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백두산 천지 ► 비룡폭포 ► 소천지 ► 녹연담 ► 지하삼림 ► 장백
2016.8.18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6일째 "백두산 천지 그리고 북한 난민"


 

안녕하세요? 오늘은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6일째 날로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날입니다. 민족의 성산이자 정신이 담겨있는 백두산과 천지를 직접 보고 느낀다는 것은 한국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경험일 것입니다. 오늘 대한민국 청년 150여 명은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여정을 가졌습니다. 

 

백두산 천지로 가능 방향은 동,서,남,북이 있는데 청년 역사기행단은 중국쪽 국경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천문봉이 있는 북쪽으로 올랐습니다. 

 

4시 20분에 기상하여 5시에 백두산 천지로 향했습니다. 매표소가 개장하는 것은 6시이지만 5시 10분에 매표소에 도착해 기다렸습니다. 중국인 관광객이 워낙 많아서 미리 줄 서지 않으면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매표소 앞엔 이미 많은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 백두산 천지 매표소. 산문.

 

백두산 천지를 가기 위해서는 미리 줄만 선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빠른 동작도 필요한데요. 왜냐하면 대기선에서 표를 발권하는 곳까지 50m 정도 뛰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백화점 세일 첫날 뛰어가는 모습이라고 할까요? 청년들은 이런 모습을 색다르고 재미있어 하며 열심히 뛰었습니다.

 

발권 후 두 번 버스를 갈아타야 했습니다. 마을버스 크기의 버스를 타고 중간지점까지 간 후 다시 10인승 버스로 갈아타면 백두산 천지 앞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 정상 부분이 백두산 천지

 

길이 잘 포장되어 있고, 운전기사들의 곡예에 가까운 운전 실력으로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산이지만 짧은 시간에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 매표소에서 백두산 천지까지 올라가는 길

 

백두산 정상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많은 관광객들로 북적였습니다. 7,8월은 장마철이어서 백두산 천지를 볼 수 있는 확률이 20%정도밖에 안 된다고 하는데요, 그만큼 시시각각 날씨 변화가 심합니다. 청년 역사기행단이 정상에 도착했을 때는 구름이 많이 있긴 했지만 다행히 천지는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 백두산 천지

 

스님은 천지 주위의 높은 봉우리들을 가리키며 대략적인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저기 보이는 오른쪽 능선이 서편입니다. 녹색 풀이 많이 자라 있죠. 서편에 5호 경계비가 있어요. 왼편에 툭 튀어나와 있는 부분 뒤쪽이 가장 높은 봉우리인 장군봉입니다. 높이가 2750미터입니다. 장군봉 주위에 높은 봉우리들은 모두 2700미터가 넘는 것들입니다. 저기 보시면 장군봉 왼쪽에서는 천지까지 내려오는 길이 있죠. 장군봉에서 북쪽으로 더 가면 6호 경계비가 있어요. 저쪽 서편에 있는 5호 경계비에서 이쪽에 장군봉 다음에 있는 6호 경계비까지 직선을 딱 그으면 그것이 국경선이예요. 호수의 5분의 3이 북한 것이고, 5분의 2가 중국 것입니다. 

 

바로 앞에 보이는 호수의 길쭉한 면의 끝이 남편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의 정반대편이죠. 남문으로 올라오면 저쪽 끝으로 올라오게 돼요. 

 

그래도 이 정도면 오늘은 잘 보이는 편이에요. 구름까지 있어서 더 좋네요. 해가 비치면 호수 위가 더 푸르게 보여요.”

 

스님의 설명을 들으며 천지 주위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면서 천지를 마음으로 담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스님은 천지를 배경으로 조별로 사진을 찍어 주었습니다. 모두들 감동의 순간을 사진으로 담느라 다소 흥분된 마음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천지에서 내려온 후 비룡폭포로 향했습니다.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부터 저 멀리서 비룡폭포가 떨어지는 웅장한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가까이 가서 직접 보면 얼마나 더 웅장한 느낌일까 기대가 되었습니다. 

 


▲ 비룡폭포

 

비룡폭포 앞에 도착한 스님은 청년 역사기행단 150여 명을 위해 개인별로도 사진을 모두 찍어주었습니다. 청년들은 평생 동안 길이 길이 남을 스님과의 개인 사진 촬영 시간이 주어지자 무척 기뻐했습니다. 

 


 

150여 명과의 개인 사진 촬영을 모두 마치고 스님은 잠시 비룡폭포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오늘 백두산 천지 잘 보셨죠?”

 

“네.”

 

“천지에서 이 골짜기로 물이 나오는 입구를 ‘달문’이라 합니다. 달문에서 폭포까지 거리가 1250미터입니다. 1250미터를 이렇게 급경사로 흘러요. 하얀 비단포를 깔아 놓은 것 같다고 합니다. 이것을 ‘승사하’라고 불러요. 그래서 폭포 위에 있는 저 바위에서 물이 두 개로 갈라져서 떨어집니다. 폭포의 높이가 68미터예요. 폭포에서 떨어진 다음에 흘러가는 이 물은 ‘이도백하’라고 그래요 

 

이 물은 이렇게 내려가다가 좀 더 내려가면 강이 없어져버립니다. 어디로 갔느냐. 용암이 굳으면서 땅이 갈라지는데 갈라진 틈 속으로 물이 다 들어가 버립니다. 위에서 보면 강이 없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또 내려가다 보면 넓은 강이 되었다가 다시 땅 속으로 들어갔다 그럽니다. 어떤 곳은 또 갈라진 바위 속에서 폭포가 되는 것도 있습니다. 

 


 

이 물은 1년 내내 수량에 큰 변화가 없습니다. 왜냐면 천지의 물은 지하수가 60퍼센트이고 빗물이 30퍼센트이니까 비가 쏟아지면 물이 조금 불어나기는 합니다만 큰 차이 없이 늘 이 양은 계속 흘러내립니다. 

 

그리고 이 주위는 지금도 계속 무너져 내립니다. 겨울에 얼었다가 봄에 녹을 때 많이 무너져 내리고, 비가 올 때 계속 무너져 내립니다.”

 

스님의 설명이 끝날 무렵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천지를 모두 보고 내려온 터라 청년들은 비를 맞으면서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소천지로 향했습니다. 

 


 

원래 소천지까지 가는 버스가 있지만 청년들은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내려가기로 했습니다. 백두산의 원시림 속을 즐겁게 걷고 있는데 스님이 “노래를 한번 불러볼까” 운을 띄웠습니다. 청년들은 환호로 응답하며 ‘백두산으로 찾아가자’, ‘고향의봄’, ‘옹달샘’, ‘터’ 등 다양한 노래를 즐겁게 불렀습니다. 마치 소풍을 나온 듯한 정겨운 시간이 펼쳐졌습니다. 

 

소천지는 정말 맑고 투명한 호수였습니다. 잠시 쉬어가며 호수를 편안히 바라보며 감상을 한 후 녹연담으로 향했습니다. 

 


▲ 소천지

 

녹연담은 작은 폭포가 흘러내리는 연못에 녹색 에메랄드빛이 가득했습니다. 어쩜 이렇게 아름다운 빛깔이 나는 것인지 정말 신기할 따름이었습니다. 

 


▲ 녹연담

 

마지막으로 지하삼림으로 향했습니다. 지하삼림에 도착했을 때는 몇몇 청년들이 다리가 아프다며 휴식을 원하기도 했습니다. 몇 명이 휴식을 취하는 사이 나머지 청년들은 스님과 함께 30분 남짓 원시림 속을 더 걸어 지하삼림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 자라는 나무들은 뿌리가 깊게 뻗지 못하고 옆으로만 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나무들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뿌리채 뽑혀 쓰러져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이유는 땅이 현무암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 뿌리채 뽑혀 쓰러진 나무

 

지하삼림에 가장 먼저 도착한 스님은 지하삼림이 무엇인지 간단히 설명했습니다. 

 


▲ 지하삼림

 

“여기가 지하삼림입니다. 백두산이 분화하면서 생긴 거대한 계곡에 형성된 울창한 숲이예요. 계곡이 함몰된 곳에 숲이 형성된 것인데, 여기 절벽에서 보면 마치 땅 아래에 숲이 있는 것 같죠. 땅이 푹 꺼진 곳에서 나무들이 자라고 있어서 지하삼림이라고 해요. 김홍신 작가님이 소설 ‘대발해’를 상당 부분 써놓고 나서 역사기행을 왔었는데, 여기서 이 지하산림을 보고 발해 군사들이 여기 지하산림에서 훈련하는 내용을 덧붙였다고 해요.” 

 

정말로 넓은 면적이 땅으로 푹 꺼진 모습에 모두들 놀라워했습니다. 지하삼림 관람을 끝으로 오전의 빡빡했던 일정을 뒤로 하고 오후 2시에 백두산을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늦은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이도백하까지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는 백두산의 정기를 받은 청년들이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신나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차량별로 ‘백두산’ 노래를 돌아가며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백두산으로 찾아가자! 우리들의 백두산으로! 

 신선한 겨레의 숨소리 살아 뛰는 백두산으로 ♬

 만주벌판 말을 달리던 전사들의 투쟁의 고향! 

 동해에서 서해에서 남도의 끝 제주도에서 ♬ 

 그 어디서 떠나도 한품에 넉넉히 안아줄 백두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버스 안은 순식간에 열기가 활활 타올랐습니다. 

 

점심 식사 후 이제 청년 역사기행단은 장백으로 출발했습니다. 백두산 남문 방향도 가려고 하였으나 현재 북중 관계의 악화로 인해 폐쇄된 상황이라 곧바로 장백으로 이동했습니다.  

 

4시간 정도 버스로 이동하는 거리였는데 스님은 청년들의 요청으로 역사기행 중 들었던 의문점에 대해 답해주는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여러 명이 질문했지만 그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한 명의 질문을 소개합니다. 

 

“저는 이 역사기행의 목적이 우리의 정체성을 키우기 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정체성이란 말이 모호하게 다가오고, 개인한테 정체성이 왜 중요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민족의 구분이란 게 모호하고 희미해졌잖아요. 민족 문화의 특성이나 개성도 많이 희석된 상태이고요. 그런 상태에서 민족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고, 또 나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 왜 역사가 중요한지도 궁금합니다. 그리고 저의 정체성을 키우기 위해 평소에 소중히 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도 궁금합니다.”

 

정체성을 왜 가져야 하는지 묻는 질문에 스님이 답변했습니다. 

 


 

“질문에 대해서 답을 하기가 참 그렇네요. 왜냐하면 ‘정체성을 찾을 이유가 뭐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면 정체성을 안 찾으면 되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나는 나의 정체성을 좀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 때는 제 이야기를 들어 보시면 되고요.  

 

예를 들어 어머니가 누구와 관계해서 나를 낳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아버지가 누군지 몰라 열등의식이 생기는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의 자존에 대한 흠결이 있다는 거예요. 이 때는 자기 정체성과 자기의 자존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한 겁니다. 

 

흑인의 경우 노예 해방이 되었다 하더라도 대부분 정체성에 굉장히 흠결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뿌리가 노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조상을 찾아가 보니까 원래 노예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흑인들은 아프리카 초원에서 자주적으로 살아간 자유인이었어요. 그런데 백인들에게 강제로 노예가 되는 바람에 노예 의식이 생기게 되었고, 그 후 4대, 5대에 걸쳐 내려간 후에는 태어나면서부터 노예가 되었던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노예의 후손이 아니라 자유인의 후예였다는 정체성을 찾게 된 겁니다. 

 

백인들의 사상에는 흑백을 구분해서 검은 것을 굉장히 부정하는 문화가 있어요. 흑인들은 백인이 세워놓은 그 가치관에 갇혀서 피부 색깔로 인해 열등의식이 생긴 거예요. 그런데 ‘검은 것이 좋은 것이다’, ‘검은 것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다’, ‘자연의 햇빛에 그을려서 검어진 것이지 그것이 열등해야 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이렇게 발상을 전환한 것은 획기적인 일이에요. 흰 것을 닮아가려는 발상이 아니라 검은 것 자체로 아름답다고 자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정체성, 자기 자존을 확보하는 길입니다.  

 

원래 우리 민족은 동북아 지역에서 가장 앞선 선진 문명을 이룩한 선조들의 후예였습니다. 이런 저런 사건으로 인해서 민족의 영토가 작아졌다고 해서 자존이 없어지는 건 아니란 말이에요. 청나라도 중국이 아니고, 원나라도 중국이 아니고, 요나라와 금나라도 중국이 아니예요. 이것은 마치 우리가 같은 민족인데 남북 간에 싸우듯이 이들은 모두 사촌 민족 간에 서로 다툰 것일 뿐입니다. 이들을 중국이라고 규정하니까 우리는 늘 중국의 침략을 받았고 중국에 비해 약소국이었다는 의식을 가지게 된 거예요.

 

거란족도 일어나서 중원을 재패하고, 우리보다 훨씬 후진국이었던 여진족도 일어나서 중원을 재패하고, 일본도 일어나서 만주와 중원을 재패했잖아요. 그것처럼 우리도 얼마든지 지금 이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로 나아갈 수 있고, 또 노력을 한다면 얼마든지 세계 문명에 앞장서는 나라를 만들 수 있고, 그런 국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게 됐을 때 여러분들이 자신감이 생긴다는 거예요. 그래야 일본과 중국에 대해서 피해의식을 갖고 웅크리고 있거나, 쓸데없는 자만을 가지고 시위를 하거나, 우리가 작은 나라니까 큰 나라의 협조를 얻어서 뭘 해야 한다는 사대주의적인 생각을 갖는 것을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이웃 나라들과 좋은 이웃으로서 어깨를 나란히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주한미군 문제도 자주적인 관점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미군이 자기들이 나가겠다고 하면 ‘그동안 많이 도와주어 고마웠다. 앞으로 우리 문제는 우리가 책임지고, 위기 시에만 서로 돕기로 하자’ 이렇게 하면 되고, 만약 한반도에 계속 주둔하겠다고 하면 ‘너희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있어라’ 이렇게 이야기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주둔비는 자기들이 부담하겠죠. 

 

서로 협력을 하되 우리가 불합리한 것에 대해서는 거절할 줄 알아야하고, 자주성을 해치는 것에 대해서는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이 있어야 해요. 그런 것이 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적으로 자기 존재에 대한 뿌리를 알아야 합니다.

 

어떤 노예가 원래 왕족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노예 중에 제일 높은 노예가 되려는 출세의 길은 의미가 없게 되죠. 왕국을 새로 만들든지 자유인이 되어야 할 것 아니에요. 주인 밑에서 이뤄놓은 것을 버리고 탈출하다 죽어도 그건 자유인으로 죽은 것이지 노예로 죽은 건 아니죠. 이게 중요한 거에요. 불교적으로 말하면 내가 중생인줄 알았는데 내가 사실은 부처인 줄 깨달은 겁니다. 부처의 성품을 회복하려다가 죽으면 그건 수행자로서 죽은 것이지 중생으로서 죽은 게 아니라는 거죠. 이런 것이 우리 인생에 있어서의 정체성, 자주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이에요. 목수의 아들인데 황야에서 기도를 하다가 내가 목수의 아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자각을 하게 된 겁니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는 혹세무민 한다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죠. 하지만 오늘날 기독교는 세계적인 영향을 끼치잖아요. 고주몽도 마찬가지에요. 아버지 없는 자식으로 차별을 받았지만 자신이 해모수의 자식이라는 각성을 해서 새로운 나라를 창건했습니다. 

 

자존성이란 것은 그만큼 중요해요. 비록 가난하게 살고 고생을 해도 자존성이 있는 사람은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고 쓸데없이 목에 힘주지 않고 겸손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장 위대한 존재이기 때문에 허세를 부릴 필요가 없는 겁니다. 자존성이 없는 사람은 돈, 권력, 지위로 자기를 삼기 때문에 돈을 좀 가지면 목에 힘을 주고, 권력을 가지고 인기가 있으면 목에 힘을 주고, 그걸 잃고 자기보다 많이 가진 사람을 보면 비굴하게 구는 겁니다. 이것은 자존성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민족적 자존성이 없기 때문에 강대국에는 굉장히 비굴하고, 약소국한테는 목에 힘주고, 서양 사람한테는 완전히 기가 죽고 비굴하고, 동남아 사람한테는 목에 힘주고 뻗대고 그러는 겁니다. 이것은 자기 정체성과 자존성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예요. 자기 자존성이 있으면 오히려 동남아 사람들에게는 보살피는 마음을 내고, 강대국에 대해서도 당당하고 비굴하지 않죠. 여러분들은 모르지만 심리 속에 열등의식이 있는 겁니다. 이걸 정신적으로 치유해야 해요. 역사적 사실을 많이 안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역사관을 바로잡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배타적 민족주의는 지금 전 세계가 협력하는 추세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하는 것은 매우 필요합니다. 다만 그것이 교만과 오만으로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정체성을 갖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한 스님의 설명에 청년들 모두 깊이 감동받은 모습이었습니다. 즉문즉설에 대한 소감을 물어보니 다들 이 내용이 너무나 가슴에 와 닿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즉문즉설을 재미있게 듣다 보니 장백에 거의 다달았습니다. 이도백하에서 장백으로 가는 길은 외길인데, 스님은 이 길은 수많은 북한 난민들이 피눈물을 흘렸던 바로 그 길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스님의 말씀은 분단된 조국의 아픔을 다시금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지금 가는 이 길은 우리에게는 하나의 길이지만 저희들이 북한난민을 도울 때 이 길은 피눈물의 길이었습니다. 이곳 장백은 압록강 상류이기 때문에 북한에서 넘어오기는 아주 쉽습니다. 그런데 이 장백에 오면 나갈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중간에 검문소가 있는데 피해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북한 난민들이 산속으로 들어가서 많이 죽었습니다. 산속으로 들어가면 길을 잃고 헤매다 죽습니다. 그렇다고 이 길을 따라가면 100퍼센트 다 잡혀요. 또 압록강을 따라 아래 쪽으로도 길이 있는데 거기도 하나 밖에 없는 길이니 이 두 길만 차단하면 100퍼센트 잡힙니다. 그러다보니 북한에서 장백으로 많이 넘어왔지만 90퍼센트 이상 북한으로 강제 송환이 되었습니다. 

 

이런 역사를 모르면 이것은 길일 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한테는 길일 뿐이고 북한난민돕기를 했던 우리에게는 이 길에 엄청난 사연이 있는 거예요. 6~7년의 사연이 쌓여 있으니 단순한 길이 아닌 겁니다. 어디서는 무슨 일이 있었고, 어디서 어떤 애들을 만났고, 이 담벼락에는 ‘아무개야 어디서 보자’ 이렇게 적혀있는 그들의 헤어짐의 사연,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참 애달프죠. 그리고 이 압록강변 아래로 내려가면 때로는 죽은 시신이 물에 불어서 몇 구씩 떠있는 것도 보곤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저한테 그래요. ‘스님은 어떻게 그것을 1, 2년도 아니고 몇 년을 그들 돕는 일을 세상이 반대하는 데도 합니까? 어떤 종교적인 이유인가요?’ 그러면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특별한 이유가 없습니다. 이유가 있다면 딱 한 가지입니다. 제가 먼저 알았고 제가 제 눈으로 본 것이지요. 누구든지 그것을 보고 알았으면 열의 아홉은 이렇게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이것을 보고 알지 못하면 열의 아홉은 그렇게 하기가 어렵지요.’라고요.  

 

국경변에 있는 수 천 개의 마을에 가서 그 마을에 북한 난민이 몇 명 사는지, 어떻게 사는지 이것을 조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거든요. 그러나 그해 겨울, 3개월 만에 2천 몇 백 개의 마을을 조사했어요. 이 마을 인구가 100명인데 한족은 몇 명이고 조선족은 몇 명이다, 그런데 난민은 한족한테 몇 명이 있고 조선족한테 몇 명이 있고 이렇게 조사해보면 조선족 마을에는 인구 비율 당 난민 수가 좀 많아요. 그에 비해 한족 마을에는 적어요. 그러면 전체 연변의 한족 마을과 조선족 마을의 인구를 나누고 이것을 가지고 통계 처리하면 우리가 조사한 마을의 난민 수를 가지고 전 연변 조선족에는 난민이 몇 명 쯤 있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조사하지 않은 마을이 조사한 마을보다 더 많았거든요. 또 국경 변에 가까운 마을과 먼 마을의 난민 비율을 조사하면 국경으로부터 한 200km 안에 난민이 몇 만 명 있을 수 있다고 통계처리해서 발표한 것이 30만 명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추산한 최소 숫자입니다. 

 

그리고 1995년, 96년, 97년, 98년, 이렇게 4년 동안에 북한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에 대해서도 통계처리해서 최소 300만 명 이상이 죽었다는 것을 발표했습니다. 그 통계 속에 자연인구 사망률은 다 뺐습니다, 이것도 통계 낼 때 1800여 명을 인터뷰한 내용을 토대로 두 가지를 추적했습니다. 첫째는 ‘이 4년 동안에 당신 집에 가족이 몇 명인데 몇 명이 죽었는지, 어떤 병으로, 어떻게 죽었는지?’ 이것을 조사하고, 둘째는 ‘당신이 사는 인민반(대략 20가구)에 인구가 대략 몇 명인데 몇 명이 죽었느냐?’ 이것을 조사해서 양쪽 두 개를 통계내어 보면 개인적으로 통계 낸 것과 반별 통계낸 것이 결과적으로 비슷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적용할 때 함경북도에는 죽은 비율이 많으니 함경북도에 적용하는 것, 농촌에 적용하는 것, 노동자한테 적요하는 것이 각각 사망률이 다릅니다. 직업별로는 노동자들의 사망비율이 높고, 농민들은 사망비율이 조금 낮습니다. 함경도는 사망률이 높고, 평안도는 상대적으로 사망률이 적어요.

 

그걸 전부 직업별로 북한의 인구에 맞춰서 노동자, 농민에 적용하는 퍼센트, 함경도, 평안도에 적용하는 퍼센트 분석 해서 전문가들이 통계처리를 하여 추정하니까 300만에서 350만 정도가 사망한 것으로 나왔어요. 그렇게 해서 이 내용을 국제사회에 알렸습니다. 다른 곳에서 만든 게 아닙니다. 좋은벗들이 만든 것이에요. 좋은벗들이 만들어서 유엔에 제출하고 미국에 제출하고 국제사회에 제출해서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인도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호소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인도적 지원, 한국의 인도적 지원을 이끌어 낸 거예요. 국제 여론의 성과 덕분이었죠. 

 

그리고 중국으로 넘어 온 북한난민들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첫째, 최소한 중국 정부가 딴 것은 몰라도 강제추방은 안 하도록 해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둘째, 북한 정부한테는 난민이 되돌아올 때 이 사람들은 못 먹고 못 살아서 넘어간 것이니까 처벌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석방해주라는 얘기가 아니라 중국에서 적어도 강제소환은 안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또 북한에서 처벌은 안 해야 한다는 겁니다. 범죄를 저질렀으면 몰라도 배가 고파서 넘어갔다는 이유로 처벌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명을 살리는 일조차도 늘 숨어서 일하고, 중국 공안한테 문제제기 당하기도 하고, 발각되면 안 했다고 거짓말해야 하니 이 일을 했던 사람들은 ‘이렇게 좋은 일을 하는데 왜 우리는 죄 지은 것처럼 숨어서 해야 하고 벌벌 떨어야 하는가’ 하는 하소연을 저한테 했었습니다. 그렇지만 좋은 일을 했다고 다 칭찬 받는 것은 아니에요. 좋은 일을 하고도 비난 받을 수 있고, 좋은 일을 하고도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좋은 일이라는 것은 비난 받고 처벌 받으면서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걸 각오하고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북한난민들이 흘렸을 피눈물을 생각하니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아픈 가슴을 대변해 주는 듯 버스 창밖으로는 하염없이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곳 산천에는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쓰러져간 수많은 북한 동포들의 시신이 묻혀 있을 것입니다. 

 


▲ 이도백하에서 장백으로 가는 길

 

애잔해진 가슴으로 호흡을 고르고 있는 사이 버스는 장백시에 도착했습니다. 장백시는 압록강을 경계로 북한의 혜산시와 마주하고 있는 도시입니다. 북한과 근접 지역이라 정부에서 역사기행팀에 야간 외출 자제를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스님의 저녁 강연을 취소하고 내일 아침에 버스로 이동하는 중에 강의를 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저녁 식사만 하고 모두 숙소로 들어갔습니다.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던 청년 역사기행팀 모두에게 오랜만에 여유시간이 생긴 것입니다.청년들은 조별로 모여서 마음 나누기를 평소보다 깊이 하는 시간을 가진 후 취침했습니다. 

 

내일은 새벽 3시 20분에 기상해서 발해 시대의 탑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영광탑을 참배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압록강변을 따라 이동하며 북한의 국경변과 뙈기밭의 모습을 버스 창밖으로나마 바라보게 됩니다. 오후에는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였던 집안에 도착해 5회분 5호묘와 장군총을 둘러볼 예정입니다. 

 

※ 동북아 역사기행 기간 동안 발행되는 글은 참가자들의 도움으로 작성됩니다. 오늘 글의 스케치는 <권기훈>님이, 강연 정리는 <정민경>님이, 사진촬영은 <권성준>님이 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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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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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화

좋은일만이 하시는스님 존경합니다 항상건강하세요 고맙습니다 ~ 감사함니다

2016-08-29 12:36:00

Paranpharm

신보다도 위대하신 스님...

2016-08-23 14:07:40

조정

고맙습니다.덕분입니다._()()()_

2016-08-22 12:5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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