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국동대혈 ► 환도산성 ► 국내성 ► 홀본산성
2016.8.20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8일째 "고구려의 숨결"


 

안녕하세요?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의 일정이 점점 막바지에 이르고 있습니다. 오늘은 8박 9일의 여정 중 8일째가 되는 날입니다. 오늘 스님은 청년 150여 명과 함께 국동대혈, 환도산성, 국내성, 홀본산성으로 이어지는 고구려 역사 유적지를 둘러보고 그간 8박 9일을 정리하는 강연을 통해 한반도 통일의 필요성과 청년의 역할에 대해 강연했습니다. 

 

새벽 5시. 오늘은 지난 8일 동안의 역사기행 일정 중 가장 늦게 출발하는 날입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여유가 생기자 청년들의 얼굴에도 화색이 돕니다. 

 

스님과 청년 역사기행단은 보슬비를 맞으며 국동대혈로 향했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기행에서 집안 지역은 더운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다행히도 오늘은 촉촉한 보슬비가 내려 아침 산책하기에 안성맞춤이었습니다. 

 


 

국동대혈로 올라가는 산길에서 해동보리동이라고 하는 동굴에 잠시 들렀습니다. 동굴에는 불상이 잘 모셔져 있었는데, 스님은 이번 역사기행에 참여한 청년들의 건강과 하는 일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축원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 해동보리동 동굴

 

산을 조금 더 올라가니 ‘장상애’라고 불리우는 바위 한 쌍이 나타났습니다. 높이 우뚝 솟은 두 바위는 마치 두 남녀가 서로 애틋하게 마주보고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스님은 이 바위를 보면서 고구려 2대 왕인 유리왕이 멀리 떠나간 여인을 차마 잡지 못하고 그리워하며 읊었다는 황조가의 배경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 장상애 바위

 

“바위가 참 묘하게 생겼죠. 두 남녀가 마주보고 있는 모습이에요. 바위 앞에는 ‘장상애’라고 써놓았는데요. 영원히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바위이니까 영원히 변치 않겠죠. 그러니 영원한 사랑을 좋아하면 바위와 사랑을 하면 돼요. 영원한 것을 별로 안 좋아하면 사람하고 사랑을 하고요. 사람 마음은 늘 바뀌니까요.(모두 웃음)

 

이 바위는 고구려 2대 유리왕이 지은 황조가와 관련된 바위입니다. 황조가 아시죠? 누가 한번 나와서 외워 보세요.” 

 

“훨훨 나는 저 꾀꼬리 암수 서로 즐거운데 외로울사 이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

 

“잘 외우셨어요. 유리왕은 졸본에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제1부인으로는 권력가 집안의 여자와 결혼을 했어요. 제2부인은 아주 아름답고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와 결혼했어요. 제2부인은 고구려족이 아니고 한족이었어요. 그런데 두 부인이 계속 서로 싸우는 거예요. 제1부인은 제2부인을 아주 천한 집안 출신의 여자라고 무시했고, 제2부인은 제1부인의 얼굴이 못생겼다고 무시했어요. 

 

어느 날 왕이 사냥을 하러간 후 궁이 비었는데, 두 부인이 한바탕 싸웠어요. 서로 비난을 하다가 도를 좀 넘어서 제1부인이 ‘이 천한 것아. 너희 나라로 가라.’ 이렇게 얘기했어요. 그러자 제2부인은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짐을 싸서 자기 나라로 가버렸어요. 저녁에 유리왕이 궁에 돌아오니까 제2부인이 없어진 겁니다. 그래서 말을 타고 막 달려가서 제2부인을 잡았어요. ‘궁으로 돌아가자’ 하니까 제2부인은 ‘나를 택하든지, 저 여자를 택하든지. 가부간에 결정하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왕의 입장에서는 참 곤란한 거예요.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왕이라는 지위를 유지하려면 권력가 집안의 제1부인이 필요했거든요. 결국 왕위를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 왕 혼자 궁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 때 꾀꼬리 두 마리가 정겹게 노니니까 꾀꼬리가 부러워서 이런 시를 지은 겁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을 못 이루었지만 바위가 되어서 영원한 사랑을 나눴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곳입니다. 여기서 기도하면 사랑이 이뤄진대요. 혹시 뒤에 혼자 남아서 기도하는 사람이 있으면 좀 의심해 봐야 해요. 하하하.” 

 

스님의 위트 있는 설명에 모두들 크게 웃었습니다. 학창시절 글로만 배웠던 시를 이렇게 역사의 현장에서 읊어보니 유리왕의 애절하고 절절한 마음이 지금까지 전해지는 듯 했습니다. 

 

5시 30분. 그렇게 가볍게 두 곳을 지나 드디어 국동대혈에 도착했습니다. ‘국동’이란 말을 처음에는 나라의 동쪽이라고 해석해서 그 위치를 정확히 알 수가 없었는데, 나중에 ‘국’이라는 글자가 ‘국내성’을 뜻한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이곳의 위치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즉 국동대혈은 국내성의 동쪽에 있는 큰 동굴이라는 뜻입니다. 이곳에서 스님과 청년들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 국동대혈

 

고구려 왕들은 이 동굴을 하늘로 통하는 곳으로 신성시 여겨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스님과 청년들은 조상님들께 인사를 올린 후 발원 기도를 함께 했습니다. 

 

“한 나라를 세우신 환인 하느님. 배달 나라를 세우신 환웅 천왕님. 조선 나라를 세우신 단군 왕검님. 부여 나라를 세우신 해모수 대왕님. 고구려 나라를 세우신 주몽 대왕님. 오늘 저희 동북아역사대장정 청년 대중 일동은 고구려 태왕께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 이곳 국동대혈에 모여 고구려 멸망 이후 1300년 만에 다시 찾아와 예를 올립니다. 저희를 굽어살펴 주소서. 

 


 

고구려의 건국이념이 조선의 옛 땅을 되찾자는 다물 사상 이듯이, 조선의 건국이념은 신시의 옛 법도를 다시 세우자는 것이였고, 배달의 건국이념은 이 땅에 사는 만 백성을 이롭게 하고, 하늘의 뜻인 정의를 이 땅에 실현하자는 ‘홍익인간 제세이화’였습니다.

 

우리 한반도는 지난 100년 동안 분단된 국토에서 수많은 아픔을 딛고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앞으로 100년은 다시는 이런 고통이 없도록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 대한민국을 만들어 과거 100년의 아픔을 청산하고 미래 100년의 새로운 희망을 만들고자 합니다. 또한 고구려와 발해 멸망 이후 1000여 년을 대륙의 변방으로 전락한 이 아픔을 떨쳐버리고 1000년의 꿈을 실현하고자 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비록 작고 부족한 것이 많지만, 그러나 이 꿈을 실현할만한 기본적인 씨앗은 갖추어졌습니다. 우리가 이 씨앗을 심고 가꾸어 민족의 새로운 중흥을 이루어 우리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제 민족들과 함께 손잡고 아시아의 평화를 이루고 동아시아 공동체를 만들어 21세기 말에는 인류 문명의 중심이 되고자 합니다. 다시 아시아의 시대를 그래서 세계 평화의 중심이 되고자 합니다. 그 중심에 우리 대한민국이 우뚝 서고자 합니다. 

 


 

이런 첫 출발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입니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간절하게 발원하며, 여기 모인 대중 일동은 기필코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키고 통일 대한민국을 이룰 것을 발원하며, 그런 나라가 되는데 저희들이 작은 힘이지만 모든 것을 바칠 것을 발원하오니 하느님과 조상신들께서는 저희의 발원을 굽어살펴 주시고, 저희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옹호하여 주소서.”

 

스님의 발원 기도가 있는 동안 청년들은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그리고 큰 원을 만들어 서서 서로 손을 잡고 다함께 노래를 불렀습니다. 

 


 

국동대혈에서 내려오는 길에 몇몇의 청년들에게 소감을 물어보았습니다. 선조들이 소중하게 여긴 곳에 직접 온 것에 대해 가슴 벅차하였고, 또 어떤 청년들은 북한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통일을 염원해보는 시간을 가진 것에 더욱 가슴 뭉클해했습니다. 

 

아침 9시, 이제 청년 역사기행단은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과 인접한 환도산성으로 향했습니다. 거의 도착할 무렵 버스 창 밖으로 산 기슭을 따라 웅장한 성벽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 환도산성. 능선을 따라 성벽이 쌓아진 모습.

 

환도산성은 성 앞에 통구하가 흘러 지세가 좋고 성벽이 견고해 적의 공격을 막기에는 안성맞춤인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성들에 비해 함락이 잘 안되었다고 하는데요. 특히 요동 태수의 침입에도 국내성은 함락됐으나 환도산성은 함락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스님은 이에 얽힌 이야기와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나라 관구검의 침입과 연나라 모용왕의 침입에 함락이 되었던 안타까운 사실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저희들이 도착한 이곳이 환도산성입니다. 옆에는 통구하가 흐르고 산성은 기슭으로 죽 이어져 전체 길이는 7km정도입니다. 유리왕 21년(서기1년)에 설지라는 사람이 이곳을 발견하고, 2년 후인 유리왕 23년에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게 됩니다. 

 


 

여기 환도산성은 옹성이 잘 남아 있습니다.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성벽을 옹성, 성벽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성을 치성이라고 하죠. 저기 보시면 옹성이 아주 잘 남아 있어요. 

 

고구려는 항상 평지성과 산성이 짝을 이루는데, 평상시에는 평지성에 살다가 위기에 처하면 산성으로 가서 방어를 하게 됩니다. 평지성이 국내성이고, 산성이 환도산성, 이렇게 국내성과 환도산성은 한 짝입니다. 국내성이 불탔을 때는 복원하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수도를 이곳 환도산성으로 옮긴 적도 있다고 합니다. 

 

국내성이 함락당한 건 세 번 있었습니다. 첫 번째 침략은 이곳으로 수도를 옮긴지 25년 만에 한나라 ‘요동 태수’에 의해서입니다. 동북지역을 관장하는 한나라 군사의 총 책임자 요동 태수는 5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해 국내성이 함락되었습니다. 그때 왕은 이곳 환도산성으로 피신해 적들이 지치도록 만드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밤이 되면 적 야영지를 휘저어놓고, 적들이 전투 준비를 하면 성 안으로 들어와 버리고, 나뭇단에 기름을 부어 떨어뜨린 후 구경하는 적병들에게 불화살을 쏴버리고, 잠들 무렵 공격하고, 그렇게 지쳐갈 무렵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 이 고기와 술을 먹어라’는 편지와 함께 큰 잉어와 술을 적장에게 보냅니다. 요동 태수는 장기전이 되면서 고구려군의 물과 식량이 떨어진 줄 알았는데, 큰 잉어를 보고선 물과 양식이 풍부한 것으로 생각하고 철수하게 됩니다. 

 

두 번째 침략은 서기 246년에 삼국시대에 나오는 위나라 장군 관구검의 침입 때입니다. 고구려가 북경까지 진출하게 되니 고구려 본거지를 없애버리기 위해 침략해왔습니다. 국내성도 함락되고 환도산성도 이때 함락됩니다. 그래서 왕은 변복을 해서 동해안까지 도망갔다가 겨우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침략은 다시 100년 가까이 지나 342년 연나라 모용왕의 침입 때입니다. 고국원왕이 정예병 5만을 북로에 배치했는데, 적이 남로로 급습하게 되면서 국내성과 환도산성이 함락됩니다. 이 모용왕은 고국원왕의 아버지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시신과 왕의 어머니, 아내를 포로로 삼아 고구려가 추격할 수 없게 했습니다. 그래서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데, 백제 근초고왕이 이 틈을 타 고구려를 쳐들어오게 됩니다.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직접 진두지휘했지만 왕의 전사로 인해 고구려와 백제 사이는 원수로 바뀌게 됩니다. 

 


 

백제는 한때 요동반도까지 차지하면서 고구려의 최대 경쟁상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후일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때 백제를 완전히 격파하면서 고구려는 우리 민족사의 중심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참가자들은 비가 내리고 있는 가운데에도 스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해서 들었습니다. 

 

스님의 설명이 끝나고 다함께 성벽이 잘 보이는 곳에 서서 기념사진을 촬영했습니다. 청년들은 성문을 지켰던 고구려의 병사가 된 듯 우람한 기세로 어깨에 힘을 주어 보았습니다. 

 


▲ 환도산성

 

이어서 성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연못이 나타났습니다. 스님은 “이 연못이 바로 요동 태수를 물러나게 한 잉어가 있었던 그 연못”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연못에서 조금 더 올라가니 2.5km 떨어져 있는 국내성이 훤히 보이고, 적들의 침입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전망대가 나타났습니다. 전망대를 한 바퀴 도는데, 이곳에 우둑하니 서서 국내성을 바라보았을 고구려 병사의 마음이 어렴풋이 느껴지는 듯 했습니다.  

 


▲ 전망대

 

전망대 앞에는 솔숲 속에 병영 유지로 추정되는 곳이 있었습니다. 발굴 중에 천년 전의 인분이 섞인 흙무더기가 발견되어 화장실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학자들의 발표가 있었다고 합니다. 청년들도 모두 신기해 하며 감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 병영 유지

 

산성의 깊숙한 곳에는 왕이 머물렀다고 하는 황궁터가 저 멀리 보였는데, 가까이 가보진 못했지만 ‘저곳에서 생활했겠구나’ 하며 당시의 생활을 조금이나마 상상해 보았습니다.  

 

성벽을 따라 걸으면서는 고구려 성벽의 특징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세월의 흐름과 적의 침공으로 인해 허물어진 성벽이 많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인들은 독특한 축성법으로 아주 견고한 성을 쌓았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성벽을 가리키며 고구려인들의 축성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개가 짐승을 사냥할 때 한 번 물면 이빨이 서로 맞물려서 빼낼 수가 없게 되잖아요. 그렇게 뽀족한 면이 서로 아구가 맞도록 쌓았다고 해서 ‘개이빨식 축성법’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고 이런 방식으로만 쌓으면 적이 밟고 기어오르기가 쉽잖아요. 그래서 겉면은 평평하게 했습니다. 

 


▲ 고구려의 개이빨식 축성법

 

성벽을 공격할 때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요. 첫째, 사다리를 놓고 기어올랐어요. 이를 방어하기 위해서 성벽에서 툭 튀어나오도록 ‘치’라는 것을 쌓았어요. 그래서 위에서 아래로만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옆에서나 뒤에서도 공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치’입니다. 성문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옹성’을 만들어서 사방에서 뱅 돌아가면서 공격할 수 있게 했습니다. 

 

둘째, 큰 돌을 팍 쏘아서 성벽을 때려서 무너뜨립니다. 그냥 벽돌 쌓듯이 쌓아놓으면 이렇게 공격했을 때 성벽이 와르르 무너집니다. 그런데 개이빨식으로 쌓으면 돌을 맞은 자리만 무너지고 나머지는 그대로입니다. 이런 방법들이 고구려인들이 성벽을 튼튼하게 쌓는 독특한 방법이었습니다.” 

 

청년들은 선조들의 지혜에 다시 한 번 놀라워했습니다. 그렇지만 현재 중국에서 복원하고 있는 성벽들은 고구려만의 견고하고 독특한 방식의 원형을 잘 살리지 못하고 있어 아쉬운 마음도 함께 들었습니다. 

 


 

환도산성을 나오는 길에는 버스 창밖으로 산성하 무덤떼를 볼 수 있었습니다. 현재 발굴 중이어서 버스에서 멀리서만 보아야 하는 것이 아쉬웠지만, 멀리서도 충분히 많은 무덤떼를 한눈에 볼 수 있었습니다. 

 


▲ 산성하 무덤떼

 

아침 10시 30분. 청년 역사기행단은 국내성에 도착했습니다. 환도산성에서 버스로 5분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고구려 2대 왕인 유리왕으로부터 제20대 장수왕 시기까지 250여 년간 수도였던 곳이 바로 국내성입니다. 스님과 청년들은 성의 북동쪽 모서리를 출발해서 북쪽 성벽을 지나 서쪽 성벽으로 깎은 다음 남쪽 성벽으로 꺾어지는 모서리까지 걸었습니다. 

 

무엇보다 성벽의 모서리 부분이 둥근 모양을 하고 있는 점이 특이했습니다. 스님은 “모서리를 둥글게 하고, 모서리 양쪽에 치를 쌓기도 했기 때문에 모서리를 방어하기에 훨씬 유리했다”고 강조했습니다. 

 


 

동쪽 성벽은 많이 허물어졌고 성벽 위에 건물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북쪽 성벽을 따라 걷다보니 두 개의 성문이 나왔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나중에 발견된 것인데, 위치상 위기에 처했을 때 재빠르게 환도산성으로 통할 수 있도록 한 문이 아니었나 추측하고 있다고 해서 정말 공감이 되었습니다. 

 


▲ 환도산성으로 통하기 위해 만든 북문으로 추측되는 성문터.

 

서쪽 성벽은 통구하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성벽이 구불구불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자연을 억지로 변형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활용하는 것은 현대인들이 배워야하는 선조들의 지혜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치와 배수구도 축조되어 있었는데 이는 적에 대한 방어뿐만 아니라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함이라고도 합니다. 또한 서문을 둘러싼 성벽은 서로 일직선 상에 있지 않고, 공자(工)형으로 된 성벽 사이에 성문이 나 있었습니다. 이것은 성벽 양쪽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상당히 참신해 보였습니다. 

 


▲ 공자(工)형으로 만든 서쪽 성문

 

성벽을 따라 걷는 중 강 건너 편에 북한의 산천이 보였습니다. 나무는 모두 벌목되어 뙈기밭으로 사용되고 있어 산의 기상이 느껴지지 않은 것에 비해 맞은편 중국의 산들은 울창한 숲이 조성되어 있어 너무나 대조가 되었습니다. 북한의 뙈기밭만 보면 정말 마음이 먹먹해 졌습니다. 

 


 

스님과 기행단은 남쪽 성벽으로 꺾어지는 모서리에서 둥근 모양을 한 성벽을 다시 한번 구경하는 것을 끝으로 국내성 답사를 모두 마쳤습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4시간 동안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고구려의 첫 수도인 홀본산성입니다. 산성 아래로는 비류수가 흐르고 있는데 현재 중국에서는 오녀산성으로 부르고 있었습니다. 산 입구에서 산성으로 향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이동하는데 저 멀리 산세의 외형이 잠깐 보였습니다. 그러나 비가 내리고 안개가 끼어서 웅장한 기세를 거의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청년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홀본산성에 올랐습니다. 

 


▲ 홀본산성

 

20여 분 지속되는 높은 계단길을 오르며 땀을 흠뻑 흘렸습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드디어 홀본산성 안으로 두 발을 내딛었습니다. 

 


▲ 서문으로 올라가는 계단

 

옹성의 모양을 하고 있는 서문에 대해 잠시 설명을 들은 후 본격적으로 산성 안의 곳곳에 대해 스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 홀본산성의 서쪽 성문

 

홀본산성은 그야말로 절벽 위에 산성이 있는 이었습니다. 서문을 통과하고 나서는 스님의 설명을 들으며 이곳저곳 평지를 계속 걸었는데, 마치 고구려의 주몽이 신하들을 이끌고 나라를 건국하는 모습이 연상되어 힘이 났습니다. 

 

특히 온돌이 있었던 건축 유지도 여러 개 볼 수 있었습니다. 온돌은 우리 민족에게서만 보이는 고유한 문화인데, 이곳이 고구려의 성이 틀림없구나 싶었습니다. 

 


▲ 건축 유지에서 발견된 온돌

 

드디어 기행단은 점장대에 이르렀습니다. 점장대는 원래 전망이 정말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인데 오늘은 안개가 자욱하여 산세와 산 중턱의 호수를 모두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마치 풍경이 훤히 보이는 듯 청년들은 환호를 지르며 즐거워했습니다. 대신에 점장대 옆 표지판에서 사진으로나마 풍경을 잠시 본 후 아쉬움을 뒤로하고 홀본산성을 내려왔습니다. 

 


 

8부 능선 정도에서는 동쪽 성벽과 동문을 만났습니다. 스님은 “정상 부위에는 임금을 비롯한 귀족들이 머물렀지만 이곳 8부 능선에는 백성들과 말들이 자리했을 것으로 보여진다”고 설명했습니다. 특히 동문은 공자형 성문으로 되어 있었는데 성벽 위로 달라붙어 살고 있는 이끼들이 인상 깊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동문 앞에서는 조별로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 동쪽 성문

 

오늘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많은 양의 비가 내렸는데, 고구려의 기상을 몸으로 느끼기라도 한 것일까요? 힘이 들어서 짜증을 낼 법도 한 데 청년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뛰고 발걸음은 더욱 가벼웠습니다. 이 성을 지키기 위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내렸을 병사들을 생각하니 이 정도 비쯤이야 가볍게 받아들여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총 2시간 30분에 걸쳐 산성을 둘러보고 저녁 식사 장소로 이동하였습니다. 저녁 7시 30분, 아쉽게도 오늘의 저녁 식사는 이번 역사기행에서의 마지막 식사였습니다. 스님은 이 기행이 안전하고 알차게 진행되기 위해 노력한 많은 분들을 소개하면서 서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역사기행 실무를 담당하던 아버지가 병환으로 쓰러지자 갑작스럽게 책임을 맡게 된 조신님을 스님이 먼저 소개되자 청년들은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조신님은 밝게 웃으며 1차와 2차에 걸친 지난 14일 동안의 역사기행 소감을 말했습니다. 

 


▲ 1차와 2차에 걸친 역사기행팀 실무를 담당한 조신님

 

“그동안 6년 정도 아빠를 따라 다녔는데, 그 때는 아빠가 모든 일을 다 하셨기 때문에 별로 안 힘들었는데요. 이번에는 제가 혼자서 숙소와 식당을 예약해야 하니까 좀 힘들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무사히 마칠 수 있어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그런데 지금 14일 정도 스님 모시고 다녔는데 아직 스님께서 저한테 행복 책을 주시지 않으셨어요. 그렇지만 저는 행복했습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행복하시기 바랍니다.”(모두 웃음)

 

소감을 들은 스님은 곧이어 조신님에게 새책 ‘행복’을 사인해서 선물했습니다. 

 


 

이어서 함께 진행을 맡아준 전홍길 선생님, 기행단이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게 뒷받침해 준 가이드님, 무엇보다 6일 동안 고된 일정을 차질 없이 완수할 수 있도록 버스를 운전해 준  기사님들에게 청년들은 열렬한 환호와 박수갈채로 감사의 마음을 표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각 조 조장님들이 나와 소정의 선물을 건내자 더욱더 후끈 열기가 달아올랐습니다. 

 


▲ 버스 기사님들에게 선물 전달

 

저녁 9시 40분. 저녁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청년 역사기행단은 스님을 모시고 마지막 정리 강연을 청해 들었습니다. 강연은 1시간 20분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그간 8박 9일 동안 우리는 무엇을 보고 듣고 느꼈는지 주욱 짚어준 스님은 마지막 무렵 통일의 필요성과 청년의 역할에 대해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변화로 나아갈 수 있으려면 창조적인 대응이 근본적인 대안인데 그것은 금방은 안 됩니다. 그리고 복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또 빈부격차를 줄이기 위해서 많이 가진 자의 것을 나누는 방식은 사회적 저항이 엄청납니다. 여러분도 일단 내 손에 들어온 것은 안 내놓으려 하잖아요. 남의 것은 ‘내 놓아라’ 하지만 자기 것은 안 내놓으려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복지 문제를 풀려고 하더라도 그냥 나누는 식으로는 풀기는 어렵고 약간의 성장을 해줘야 합니다. 즉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은 조금만 내고, 새로 들어올 돈에서는 많이 내 놓아라, 이것은 가능하지요. 내 손에 아직 안 들어왔으니까요 

 


 

그래서 복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성장이 좀 필요합니다. ‘고성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예요. 이렇게 완전히 정체 국면에 처하게 되면 실제로 빈부 격차 해소를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사회적으로 시행하려고 해도 저항이 엄청나고 혼란만 가중되어서 해결이 어려워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꼭 고성장이 아니더라도 3~4퍼센트의 성장을 유지해야 하고, 다음 창조적 대안을 제시해야 하고, 또 미국과 중국이 대결하는 속에서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자주성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여러 가지를 고려할 때 통일 문제보다 중요한건 없어요. 그리고 통일이 되면 영토가 늘어난다는 식의 물리적 사고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의 사고 속에 금기라는 것도 없어집니다. 우리는 늘 ‘무엇무엇은 안 된다. 조심해라!’ 이런 금기가 있잖아요. 이게 창조성을 가지는데 엄청난 장애입니다. 우리는 분단으로 인해 흑백논리에 갇혀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서 우리가 통일을 자주적으로 풀어나간다면 큰 에너지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소위 한국 사람은 ‘신바람’이라는 게 있잖아요.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서 한국 사회에 여러 가지 과제가 있고 한계가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통일만 된다고 모든 게 다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통일이 이 상황을 일점 돌파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과제가 될 것입니다.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역사의 주 무대로 등장하는 것이 과제이고, 과거 100년의 한을 통일로 풀어서 다음 100년의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한반도가 통일이 된다면 이 통일된 국가가 일본과 중국 등 주변국을 잘 견인해서 동아시아 공동체를 만들어서 번영하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그러면 21세기 말에는 세계 문명의 중심이 아시아로 옮겨지고 그 문명의 중심이 한국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전혀 엉뚱한 상상이 아니라 가능성이 있는 것이라면 그 가능성을 가지고 한 번 도전해 볼 만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려면 국가비전이 바로 서야 합니다. 또 우리 개개인이 그런 희망을 만들어서 연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무슨 100년 전처럼 혁명할 시기는 아니잖아요. 지금 우리 시대는 많은 사회적 과제를 혁신해나가면 되는 시대입니다. 혁신을 하려면 민주적인 절차를 밟아서 해야 하고, 민주적 절차를 밞아서 혁신을 하려면 정치 참여를 적극적으로 해야 합니다. 통일 지향적인 세력이 선거를 통해서 지지를 받아야 통일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비전을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것이 오늘 이 역사기행에서 결국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가야와 신라의 통합이 어떤 시너지 효과를 가져 왔는지, 작은 신라가 이렇게 역사의 주 무대로 올라올 때 화랑제도라는 것이 어떤 기여를 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은 부여에서 쫓겨 와서 나라를 세우는데도 다물(多勿) 사상이라는 목표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일을 할 때는 비전이 있어야 사람들로 하여금 행동도 나오게 하고 지속성도 생기는 거예요. 또 작은 일에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함께 하는 동료에 대한 소중함도 느끼게 되는 겁니다. 목표가 분명해야 이 일은 가능합니다. 저 사람이 있음으로 해서 목표가 이루어질 수 있다면 나는 그 동료를 정말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는 거예요. 경쟁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으로 대하지 않게 됩니다. 

 


 

이런 데서 여러분 개인으로는 조금 더 적극적인 삶을 가꾸어 나갔으면 하고요. 또 사회적으로는 청년 세대로서 사회적 책임의식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당부 말씀을 드리면서 역사기행을 마치겠습니다.”

 

참가자들은 30일 동안의 단식 하안거를 마치고 일반팀 역사기행단에 이어 청년 역사기행단까지 이끌어준 스님의 노고에 큰 박수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이렇게 감동의 일정을 함께 한 150여 명의 청년들 모두가 한국으로 돌아가서도 통일의병이 되어 왕성한 활동을 해주길 바래봅니다. 그래서 ‘통일을 해냈다’는 세대적 자부심을 가질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해 봅니다. 

 

내일은 8박 9일 동안의 역사기행 일정의 마지막 날입니다. 스님과 기행단은 고구려의 웅장한 기상이 잘 남아있는 백암산성을 둘러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역사기행을 모두 마칩니다. 심양에서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귀국할 예정입니다. 

 

※ 동북아 역사기행 기간 동안 발행되는 글은 참가자들의 도움으로 작성됩니다. 오늘 글의 스케치는 <진효순>님이, 강연 정리는 <박현주>님이, 사진촬영은 <권성준>님이 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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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의 통일을 발원하면서 러시아 연해주의 독립운동 성지 '신한촌'의 역사 회복과 재건을 위한 대중 여러분들의 후원금을 받습니다. 소정의 기금 출연으로 역사 회복에 동행하는 마음과 정성을 함께 모아 주시기 바랍니다.

 

- 계좌번호 : 국민은행 578601-01-272869

- 예금주 : (사)좋은벗들 

전체댓글 21

0/200

김지현

고구려탐방 또 언제있나요?
나이제한있나요?

2016-09-07 13:08:47

오유진

감사합니다 ~~♡♡

2016-08-23 02:50:21

김은지

이런 여행길이 있었군요
다음에 제 애들을 꼭 스님따라 보내고 싶습니다

2016-08-22 22:4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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