은 태자의 궁, 즉 다음 왕이 될 사람이 사는 곳입니다. 옛날에는 절대 왕이라고 하더라도 항상 다음 왕이 될 사람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동궁 옆에는 어화원이라는 정원이 있었습니다.”

 

스님의 설명과 모형 구조물만 봐도 이 성이 얼마나 큰 규모였는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고구려의 성만 하더라도 이 정도 규모는 아닌데, 발해의 성에서는 정말 대륙의 기상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박물관을 나온 스님과 청년들은 이제 걸어서 궁성 안을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먼저 동궁 옆에 마련한 정원인 어화원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 어화원으로 들어가는 입구

 

“이 연못이 어화원입니다. 연못을 사람 얼굴처럼 만들어 놨습니다. 가만히 보시면 언덕으로 두 눈을 만들고, 구름다리로 안경을 씌우고, 코를 그리고, 얼굴 밖에는 양쪽 귀가 언덕 모양으로 있습니다. 현재는 두 눈과 두 귀는 있는데 코는 누가 베어 먹었는지 없어요.(모두 웃음) 다만 코는 크기가 작고 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무너졌다고 추측됩니다.” 

 

스님 설명처럼 정말로 언덕 모양으로 생긴 두 눈과 두 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얼굴 모양의 연못을 만든 발해인들의 재치에 웃음이 나왔습니다. 

 

어화원을 지나 곧바로 동궁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성벽들이 허물어지지 않고 남아 있어 이곳이 궁성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성벽이 왜 이렇게 오래도록 잘 남아있을 수 있었는지 그 비결을 설명했습니다. 

 


 

“여기 성벽은 다 돌로 쌓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대부분이 남아있게 된 겁니다. 그러면 이 돌을 어디서 가져왔느냐 하면 이 일대가 전부 현무암인데 이곳 가까이에서 파낸 겁니다. 그리고 그 돌을 파낸 자리에 물이 고인 것이 현무호입니다.”

 

동궁을 지나 드디어 중궁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청년 역사기행단은 궁성의 맨 뒤쪽에 위치한 북쪽 성문 앞까지 계속 걸었습니다. 다리가 아플 정도로 한참을 걸었어야 했으니 성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북쪽 성문에서는 잠시 휴식을 취하며 땀을 식혔습니다. 스님은 ‘황성 옛터’라는 노래와 ‘발해를 꿈꾸며’라는 노래를 아는지 청년들에게 물어본 후 함께 불러보자고 제안했습니다. ‘황성 옛터’ 노래는 최고령 참가자인 최광수 교수님과 중국 가이드님이 멋들어지게 불러주었습니다. ‘발해를 꿈꾸며’ 노래는 노래 부르는 것을 다들 어려워해서 mp3 음악을 틀어서 함께 불러 보았습니다. 

 


 

두 곡 모두 딱 이 장소에서 부르면 알맞은 노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사가 너무나 가슴에 다가왔습니다. 노래를 부르고 나니 말을 타고 대륙을 경영했던 발해인들의 기상이 더욱더 가까이 느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대중들은 북쪽 성문에서 궁성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제1궁전, 2궁전, 3궁전, 4궁전, 5궁전, 오봉루가 차레대로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스님은 차례대로 각각의 건물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저 멀리 첫 번째로 보이는 터는 2층 건물이 있었고 제1궁전이라고 이름이 붙여져 있습니다. 제1궁전은 마당이 제일 넓습니다. 아마 병사들을 모아 행사를 하는 곳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2층 건물은 제2궁전인데, 이것이 가장 큰 건물입니다. 이곳은 궁전 안에서 어전 회의를 하는 등의 일을 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건물은 제3궁전인데, 이 궁전은 건물이 작습니다. 임금의 개인적인 업무, 즉 집무실의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 뒤에 제4궁전이라고 명명된 것은 기단이 아주 낮습니다. 그리고 1층입니다. 저 궁전은 온돌이 발견되어서 임금의 침전이라고 추측되고 있습니다. 

 

▲ 뒤로 갈수록 한 계단씩 높게 쌓은 5궁전, 4궁전, 3궁전, 2궁전, 1궁전의 모습

 

그리고 제일 마지막 건물은 제5궁전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저 건물은 주로 왕이 외국 사신이나 대신들을 데리고 연회를 하는 곳, 즉 누각이라고 추측되는데 그 이유는 아래층에 주춧돌이 촘촘하게 박혀있기 때문입니다. 아래층은 쓰지 않고 위층을 사용했던 누각이 아니었나 추정됩니다. 이 누각에는 외부 손님이 올 수 있기 때문에 궁전하고 누각 사이에는 담장이 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누각 뒤에도 담장이 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쭉 뒤로 나가면 궁성벽이 나옵니다. 궁성벽에는 나가는 문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문 앞에 서 있는 거예요. 그리고 궁성의 각 모서리 위에는 각루가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오봉루부터 1궁전, 2궁전, 3궁전, 4궁전, 5궁전까지 기단이 한 계단씩 낮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보면 건물들이 한 계단씩 높아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스님의 설명처럼 북쪽 성문에서 궁성 쪽을 바라보니 정말로 한 계단씩 건물의 기단이 높아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청년들은 그 시대에 이러한 설계를 할 수 있었다는 것에 감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드넓은 성터를 보며 이 땅이 잘 지켜졌다면 좋았겠다며 아쉬움을 나누었습니다.

 

북쪽 성문을 출발하여 5궁전, 4궁전, 3궁전을 지나 2궁전에 도착했습니다. 2궁전 계단에 올라서서는 스님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석축 앞에 예쁜 꽃들이 가득 피어 있어 사진 찍기에 더욱 안성맞춤이었습니다. 

 


▲ 2궁전 위에서 펄쩍 뛰고 있는 청년들

 

그리고 1궁전은 발해 시대 당시에 쌓았던 돌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옛스러운 멋을 더했습니다. 기단 위에는 건물을 세웠던 석축들도 남아 있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 발해시대 돌이 그대로 남아 있는 제1궁전

 

마지막으로 1궁전에서 오봉루로 이어지는 회랑으로 발걸음을 옮겨 보았습니다. 회랑이 얼마나 컸는지 그 크기에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 회랑

 

“이곳은 회랑이에요. 폭이 엄청나게 넓죠? 웬만큼 큰 대웅전보다도 회랑의 폭이 훨씬 더 큽니다. 회랑이 보통은 한 줄인데 이곳은 세 줄입니다. 가운데는 왕이 다니고, 양쪽에 나머지 사람들이 다니게 세 줄로 나뉘어 있습니다.

 

회랑의 중앙으로 다니는 것이 편하다면 전생에 왕족이었을 것이고, 가장자리로 다니는 것이 편하다면 전생에 신하였을 것이고, 노비라면 회랑 밖으로 걷는 것이 편할 거예요. 눈을 감고 한번 걸어보세요.” 

 

스님의 위트 있는 이야기에 모두가 한바탕 웃었습니다. 어떤 친구는 “난 신하인 것 같아”라고 하며 가장 자리로 걸었고, 어떤 친구는 “난 노비인 것 같아”라며 회랑 밖으로 걸었습니다. 

 

드디어 오봉루에 도착했습니다. 오봉루 위에 오른 스님은 성터 앞으로 직선으로 펼쳐진 주작대로를 가리켰습니다. 

 


 

"여기 서서 한번 보세요. 이렇게 앞으로 직선으로 주욱 펼쳐진 것이 주작대로입니다."

 

그리고 오봉루에서 스님은 재미난 사실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 오봉루

 

“궁성의 입구에 있는 이 건물이 오봉루입니다. 오봉루의 핵심은 정면에 문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 양쪽에 문이 있습니다. 보통은 정면에 문을 만들고 그 앞에 옹성을 쌓아서 성문을 방어하는데 이곳의 특징은 정면에 문이 없고 양쪽으로 문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각은 2층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양쪽에 통로를 두고, 가운데에 누각을 만들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오봉루의 좌우에 나 있는 문입니다. 문 밑에는 반드시 문돌이 있고 밑에 바닥에는 돌이 깔려있는데 이유는 적이 문 밑으로 흙을 파고 들어올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 돌에 바퀴자국이 없습니다. 상경용천부를 수도로 162년 동안 사용했으면 바퀴자국이 있어야 하는데 없다는 것은 그곳으로는 마차가 다니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서궁이나 동궁에 난 문으로 다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스님의 설명에 청년들도 모두 공감을 하며 신기해했습니다. 

 

오봉루 앞에서는 단체사진을 찍었습니다. 가지런하게 잘 쌓인 발해 시대의 석축 앞에서 청년들은 발해인들의 웅대한 기상을 다시 한번 꿈꾸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 오봉루 앞에서 단체사진

 

입구에는 넓은 솔숲이 있었는데 돗자리를 펴고 점심 도시락을 먹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연길 새벽시장에서 사온 음식들을 나눠 먹으며 상경용천부 성터를 둘러본 소감을 정겹게 나누었습니다. 

 


▲ 점심식사 시간

 

상경용천부 관람을 모두 마치고 성터를 나가는 길에는 이곳에 성을 쌓기 위해 돌을 캐내오느라 생겼다고 하는 호수 ‘현무호’를 볼 수 있었습니다. 외성 바깥으로 커다란 호수가 자리한 모습에 청년들은 또 한 번 감탄했습니다. 

 


▲ 현무호

 

현무호를 지나자 목단강이 나타났습니다. 목단강을 건너기 위해 다리를 지날즈음 스님은 저 멀리 강이 굽이쳐 흘러가는 지점 가리키며 “저기에 칠공교가 놓였던 기둥 7개가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칠공교는 거란족과 발해가 서로 교류했던 길인 ‘거란로’와 연결되는 다리입니다. 

 


▲ 저 멀리 목단강이 굽이치는 곳이 칠공교

 

그런데 아무리 유심히 살펴봐도 칠공교의 기둥 7개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또 몇몇 청년들은 보인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칠공교 유적이 버스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진 까닭입니다. 그러자 스님은 “그럴 때는 얼핏 보았다고 말하는 거야”라고 해서 청년들도 한바탕 웃었습니다. 

 

상경용천부에서 돈화로 이동하는 길에는 요전자 24개석과 강동 24개석을 차례대로 보았습니다. 24개석은 돌 24개가 나란히 놓여 있는 유적물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오직 발해 시대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유물입니다. 

 

24개석의 용도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여러 가지 견해가 제기되었지만 아직 뚜렷하게 검증된 것은 없다고 합니다. 왕의 시신을 이동하는 중 잠시 얹어두는 용도일 것이다, 식량을 보관하는 목조건물이었을 것이다, 말을 타고 가다가 잠시 쉬어가는 역참이었을 것이다, 발해의 발전 과정을 기념하는 건물이었을 것이다 등 여러가지 가설만이 있다는 스님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요전자 24개석은 사람 키보다 큰 옥수수밭 사이에 수풀이 무성하게 뒤덮여 있었습니다.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며 24개석 중 한 개의 돌에 손을 가볍게 대어보는 것에 만족하고 옥수수밭을 다시 나왔습니다. 

 


▲ 요전자 24개석

 

강동 24개석은 돈화 시내 한 가운데에 철장으로 둘러쳐져 보호되고 있었습니다. 청년들은 철장에 손을 얹고 과연 이것은 어떤 용도로 쓰였을까 다시 한번 의문을 가진 채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 강동 24개석

 

이제 청년 역사기행단은 돈화시 중심을 벗어나 동모산으로 향했습니다. 동모산으로 향하는 길에는 발해역사를 연구하는 데에 획기적인 역할을 한 정혜공주묘가 발굴된 육정산을 먼 발치서 잠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 육정산

 

“저기 보이는 산이 육정산입니다. 하나, 둘, 셋.... 여섯. 봉우리가 여섯 개입니다. 그래서 육정산이라고 하는 겁니다. 저기서 3대 문왕의 둘째딸인 정혜공주묘가 발굴되었습니다. 그동안 발해의 역사는 신당서, 구당서 등 남의 나라의 역사서에서만 언급되었지 발해인들의 손으로 쓴 기록이 없었거든요. 처음으로 발해인들이 쓴 기록이 발굴된 것이 정혜공주묘입니다.” 

 

스님의 설명을 들으니 가까이 가보고 싶었지만, 역시 현재는 중국 정부로부터 접근이 금지되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드디어 오늘의 마지막 여정인 동모산에 도착했습니다. 동모산은 고구려 유민이 된 대조영이 유배지를 탈출하여 먼 길을 달려와 새롭게 나라를 세웠던 발해의 첫 수도입니다. 

 

멀리서 바라본 동모산은 삿갓을 없어놓은 형태의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처음 이 산을 보았을 때 규모가 너무 작은 게 아닌가 생각했으나 처음 나라를 세울 때는 2천 여 명이 시작을 했기 때문에 이 정도 규모였을 수 있겠다고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는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규모가 너무 작지 않나 싶었는데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공감이 갔습니다. 

 


▲ 동모산

 

스님은 동모산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성벽이 어떻게 산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지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성벽 가까이에 가보면 정말 좋겠지만, 역시 중국 정부로부터 접근이 금지되어 있어 먼 발치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모산을 끝으로 오늘의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이제 청년 역사기행단은 백두산 등정을 위해 이도백하로 향했습니다. 이동시간을 틈타 스님은 즉문즉설을 해주었습니다. 약 2시간이 넘는 동안 많은 질문들이 쏟아졌습니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오늘 우리가 본 옛 성터들을 우리가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을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 버스 안 즉문즉설 시간

 

“오늘 상경용천부를 보면서 가슴이 벅차는 걸 많이 느꼈고, 발해가 우리의 옛 선조들이었음에 자부심도 느껴졌습니다. 다만 발해의 옛 성터가 러시아와 중국에 나뉘어 분포되어있는데, 현실적으로 우리가 옛 성터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스님은 한마디로 딱 잘라 말했습니다. 

 

“없습니다.” 

 

버스 안 청년들도 스님의 한마디 답변에 큰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이어서 스님이 보충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한 100년, 200년, 300년 지나서 우리가 만주 땅을 다시 차지할 그런 역사적인 변화가 온다면 모를까, 현재로서는 과거가 어떻든 현재의 국경을 우리가 존중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말할 수 있어요. 옛날 것을 따지면서 서로 차지하려고 하면 분쟁이 끝이 없죠.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보호하고 보살피는 일은 할 수가 있겠죠. 특히 러시아에 있는 유적은 충분히 보호하고 보살필 수가 있어요. 러시아가 지금 재정적으로 어려우니 재정 지원을 하면 공동발굴을 할 수가 있을 겁니다. 공동발굴을 하면 좋은데, 지금은 일부 학술단체 또는 대학에서 조금씩만 참여하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러시아의 경우 극동 지역 변방에 있었던 발해의 유물을 그렇게 중요시 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면 러시아에 있는 유적들은 충분히 보호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좀 어렵다고 봅니다. 중국은 자신들이 일단 경제력이 있고, 이것은 앞으로 역사 분쟁의 소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철저하게 한국인뿐만 아니라 조선족 학자마저도 발굴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고 한국에 와서 발표하는 것도 다 조사해서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으면 바로 조사하고 그래요. 어쨌든 중국은 정치 문제 만큼은 굉장히 민감하게 대응을 하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따로 무슨 방법이 없습니다.”

 

 

바쁜 일정에 버스로 이동하면서까지 많은 이야기와 설명을 들려주는 스님의 열정에 청년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뜨겁게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백두산 산록 깊숙이 들어와서 드디어 이도백하에 도착했습니다. 해가 지고 보름달이 휘영청 떠서 그 아름다움에 모두가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 백두산 자락에서 본 보름달

 

저녁 식사를 한 후 곧이어 스님의 강연이 시작됐습니다. 스님은 백두산은 어떻게 형성된 산인지 인문 지리적인 측면에서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특히 백두산 천지의 국경이 지금처럼 정해지게 된 것과 관련해 김일성이 중국에 백두산을 팔아먹은 게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사실은 어떠했는지 이야기해 준 부분이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백두산은 북한과 중국이 국경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백두산 정계비에는 ‘압록강과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당연히 청나라에서는 ‘토문강은 두만강이다’ 이렇게 해석하고 우리는 ‘토문강은 송화강을 지칭하는 거다’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면 두만강이냐 송화강이냐에 따라서 엄청나게 큰 면적이 이쪽 땅이 되느냐 저쪽 땅이 되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청나라 말기에는 이 문제로 분쟁이 되었으나 해결이 안 됐어요. 그러다가 간도 협약을 통해 일본은 청나라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만주에 철도부설권을 갖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와 협의해서 끝난 게 아니고 일본과 협의해서 끝났습니다.

 


 

그리고 그 협약의 효력도 ‘이제 백년이 넘었으니까 끝났다’ 이렇게 말하는데 그러면 누가 옳은 것인가? 우선 두만강하면 발음이 ‘토문강’ 과 비슷하죠. 사실이 어떤지 그건 이제 더 확인을 해야지 무조건 막 팔아먹었다 이렇게 얘기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김일성이 중국에 천지를 팔아먹었다’ 이것도 옳지 않습니다. 자, 이제 지도를 한번 보세요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해석하면 경계가 이렇게 그어집니다. 남쪽 아래에 있는 관면봉에 4호 경계비가 있습니다. 그리고 두만강 원류를 따라 딱 올라오면 동북쪽에 6호 경계비가 있습니다. 이 둘을 이렇게 일직선상으로 그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그어버리면 천지가 다 북한 밖으로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천지는 우리 민족의 성지이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북한과 중국 사이에는 총격전까지 하는 분쟁이 생겼어요.

 

그래서 중국이 양보를 했는지 어쨌는지 이렇게 나눴습니다. 관면봉에서 시작해서 북쪽으로 더 가면 5호 경계비가 있습니다. 5호 경계비에서 6호 경계비를 가로지르도록 이렇게 경계선을 그은 거예요. 그러니까 천지가 조금 더 북한에 많이 들어왔어요. 이렇게 보면 이것은 천지를 찾은 것에 들어가죠. 물론 우리가 천지를 다 차지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요. 그러나 두만강이라고 해석한다면 천지를 차지하기 위해서 북한은 아주 강경하게 나온 것이고, 오히려 중국이 양보를 했다고 볼 수 있어요.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해서 지금은 천지의 절반을 북한에서 관장하고 있습니다. 

 


 

북한과 중국이 이 협상을 할 때는 두 가지가 쟁점이었습니다. 하나는 천지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 하는 문제이고, 두 번째는 압록강과 두만강은 강이 크다 보니까 강 사이에 섬이 있는데 이 섬은 어느 나라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일반적인 룰은 강의 수심이 가장 깊은 것을 기준으로 국경을 긋습니다. 

 

그런데 북중 관계에서는 ‘압록강과 두만강 사이에 있는 모든 섬은 다 북한 땅으로 한다’ 이렇게 합의를 봤어요. 특히 황금평 이런 곳은 중국과의 사이에는 개울 하나 정도 밖에 안 떨어져 있고, 북한과의 사이에는 압록강 본류가 흐르니까 중국 쪽에서는 이 땅을 자기들이 돈을 주고 장기임대해서 개발하겠다고 한 것이 황금평 개발입니다. 그래서 섬이라고 볼만한 큰 섬들은 비록 중국 쪽에 더 가까워도 다 북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김일성과 주은래 양 수상이 담판을 지어서 협의를 했는데, 나중에 주은래 수상이 홍위병들에게 엄청나게 비판을 받았다고 합니다. 북한에 땅을 팔아 넘겨줬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는데 조선 사람들의 혁혁한 공로가 있었습니다. 이유는 모택동 부대 안에 있는 동북항일연군의 구성원 중에 조선 사람이 엄청나게 참여해서 투쟁을 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조국 광복을 위해서, 한편으로는 중국 공산당이 승리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공로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족 자치주가 생길 수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김일성이 압록강, 두만강, 백두산 천지를 팔아 먹었다고 얘기하는 건 사실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청년들은 북한과 중국의 국경 분쟁이라는 주제가 무척 흥미로웠는지 이후 나누기에도 이 얘기에 대한 소감이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오늘의 강의 덕분에 청년들은 내일 백두산에서 더 많은 것들을 배우고 느낄 것입니다.

 

내일은 백두산 천지에 올라 그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날입니다. 소천지, 녹연담, 지하삼림을 차례로 본 후 백두산을 내려와서는 발해시대의 탑이 있는 장백까지 이동할 예정입니다. 

 

※ 동북아 역사기행 기간 동안 발행되는 글은 참가자들의 도움으로 작성됩니다. 오늘 글의 스케치는 <박이연>님이, 강연 정리는 <박진웅>님이, 사진촬영은 <권성준>님이 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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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의 통일을 발원하면서 러시아 연해주의 독립운동 성지 '신한촌'의 역사 회복과 재건을 위한 대중 여러분들의 후원금을 받습니다. 소정의 기금 출연으로 역사 회복에 동행하는 마음과 정성을 함께 모아 주시기 바랍니다.

 

- 계좌번호 : 국민은행 578601-01-272869

- 예금주 : (사)좋은벗들 

전체댓글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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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선

동모산에서 중국공안이 막는걸 보면서 역사유적지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지 실감되더군요..우리나라와 대비되는~
소식 전해주셔서 복습하는데 도움이 많이되네요^^
감사합니다!!

2016-08-20 18:16:42

이수정

아! 발해의 역사라니! 스님의 이런 자세한 설명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그랬던것처럼 발해는 그저 우리 선조가 세운 우리나라 였다더라..에 그쳐있었을 것입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함께하시는 청년여러분들도 감사합니다
스님과 함께하시는 청년여러분 힘내세요!♥

2016-08-20 08:22:10

김광철

좋은벗들, 정토회, 통일의병,
해외봉사 등에 참여하는 방법을
알고 십습니다.

2016-08-20 00:2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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