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영광탑 ► 5회분 5호묘 ► 장군총 ► 광개토대왕비 ► 광개토대왕릉
2016.8.19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7일째 "고구려의 역사"


 

안녕하세요? 오늘은 청년 동북아역사기행 7일째 날입니다. 오늘 스님은 청년 150여 명과 함께 발해 시대의 영광탑을 참배한 후 압록강, 5회분 5호묘, 장군총, 광개토대왕비를 둘러보고 고구려 역사에 관해 강연했습니다.

 

새벽 3시 50분. 스님과 청년 역사기행단은 동이 트지 않은 새벽길을 걸어 영광탑이 있는 탑산공원으로 향했습니다. 보슬비가 내리는 상쾌한 새벽 공기가 청년들의 기운을 북돋워주는 듯 했습니다. 

 


▲ 새벽 안개를 가르며

 

새벽 안개 속으로 탑산을 오르는 440여 개의 계단이 나타났습니다. 하늘까지 끝없이 펼쳐진 계단을 한 발 한 발 순식간에 기어오른 청년들은 산 정상에 있는 커다란 탑을 보고 모두들 탄성을 내질렀습니다.

 


▲ 발해 시대의 영광탑

 

탑 앞의 비석에는 ‘영광탑’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스님은 영광탑에 관해 간략히 설명했습니다.

 


 

“이 탑은 발해시대 탑 중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탑입니다. 청나라의 봉금정책이 해제되고 사람들이 이곳으로 들어와 살면서 이 탑을 보고 감탄을 했습니다. 어떤 중국 사람이 서안에 있는 ‘영광전’에서 이름을 따와서 영광탑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 탑은 절탑이 아니라 무덤탑입니다. 탑 밑은 벽화가 있는 귀족 무덤이예요. 무덤 위에 탑을 세웠어요. 

 

발해인들은 무덤은 자신들의 전통으로 만들었고, 또 불교문화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위에는 탑을 쌓은 겁니다. 그래서 독특한 새로운 문화를 만들게 됐습니다. 자세히 보시면 옆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어요. 밑이 무덤이여서 지반이 탑의 무게를 못 이기고 약간 침체된 것 같아요.”

 

이어서 스님은 발해 멸망 후 1100여 년만에 찾아와 인사를 올리는 것이라고 하면서 다함께 탑 앞에서 예불을 올렸습니다. 발해인들에 대한 후손들의 인사인 셈입니다. 스님과 청년들이 예불을 드리는 동안 동이 트고 안개가 걷히며 영광탑의 위용이 드러났습니다.

 


 

예불을 마친 스님은 역사기행을 하고 있는 청년들을 위해 축원과 더불어 남북의 평화통일을 간절한 마음으로 발원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스님의 간절한 기도에 청년들도 한 마음이 되어 평화와 통일을 함께 발원했습니다. 

 


 

기도를 마친 후에는 다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발해 시대의 탑 중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탑이라는 생각이 드니 더욱더 이 순간이 소중하게 다가왔습니다. 

 


 

탑산 공원에서는 장백시 너머로 압록강과 북한의 혜산시가 내려다보였습니다. 혜산시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어둠이 가득하던 어제밤 풍경과는 대조되는 규모 있는 도시였습니다. 청년들은 망원경을 통해 일터로 나서는 북한 주민들과 낡은 가옥들을 보며 반가움과 안타까운 마음을 느꼈습니다. 

 


▲ 탑산에 올라 바라 본 북한 혜산시 

 

특히 좋은벗들 이승용 팀장님은 90년대 후반에 일어난 식량난으로 많은 북한 난민들이 이곳으로 넘어왔다고 하면서 당시의 비참했던 상황을 소개해서 더욱더 안타까운 마음을 더했습니다. 

 

오전 5시 30분. 스님과 청년들을 태운 버스는 압록강 강변도로를 지나 림강, 통화를 거쳐 집안으로 향했습니다. 버스가 강변 도로를 달리는 동안에는 강 건너편으로 북한의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젊은 대한민국의 청년들에게는 너무나 낯선 느낌이었습니다. 

 

압록강 상류는 폭이 넓지 않고 수심이 얕아 보였습니다. 금방이라도 양쪽을 오갈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역사기행단의 한 청년은 “강 건너 북한 주민이 압록강 복판까지 걸어와서는 버스를 향해 두 손을 흔들어 보였다”며 뭉클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상수도 시설이 없는 북한의 강변에는 여인들이 무리지어 빨래를 하고 있었습니다. 

 


▲ 압록강변에 나와 빨래를 하고 있는 북한 여성들

 

산에는 나무가 거의 없고 온통 뙈기밭이었습니다. 간간히 나무가 우거진 지역은 혁명전적지로 벌채가 금지되어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가뭄과 홍수의 위험 때문에 뙈기밭이 금지되는 추세라고 하는데, 단속을 피해 높은 지역으로 오르다 보니 가파른 경사 지대에서 경작되는 뙈기밭은 한 눈에 보기에도 매우 위험해 보였습니다. 

 


▲ 뙈기밭

 

스님은 뙈기밭을 보며 “저렇게까지 먹고 살려고 애쓰는데 우리가 먹고 남는 음식 좀 덜 버리고 북한 주민들에게 나눠줘도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는데, 스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느껴지는 듯해 울컥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창밖으로 녹슬고 낡은 공장과 광산, 야트막한 작은 마을들이 줄지어 지나갔습니다. 북한 땅에 있는 건물들은 30~40년 정도 되어 보이는 오래된 건물이 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강 건너 마을의 낡고 황폐한 모습은 참담했습니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마을에는 항상 마을의 중심에 주체탑과 김일성 동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어느 기차역에는 김일성 부자의 사진이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청년들에게 북한의 경제가 몰락해온 과정을 시간 흐름에 따라 상세히 설명하며 북한에 대한 이해를 더했습니다. 

 

“저기를 보세요. 마치 누더기 옷을 기워놓은 것처럼 산 위에 뙈기밭이 주욱 있습니다. 마을도 없는데 어디서 와서 저런 뙈기밭을 일구었을까 할 정도로 온 산에 뙈기밭이에요. 그럼 도대체 누가 저렇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잖아요. 북한 주민들은 일반적으로 아침 8시에 출근해서 저녁 5시에 퇴근 할 때까지 집단농장이나 공장에서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럼 뙈기밭 일은 언제 할까요? 새벽 3시에 일어나 1시간 가서 밭을 일구고, 6시까지 2시간 일하고, 집으로 1시간 걸어와서 아침 먹고 출발합니다. 아침부터 뙈기밭 일을 하고 와서 힘드니까 집단 농장에서 일 할 때는 설렁설렁 하는 거에요. 어차피 내 것 아니다 이러면서요. 5시에 퇴근하면 다 죽어가던 사람이 생기가 돌아서 깜깜할 때까지 뙈기밭에서 일하고 밤에 10시나 돼서 돌아옵니다. 

 


 

그리고 65세 이상 은퇴한 노인들은 자식들을 위해서 산에 가서 움막을 치고, 거기서 농사를 짓습니다. 정말 먹고 살기 어려울 때는 아이들도 학교에 나가지 않고, 할머니 따라 뙈기밭에 가서 일을 합니다. 

 

저렇게까지 사람이 먹고살려고 노력하는데, 우리가 남는 음식 좀 덜 버리고 도와주는 게 좋지 않을까요.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새끼들 굶어 죽어도 싸다. 식량 보내주면 먹고 힘내서 총질이나 한다’라고 하는데, 여기서 이렇게까지 해서 먹고살려는 사람들이 미사일을 만드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저희들이 북한에 인도적 지원을 할 때 반대하는 사람들과의 논쟁이 컸습니다. ‘우리가 지원한 쌀 총알되어 돌아온다.’ 그러면 우리는 ‘굶주리는 어린 아이는 정치를 모른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게 된 핵심적인 이유는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과 난민을 도왔던 일 때문입니다. 중국에 있는 조선족들의 헌신적인 노력들에 의해서 이루어 진 것이지 제가 혼자서 한 것이 아닙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북한의 경제는 붕괴되다시피 했습니다. 북한은 단순한 공산국가가 아닙니다. 동부 유럽 같았으면 벌써 해체가 되었겠죠. 말이 공산주의이지 일종의 항일 독립 정신을 가진 민족주의로 무장된 국가입니다. 아시아 공산주의 국가는 망한 나라가 하나도 없잖아요. 중국도 말이 공산주의이지 항일 전쟁을 하는 사람들이 중심이 되었죠. 베트남도 독립전쟁을 하던 사람들이 중심이 되었고요. 이러한 나라들이 망하지 않는 이유는 형식만 공산주의이지 자세히 살펴보면 독립 투쟁했던 사람들, 항일운동이나 약소민족 해방운동을 했던 집단들이기 때문입니다. 소비에트 연방이나 유럽쪽 공산주의 국가들이 붕괴되어도 이 나라들은 정책만 바꾸었지 국가가 붕괴되지는 않았습니다. 

 

북한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유럽 사람들이 볼 때는 저렇게 인민이 굶어 죽으면 국가가 망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인데 사실은 그렇게 망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소위 사회주의적 이론을 보면 하부 구조가 붕괴되면 상부구조도 붕괴되는데, 북한은 하부구조가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부구조가 붕괴되지 않으니 서양학자들은 이해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거에요. 북한 붕괴론을 주장한지 20년이 지나도 아직도 붕괴가 안 되잖아요. 

 

북한은 이렇게 보면 돼요. 빈집을 가보면 속에는 벽도 다 허물어지고 살림살이도 없고 폐허가 되어 있는데 기둥하고 지붕은 멀쩡해요. 그러니까 지붕하고 기둥이 멀쩡하면 멀리에서 보면 멀쩡한 집이에요. 즉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는 아직 막강하게 남아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집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무런 살림살이도 없고 벽도 다 떨어져 있고 그런 겁니다. 즉 사회경제적으로는 거의 붕괴되어있는 그런 상태입니다. 장기적으로 길게 보면 결국은 기둥도 무너지고 집도 무너지겠지요. 그래서 장기적으로 보면 붕괴될 수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단기적으로는 아직 쉽게 붕괴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정부의 통일 정책은 단기적으로 붕괴된다는 전략만 자꾸 세웠기 때문에 계속 안 맞는 거에요. 이제 이 상태에서 본인들이 개방을 해서 벽을 다시 세우고 집을 다시 수리 할지는 지켜봐야겠죠. 하지만 그게 쉽지는 않습니다. 그런 것이 현재의 북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나라가 생길 때는 북한이 남한보다 더 긍정적인 요소가 많았는데, 지금은 남한이 그래도 선거로 뽑으니까 시끄러워도 정치적으로 안정이 되어있고, 경제적으로도 지금 저성장 국면에 처해 있지만 그래도 세계 13위 정도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방력도 최신 무기로 무장되어 있고, 거기에 세계 최강국인 미국과 동맹관계가 되어있죠. 모든 면에서 남한이 앞서고 북한은 국방 차원에서도 위협을 느끼고, 경제도 붕괴되어 회복이 어렵고, 사회적으로도 내적 지지가 없는 이런 상태입니다.” 

 

스님의 설명을 들으며 북한의 현실에 대해 조금 더 깊이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오전 10시. 림강을 지나며 스님은 청년들과 즉문즉설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청년들의 다양한 질문이 이어지며 2시간 동안 총 6명의 질문자가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스님은 명쾌한 답변을 들려주며 이동시간을 아주 유익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스님과 청년들은 통화에 도착해 점심 식사를 한 뒤, 다시 버스를 타고 집안으로 향했습니다.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였던 집안은 험준한 산맥이 둘러싸고 있는 천연의 요새 지형이었습니다. 집안으로 향하는 길은 협곡과 가파른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최근 터널이 신설되었지만 과거에는 굽이치는 산길을 따라 산을 넘어야만 이 지역에 올 수 있었다고 하니 고구려의 옛 수도가 얼마나 접근이 어려운 요새였는지 짐작해 볼 수 있었습니다. 

 

첩첩산중을 지나면서 적의 공격을 차단하기 위한 ‘관마산성’이 있었던 자리도 잠시 지나쳤습니다. 그리고 장군총과 광개토대왕비를 쌓는데 사용되었던 큰 돌을 채취하였던 채석장도 잠시 엿볼 수 있었습니다.  

 


▲ 관마산성 

 

그런데 집안에 도착하자 아침부터 내리던 빗발이 점점 굵어졌습니다. 스님은 급히 국내성과 환도산성 등 야외 답사 일정을 내일 오전으로 연기하고, 비교적 이동이 적은 무덤 유적지들을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오후 4시. 스님과 청년들은 5회분 5호묘에 도착했습니다. 

 


▲ 5회분 5호묘 

 

무덤 입구에서 스님이 고구려의 무덤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습니다. 

 

“고구려의 무덤은 돌을 쌓아서 만든 적석총입니다. 위에 큰 덮개돌을 얹는 것은 고인돌에서 유래되었다고 보여집니다. 그런데 적석총을 2단, 3단으로 더 높이 쌓으려고 하다 보니 돌이 무너져내릴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주위에 큰 돌을 사각으로 쳐서 막고 그 속에 강돌을 넣은 겁니다. 그렇게 쌓아서 제일 많이 올라간 것은 7단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피라미드형이 되었습니다. 7단까지 올라갔을 때는 무덤실을 5단에 두었습니다. 6단과 7단은 그 속을 텅 비어 있게 해서 그 속에 무덤실을 만들고 시신을 안치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광개토대왕릉과 장군총까지 만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중국과의 교류가 빈번해지고 중국의 문화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지상에 있던 무덤실이 지하로 내려가게 됩니다. 무덤실을 만드는 것은 전통 그대로 고수하고, 대신에 위치가 지상에서 지하로 내려간 겁니다. 지하로 내려가면서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지하에 가보면 전실이 있고, 전실을 지나면 무덤실이 있고, 무덤실 안에는 관을 놓는 관대가 있습니다. 보통은 관대가 2개 놓여 있는데, 왕과 왕후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관대가 3개인 경우도 있습니다. 고구려는 제1부인과 제2부인까지 인정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겁니다. 

 

무덤실의 동서남북 4면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주로 사신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좌청룡, 우백호, 북현무, 남주작이라고 해서 동쪽에는 청룡의 상을, 서쪽에는 백호의 상을, 북쪽에는 현무의 상을, 남쪽에는 주작의 상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농업의 신인 우가, 수레바퀴의 신, 일신과 월신 등 여러 가지 신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런 그림들을 실제로 가까이에서 직접 보시기 바랍니다.”

 

스님의 설명이 끝나자 곧바로 무덤 속으로 들어가 벽화를 가까이에서 직접 보았습니다. 

 


 

스님 말씀처럼 5회분 5호묘에는 모든 벽면과 천장에 벽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1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화려한 색채를 유지하고 있어 청년들 모두 탄성을 자아냈습니다. 벽화 속 다양한 신의 모습을 통해 당시의 과학, 천문학, 철기 수준이 매우 발달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님이 박물관 측에 요청한 덕분에 공사 중이었던 박물관의 벽화를 잠시 관람해 볼 수 있었습니다. 고구려시대 벽화에서 단군신화의 내용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신화가 단순히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전해내려온 역사적 사실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장군총으로 향했습니다. 장군총에서는 스님과 조별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즐겁게 사진을 찍었습니다. 

 


▲ 장군총

 

이어서 장군총에 대한 스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장군총은 7층 규모의 거대한 돌무덤으로 약 1100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12개의 호석으로 4면이 받쳐져 있었습니다. 특히 부식되지 않는 강돌을 직접 옮겨왔고, 바닥돌에 홈을 파서 윗돌을 끼워 넣은 정교함에 대해 설명을 듣고 나선 모두들 선조들의 지혜에 감탄했습니다. 

 


 

오후 6시, 마지막으로 광개토대왕릉비와 광개토대왕릉을 보았습니다. 무엇보다 책에서는 실감할 수 없었던 웅장한 크기에 모두들 놀라워했습니다. 

 

특히 광개토대왕릉비 앞에서는 비석에 새겨진 내용들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는데, 일제에 의해 훼손되어 보이지 않는 글자들 때문에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청년들도 모두 안타까워했습니다.

 


▲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릉은 그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무너져서 본래의 모습을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그 크기와 엄청난 규모에 압도되었습니다. 평양에서 만주벌판까지 드넓은 영토를 호령했던 선조들의 기상이 느껴져 가슴 뭉클한 감동이 느껴졌습니다. 

 


▲ 광개토대왕릉

 

저녁식사를 한 후에는 스님의 강연을 들었습니다. 고구려의 역사에 관한 주제로 강연이 있었습니다. 

 


 

먼저 스님은 왜 우리가 고구려의 역사를 공부하고, 고구려의 유물과 유적을 찾아 이곳에 왔는지 그 배경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오늘과 내일은 고구려를 보면서 우리민족의 역사를 다시 한번 정리할 기회를 가져보려고 합니다. 광개토대왕 비석에 새겨져있듯이, 고구려를 세운 주몽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다. 북부여에서 나왔다. 부여의 정통 후계자다.’ 즉 천손임을 밝히고 부여에서 나왔으며 부여의 정통 후계자라고 합니다. 고구려가 자기 정체성을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그럴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인 스스로가 거대한 광개토대왕 비석에 자기 뿌리를 그렇게 밝혔습니다. 

 


 

부여는 해모수가 세운 나라입니다. 주몽은 해모수의 아들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해모수는 자신은 단군의 후손, 단군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본인이 단군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단군은 ‘나는 환웅천왕의 아들이다. 그래서 나는 배달의 후예다.’ 이것을 스스로 밝혔습니다. 또, 환웅천왕은 ‘나는 환인 하느님의 아들이다. 환인의 한나라에서 내려왔다.’ 이렇게 자기의 뿌리를 밝혔습니다. 그런데 환인은 나는 어디서 왔다고 밝힌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역사의 뿌리를 찾아 올라가 보면 환인의 한나라가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이전의 나라도 있었겠지만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러면 고구려를 계승한 것은 발해이고, 발해는 누가 계승했습니까. 이게 지금 불분명합니다. 우리가 발해를 온전하게 계승하지 못했습니다. 왜 온전하게 계승하지 못했을까요. 소위 발해와 신라는 오늘의 남북한처럼 남북국시대를 이루었는데 두 나라는 서로 선린관계에 있지 못했습니다. 싸우고 적대하지는 않아도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이런 식으로 지냈어요. 

 

그런데 고려라는 나라는 영토나 사람의 대부분을 신라에서 계승했습니다. 신라왕이 고려왕에게 투항해서 나라를 고려에다 바쳤어요. 이렇게 되니까 고려를 계승한 나라는 조선이고, 조선을 계승한 나라는 대한제국, 대한제국을 계승한 것이 대한민국이니까 대한민국인 현재에서 우리가 찾아 올라가면 고려로, 신라로 갑니다. 그런데 신라는 어디서 나왔나요? 결국 ‘나는 누구의 후예다’ 이게 없어집니다. 소위 경주에 있는 여섯 개의 부족이 모여서 부족 연맹장으로 박혁거세를 추대한 것으로 시작해요. 더 이상 없어요. 그러니까 만약 고려가 신라를 계승했다면 우리 민족사는 2100여 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려가 현실적으로는 영토나 인구의 측면에서 80% 이상 신라를 계승했지만, 이념적으로 역사의식은 ‘우리는 고구려의 후예다.’라고 하고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겠다는 건국이념을 세웠습니다. 고려는 스스로가 ‘나는 고구려의 후예다’라고 해서 나라 이름도 고려라고 지었고,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겠다는 건국이념을 세웠습니다. 마치 고구려가 ‘단군 조선의 옛 땅을 되찾겠다’라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해서 우리 역사가 위에서 내려 올 때 발해에서 끝나고, 아래에서 올라갈 때 신라에서 끝나는 이 간극을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함으로 해서 고구려에서 고려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간에 바로 신라와 발해가 남북국 시대를 형성했기 때문에 고려가 신라를 계승한다 할 때는 역사의식의 부재가 되고, 발해를 계승한다 할 때는 현실에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둘을 극복하는 것이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고려는 현실적으로 신라를, 역사의식으로는 발해를 계승한다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신라와 발해라는 남북국시대의 단절을 이었습니다. 위로는 고구려에서, 아래로는 고려로 이어져서 오늘에 이르는 우리의 역사가 길게는 9천 년, 작게 잡아도 6천 년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올해로 신시개천 5914년이니까 거의 6천년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중간지점이 고구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에 와서 고조선의 얘기를 한다 하더라도 고조선의 증표로 잡을 게 없잖아요. 배달나라를 얘기하지만 배달나라의 증표를 얘기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그 고조선의 영토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가 아니라 지금의 동북아 대륙인 중국 땅에 우리의 본래 근거지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가 당시의 중심지가 아니었는데 거기서 찾는다고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명백하고 확정적인 증거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는 역사서에 분명히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외국 역사책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정사로 기록한 삼국사기, 또 야사로 기록한 삼국유사가 그것입니다. 삼국사기가 사대주의적 관점을 띄었다 해도, 삼국유사가 민족적 자존성의 바탕 위에 기록되어 정통적인 역사기록 방식이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가 쓴 역사서라는 측면에서 가치가 있는 것이지요. 또 고구려에 관해서는 유물과 유적이 있습니다. 오늘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 집안과 환인입니다. 또 북한에 있는 평양이 있지요. 

 


 

그러니 중국 땅이라 우리가 제대로 확인할 수 없긴 하지만, 북한 땅은 더더욱 우리가 가기 어렵기 때문에 그나마 올 수 있는 이곳 만주로 오게 된 것입니다. 오늘 고구려 무덤도 보고 비석도 보고 벽화도 보고 내일은 국내성과 환도산성도 볼 것입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물증이 남아 있는 것이지요. 내 발로 밟고,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역사 속에서 고구려가 갖는 의미가 이렇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인지 미처 몰랐습니다. 청년들은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나서 무척 흥분된 표정을 지었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고구려의 건국 과정에 대해 재미난 이야기들을 많이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무렵에는 고구려 700여 년 동안의 흥망성쇠를 설명하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자주성과 민족의 기상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모습을 강조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고구려는 고국원왕이 전사하고 소수림왕, 고국양왕을 거치면서 불교를 공인하고 태학을 세우고 내치를 많이 합니다. 그리고 고국양왕을 거쳐 광개토태왕이 일어나서 최대의 영토를 일구어 대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 소위 경쟁 상대인 백제를 완전히 제압해버리지요. 그리고 장수왕에 오면서 백제를 더 제압해서 차령산맥 이남으로 밀어내고 수도를 평양으로 옮겨 태평성대를 맞게 됩니다. 

 


 

왜 이렇게 할 수 있었느냐. 서쪽에 16국이 서로 쟁탈하자 북위라는 나라가 16국을 통일했어요. 그런데 북위 황제의 부인 중에 고구려 사람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다음 황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구려는 북위 황제 어머니의 고향이 되었던 겁니다. 이렇게 해서 북위와 100년 동안 평화 관계가 정착되어 서북 변방이 안정이 되었습니다. 그 힘을 딛고 장수왕은 아래로 밀고 내려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구려가 안정권에 접어들어서 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왕 때가 고구려의 전성기예요. 즉 5세기 때가 고구려의 전성기입니다. 

 

이렇게 되면서 고구려는 무사안일에 빠지면서 영토는 제국인데 강인함이 점점 사라져갑니다. 결국 신라가 강성하면서 신라와 백제가 나제동맹으로 고구려를 치고 올라옵니다. 그때 마침, 돌궐이 강성하여 고구려를 치고, 이렇게 북쪽에 고구려가 신경 쓸 때 신라와 백제가 힘을 합쳐서 한강 유역을 다시 뺏죠. 그리고 신라는 더 치고 올라가서 황초령비, 마운령비에서 볼 수 있듯이 지금의 함경도까지 올라가서 평양성을 위협했습니다. 결국 고구려는 북쪽과 남쪽으로 양쪽 전쟁을 더 이상 못하게 되었는데, 그래서 신라한테는 ‘너희가 차지한 땅은 너희에게 줄 테니 평양성 공격은 하지마라’라고 요청을 합니다. 신라는 전쟁을 해서 땅을 차지했다 해도 평화회담을 하면 땅을 다시 돌려줘야 할 수 있는데, 땅을 그냥 할양받게 되니 신라는 이득이라 판단했지요. 그래서 신라는 평양성 공격에 소극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동맹국인 백제는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도 평양성을 공격해야 했는데, 신라가 공격을 안 하는 거예요. 이 일로 신라와 백제가 갈라졌는데 그렇게 갈등이 생기니 신라가 백제를 쳐서 한강 유역을 신라가 다 점령해 버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신라와 백제는 철천지원수가 되었어요. 그리되니까 이번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동맹을 맺어서 여제동맹이 맺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서 고구려는 돌궐하고도 화친하고 백제, 왜, 이렇게까지 동맹관계가 성립된 겁니다. 그러니 신라가 고립되지요. 이렇게 신라가 고립 되니까 고구려와 백제의 엄청난 침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견디지 못한 신라는 마침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게 되니 바다 건너 수나라한테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수나라는 천하에 무서운 줄 모르고 고구려에게 신라를 침공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으나 고구려가 별로 말을 듣지 않자 598년 수나라 문제가 고구려를 공격합니다. 하지만 수나라는 공격에 실패했고, 양제가 612년, 613년, 614년에 114만의 군사를 동원해서 고구려를 침공했습니다. 그러나 을지문덕에 의해서 결국 패배하고 수나라는 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당나라가 일어나게 됩니다. 

 

신라는 수나라와 마찬가지로 당나라와도 외교를 합니다. 이때는 주로 김춘추가 외교를 했습니다. 김춘추와 당태종이 만나 합의한 것이 ‘백제하고 고구려를 멸망시키면 대동강 원산만 이남의 땅을 신라 땅으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합의하고 당태종이 고구려를 세 차례 침공했는데 양만춘의 안시성 전투에서 함락을 못시키고 부상을 입고 철수합니다. 소위 중국 역사에서 최고의 황제라고 하는 당태종이 고구려 정벌에 실패한 거예요. 이렇게 되자 고구려 침공은 한 발 물러나게 됩니다.  

 

그런데 고구려는 당나라의 침략을 생각해서 그 전부터 천리장성을 쌓아 왔었습니다. 천리장성을 쌓는 책임자가 연개소문이었어요. 그래도 당태종의 침략에 고구려가 승리하기는 했지만 고구려 안에서도 당나라와 화친해야한다는 주장이 점점 세력을 얻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죽이고 실권을 잡지요. 그래서 소위 대막리지가 되었어요. 그때 당태종이 그걸 문책합니다.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것은 부도덕하다.’ 이렇게 말입니다. 이런 명분으로 당태종이 다시 쳐들어왔지만 연개소문이 그걸 막아내었습니다. 이후 당 고종 때 660년에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해서 먼저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다음에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연개소문에 의해서 나당연합군은 승리하지 못하고 패배했습니다. 그러니까 고구려를 1차, 2차, 3차까지 공격했는데 다 실패합니다. 그런데 665년에 연개소문이 죽습니다. 그러자 아들 남생이 동생과 권력투쟁을 하다 밀려서 당나라에 귀순하였는데, 이 빌미로 당나라가 군대를 끌고 고구려를 공격하면서 결국 고구려는 멸망하게 됩니다. 이때가 668년입니다. 이렇게 해서 고구려는 BC 37년에 건국하여 705년 만인 서기 668년에 멸망하였습니다. 부여까지 합하면 900년의 역사가 멸망하게 된 것입니다. 

 

고구려는 동북아에서 강대한 국가를 700년간 유지해 왔습니다. 당시 중원은 얼마나 많은 왕조가 바뀌었습니까. 고구려가 처음 일어났을 때 중원은 ‘전한’이었습니다. 전한 다음에는 왕망의 신나라, 그 다음에 후한, 삼국시대, 진나라, 진나라가 남쪽으로 옮겨가서 동진이 되고 북쪽에 5호 16국이 되고, 그것을 통일한 나라가 북위, 이후 남북조시대가 전개됩니다. 남북조시대를 통일한 것이 수나라, 그것을 이어 당나라가 되지요. 

 


 

그러니까 중국의 셀 수 없는 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할 때 동방에는 고구려가 딱 버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구려는 망할 때까지 한 번도 자주권을 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고구려의 기상입니다. 고구려는 늘 자주적인 자기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내용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고구려의 무덤과 성을 오늘과 내일 직접 살펴보는 것으로서 우리의 정체성과 뿌리를 찾아가면 좋겠습니다.” 

 

약 1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고구려 700여 년의 역사가 한 눈에 정리가 되었습니다.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오늘 본 광개토대왕비, 장군총, 5회분 5호묘 등도 다시 새롭게 다가오는 느낌이었습니다. 청년들은 열정적으로 강연해 준 스님에게 뜨거운 박수갈채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내일은 새벽 5시에 기상해서 국동대혈을 찾아가 선조들께 인사를 올린 후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였던 환도산성과 국내성을 자세히 둘러보고, 다시 환인으로 이동해 고구려의 첫번째 수도였던 홀본산성에 올라가 볼 예정입니다.

 

※ 동북아 역사기행 기간 동안 발행되는 글은 참가자들의 도움으로 작성됩니다. 오늘 글의 스케치는 <윤은지>님이, 강연 정리는 <박진웅>님이, 사진촬영은 <권성준>님이 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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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륜 스님의 쉽고 명쾌한 강의를 통해 불교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정토불교대학'이 가을 학기 신입생을 모집합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전체댓글 23

0/200

오유진

감사합니다 ~~♡♡

2016-08-23 02:49:02

조정

고맙습니다.덕분입니다._()()()_

2016-08-22 13:12:08

나룬

스승님과 기행에 함께 하는 한국의 든든한 청년들에게 부처님의 가피가 늘 함께 하기를 간구합니다.

2016-08-22 06:5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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