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7.11.19 가을 정토불교대학 특강
“육체가 죽으면 자아는 어떻게 되나요?”

스님은 매일 바쁜 하루를 보내지만 오늘은 특별히 더 바쁜 하루였습니다. 새벽 1시 30분에 인천 공항에 도착한 스님은 곧바로 문경으로 향했습니다. 문경 수련원에 도착하니 새벽 4시 30분이 되어 화엄반 행자님들의 예불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습니다.
이른 새벽에 무변심법사님이 준비해준 아침식사를 하고 급한 원고를 점검한 후 곧바로 6시부터 진행되고 있는 불교대학생 특강 수련에 들어갔습니다.

대강당에는 대전충청지부, 인천경기서부 지부 가을 불교대학생 190명이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을 기다렸습니다. 개인적인 질문보다 불교를 공부하면서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스님께 여쭙고 스님께서 법문을 해주시는 시간입니다. 모두 초롱초롱한 눈으로 스님의 한 말씀 한 말씀도 놓치고 않고 따라갔습니다.

스님은 ‘잘 주무셨는가요?’로 첫 안부를 물으시고는 즉문즉설을 시작하였습니다.

11명의 학생들의 질문에 3시간 동안 법문을 정성껏 해주셨습니다. 시간 관계상 질문을 다 받지 못한 학생들의 이름을 호명하시면서 안타까움을 달래주셨습니다.

그 중에서 자아와 자의식에 대한 질문을 하신 첫 번째 질문자와 스님의 대담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육체가 죽으면 자아는 어떻게 되나요? 육체가 소멸되면 자아는 그냥 육체와 같이 없어지는 건가요?”

“자아가 있어야 소멸이 되는지, 안 되는지 알 거 아니에요. ‘이 세상을 누가 만들었느냐?’ 는 질문의 요지는 ‘누가’ 아니에요? 그러면 이 질문에는 이미 ‘이 세상은 만들어졌다’는 게 전제되어 있잖아요. 이해하시겠어요? ‘만들었다’는 게 전제되어야 ‘누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 세상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누가’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잖아요. 그럼 제가 여러분께 질문을 한번 해 볼게요. 모래로 밥을 하면 몇 시간 만에 됩니까? 이 질문의 요지는 ‘밥이 되나, 안 되나’예요? ‘몇 시간’이에요?”

“몇 시간.”

“예, ‘몇 시간’이란 말이에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몇 시간 만에 될까?’ 연구를 한단 말이에요. ‘모래로 밥을 하면 도대체 밥통에서 몇 시간 만에 밥이 되어서 나올까?’ 이렇게 ‘몇 시간’에 집중할 때는 이미 여기에 ‘모래로 밥이 된다’는 게 전제가 돼있다는 거예요. 만약 모래로 밥이 안 된다면 몇 시간이라는 건 의미가 있어요, 없어요?”

(대중들) “없어요.”

“예, 없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지금 ‘모래로 밥을 하면 몇 시간 만에 되느냐?’는 질문을 하니까 ‘몇 시간 만에 될까?’ 이걸 갖고 연구하다가 ‘아이고, 모르겠다.’ 이런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질문에 벌써 ‘밥이 된다’는 전제가 되어있기 때문에 이때 ‘몇 시간’을 따라가는 건 ‘말귀에 걸려 넘어간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본질은 뭐예요? ‘밥이 안 된다.’ 이게 본질이란 말이에요. 안 되는데 ‘몇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럼 처음에 ‘밥 안 된다’ 그러면 질문자가 또 묻는단 말이에요. ‘내가 언제 된다, 안 된다는 걸 물었느냐?’고요. (모두 웃음) ‘모래로 밥을 하면 되니, 안 되니?’ 그럼 ‘안 된다’ 이렇게 대답하면 돼요. 그런데 ‘내가 되니, 안 되니를 물은 게 아니라 몇 시간 만에 되느냐고 물었다.’ 이 말이에요. 이렇게 다시 물어도 답은 ‘안된다.’ 이렇게 나가야 돼요. 그 질문은 ‘모래로 밥이 된다’는 전제에 따른 질문입니다. 그래서 이 질문을 받으면 여러분들은 엉뚱하게 끌려가버려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누가 창조해 냈느냐?’고 물으면 여러분들은 ‘누가’에 딱 집중이 되어서 자기도 모르게 ‘창조했다’는 걸 전제로써 받아들인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 세상을 누가 창조했는지, 안 했는지, 그건 전제가 안 되잖아요. 누가 창조했는지 우리가 어떻게 확인해요? 그런 것처럼 ‘내가 죽으면 내 영혼은 어디로 갑니까?’ 이 말 속에는 영혼이 있다는 게 전제되어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아요? 그러니까 ‘누가 창조했느냐?’ 이럴 때는 먼저 이 사물이 만들어진 건지, 저절로 있었던 건지, 어떻게 된 건지를 먼저 탐구해서 ‘아, 이게 누가 만들었구나.’ 하는 게 확인이 되어야 ‘그럼 누가 만들었노?’ 이렇게 다음 단계로 나아갈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나는 죽으면 내 영혼은 어디로 가느냐? 다음 생으로 윤회한다는데 어떻게 되는 거냐?’ 이런 말속에는 다 ‘너’와 구별되는 나만의 나라고 하는 고유한, 무슨 다이아몬드 같은 그런 알갱이가 있다는 게 전제가 되어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과연 그런 게 있을까?’ 이게 먼저 탐구가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내가 자동차를 한 대 사고, 너도 한 대 샀다, 나도 소나타를 사고, 너도 소나타를 샀다면, ‘그건 내 차고, 이거는 네 차야’라고 한다면, 내 차에는 내 차라고 하는, 저 차와 다른 내 차만의 고유한 어떤 실체, 또는 네 차라고 하는 네 차만의 고유한 실체가 있을까요? 그런데 부속을 하루에 100개씩 양쪽 차 모두 계속 교체한다면, 타이어도 교체하고, 핸들도 교체하고, 엔진도 교체해서 한 달 만에 100%를 교체해 버렸어요. 그래도 내 차는 내 차고, 네 차는 네 차지요? 물질로 따지면 벌써 두 대의 차가 다 바뀌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이건 계속 내 차이고, 이건 계속 네 차일까요? ‘이 차가 내 차다’ 할 때 ‘내 차’라고 할 고유한 실체가 없다는 것과 ‘차가 없다’는 것은 성격이 달라요. 차는 지금 작동하고 있잖아요. 내가 타고 다니고, 내가 운전하고, 다 하지요. 그럼 네 차는 네가 운전하고, 내 차는 내가 운전하니까 두 사람이 지금 움직이는 반경이 다 다르잖아요. 행동양식이 달라요. 그렇다고 네 차에 네 차라고 할 요소가 있고, 내 차에 내 차라고 할 요소가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특히 요즘은 알고리즘(Algorithm)이나 AI(Artificial Intelligence), 즉 인공지능이 나오니까 이런 문제가 더 하지요. 인공지능에는 인공지능 고유의 자아가 있을까요? 인공지능은 그냥 프로그램이잖아요. 짜준 대로 움직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들 각자의 자아는 형성된 거예요. 그렇게 프로그램이 짜져서 지금 그렇게 움직이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인공지능이 탑재된 로봇의 전기코드를 빼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전기코드를 빼버리면 스스로 작동을 못하지요.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의 육체가 멈추면 여러분들의 정신작용도 그냥 멈춰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다시 전기코드를 꽂으면 어떻게 될까요? 작동하겠지요. 그러니까 코드를 빼면 까무러쳐서 딱 멈췄다가 다시 꽂으면 또 작동하는 거예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에요.

그럼 여러분들은 ‘그렇게 생각하면 인생이 너무 허무하다’고 생각하겠지요? 왜 그런 생각을 할까요? 여러분들은 뭐가 ‘있어야 된다’는 전제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거예요. 이 세상을 누가 만들어야 의미가 있고, 안 만들었으면 허무해지는 거예요? ‘만들었다’는 전제를 갖고 있던 사람들은 ‘만들지 않았다’고 하면 허무해질 수도 있지요. ‘보물이 있다’는 전제 하에 보물을 찾다가 끝내 없다 그러면 허무해질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보물이 없다고 왜 허무해요? 없으면 그만이지요. 없으면 쓸데없이 찾는 노력을 안 해도 되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허무하다’ 할 때는 뭔가 전제된 데에 매달려서 거기에 집착되어있기 때문이고, 인생이 ‘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다’ 는데 그 ‘죽는다’는 용어를 여러분들은 ‘단견, 소멸’이라는 의미로 이해하기 때문이에요. 그건 변화의 한 과정이에요. 그래서 제가 파도에 빗대서 얘기하잖아요. 다만 물이 출렁거릴 뿐인데, 파도 하나에 집착을 하면 ‘생기고, 사라진다’ 는 용어가 생기는 거예요. ‘생기고 사라진다’는 인식이 여기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생긴 것도 아니고 사라진 것도 아니고 다만 변화할 뿐이에요.

이 마이크와 이 시계를 보고 ‘마이크가 크다. 시계가 작다’고 할 때 크다, 작다는 게 이 물건들에 있을까요, 우리 인식에 있을까요?”

“인식.”

“확실해요?”

“예.”

“예, 이런 건 다 인식 상의 문제예요. 이 시계가 이 마이크와 상대해서 인식이 될 때는 작다고 인식이 되고, 이 볼펜하고 상대해서 인식이 될 때는 크다고 인식이 되는 거예요. 이 시계는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고, 다만 존재할 뿐이에요. 그런데 내가 인식을 할 때는 이게 작다고 인식될 때도 있고, 크다고 인식될 때도 있고,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그건 단지 인식상의 문제예요. 인식상의 오류가 생긴 거는 어떤 거냐 하면, 작다고 인식된 거를 ‘객관적으로 작다’고 아는 게 인식상의 오류예요. 내가 이 상황에서 이건 작다고 인식할 뿐이지, 이게 작은 게 아니에요.

그런데 주관을 객관인 줄 착각하는 것, 이게 인식상의 오류예요. 이게 철학적인 용어로 ‘상을 짓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지금 ‘내’가 있는 것 같다는 자아의식을 갖고 있는 거예요. 자아가 있어서 자아의식이 생기는 게 아니고, 자아의식을 갖고 있다, 이 말이에요. 예를 들어, 여러분들의 존재는 못난이가 아닌데도 여러분들의 자아의식이 잘나고 싶어서 ‘나는 잘난이다’ 하는, 이러한 자아의식을 갖게 되면, 이 자아의식에서 현실의 자기를 볼 때 굉장한 못난이처럼 보이는 거예요. ‘나는 자존심이 없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사람이에요. 자기에 대한 그림을 너무 좋게 그려놓고, 그걸 기준으로 해서 현실에 있는 자신을 보니까 항상 자기가 부족한 것처럼 느끼는 거예요. 그러면 열등의식을 갖게 되지요. 여러분들은 그 자아의식을 현실의 자기보다 너무 크게 그려서 어떨 때는 열등의식에 빠지고, 어떨 때는 교만에 빠지고, 그러는 거예요.

그런 것처럼 우리들의 자아의식도 생겨난 거예요. 자아의식은 늘 바뀝니다. 남편과 아내가 얘기할 때는 육신만 갖고 나라 그러고, 이건 너라 그래요. 그런데 이웃과 얘기할 때는 너와 나를 같이 집어넣어서 ‘우리’라 그러잖아요. 우리를 나로 삼는다, 이 말이에요. 우리가 ‘우리다’ 할 때는 여기 있는 모두를 나로 삼아요. 그러니까 이 자아라고 하는 의식은 정해져 있는 게 아니고, 시시때때로 상황에 따라서 울타리를 치면서 생기는 거예요. 만약에 이 몸뚱이를 ‘나’라고 한다면 내 한 쪽 팔이 잘려버렸을 때는 그럼 내 자아가 좀 없어지는 게 됩니까? 말이 안 되잖아요. (모두 웃음)

우리가 앞으로 이 몸뚱이를 갈아 끼우는 시절이 올 거예요. 마치 자동차처럼. 지금은 갈아 끼우는 게 원품보다 기능면에 있어서 못 하지요. 이 원품은 유기체인데, 갈아 끼우는 의수, 의족, 의안, 이런 건 실물보다 못 하잖습니까. 그런데 앞으로는 갈아 끼는 게 실물보다 나아질 때가 옵니다. 원래 이런 것은 신체부자유자나 사고 난 사람을 치유하기 위해서 고안된 건데, 그렇게 했을 때 원품보다 더 기능이 좋아지는 걸 보면 멀쩡한 사람들도 갈아 낄까요, 안 갈아 낄까요?”

“갈아 껴요.”

“예, 그렇게 될 거예요. ‘과연 누가 그럴까?’ 하겠지만 여러분들도 이미 그러고 있잖아요. 원래 성형이라는 건 다친 사람을 위한 건데, 지금 멀쩡한 여러분도 다 성형하잖아요. (모두 웃음) 그러니까 자아라고 하는 의식이 순간, 순간 일어난다고 이해하면 됩니다. 그 자아라는 것은 한정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특정한 것을 자아라고 한다면, 즉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공간적으로도 한정돼있는 그런 것을 자아라고 한다면, 그런 건 없어요. 변하지 않고 항상한 ‘아’는 없다는 거예요. 자동차를 뜯어봤을 때 ‘이게 자동차의 본질이다’라고 할 게 없는 것과 같은 거예요. 그 용어의 의미가 ‘아무 것도 없다’ 이런 얘기는 아니지만요. 그 자동차에 자아가 있다면, 이 차 폐차하고 다른 자동차를 살 때 폐차할 차에서 뭘 하나 새 차로 옮겨야 될 거 아니에요? 그 안에 있는 자아가 이쪽 자동차로 옮겨가야 되니까요. 그런데 그럴 건 없잖아요.

다만 ‘프로그램’은 있어요. 자동차가 작동하는 원리가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또 인공지능에도 프로그램이 있지요. 그런데 그 프로그램이란 건 계속 조금씩 업그레이드되고, 수정되는 거예요. 그게 까르마이고, 업이에요. 사람들의 인식, 행동이 다른 건 프로그램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에요. 그 프로그램의 옛날 용어가 까르마이고, 업식이에요. 여러분들이 지금 움직이는 거, 그거 지금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는 거예요. 사람들의 감정, 인식, 이런 거 심리적으로 분석해서 들어가면 이런 거예요. 내가 이 프로그램에 마이크를 처음 입력시킬 때 ‘마이크’라고 입력했다면 어떤 사람이 마이크를 ‘북’이라 했을 때 프로그램에서는 ‘No’라는 반응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제일 먼저 입력시킬 때 ‘북’이라고 입력했다면 이걸 ‘마이크’라 했을 때 ‘No’라고 반응하겠지요. 그럴 때 여러분들은 ‘이게 어떻게 마이크야? 북이지’, ‘이게 어떻게 북이야? 마이크지.’ 이렇게 옳으니, 그르니, 맞니, 틀리니, 그러겠지만 사실 그건 그냥 프로그램의 반응일 뿐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의 감정 반응도 다만 프로그램의 반응일 뿐이에요.

이런 걸 봤을 때 우리는 거의 로봇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라는 게 그냥 프로그램에 의해서 좌우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감정적 반응을 하는 것도 다 프로그램에 따르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거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게 해탈이에요. 이런 공부가 미래사회로 갈수록 더 필요해요. 자, 이 정도 듣고 질문자는 뭐가 궁금한지 이제 한번 얘기해 보세요.”

“들을수록 알 것도 같은데...”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아야 계속 공부를 하지요. (모두 웃음) 더 공부해보세요.”

“예, 알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이 공부는, 지금 여러분들이 한 번에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스님의 설명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여러분들의 인식이 잘 교정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즉문즉설을 하면 이게 교정이 돼요. 질문자가 고뇌하는 문제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인식상의 오류가 수정됐다는 것뿐입니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스님이 해준 게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런데 현실은 수정하기가 쉬운데 여러분들의 관념은 수정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는 여러분들이 현실에서 실제적인 경험을 자꾸 더 쌓을 때 비로소 관념의 벽이 뚫리는 식으로 해결이 되는 거예요. 관념의 벽이 먼저 확 뚫려버리면 좋겠지만 이런 식으로 공부해서는 뚫기가 힘들고, 엄청나게 집중을 해야 가능합니다. 그걸 조금 맛볼 수 있는 데가 깨달음의 장이에요.”

마지막으로 스님께서는 4차 산업시대에는 사고가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는 말씀하시면서 불교 공부를 통해서 더 유연해지고 더 행복해지기를 당부하셨습니다. 평소의 삶을 재미있게 살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시면서 즉문즉설은 마무리되었습니다.

‘이대로만 하세요.’ 회향식때 법사님께서 해주신 말씀입니다. 인연의 시작이자 첫 관문인 정토불교대학에서 처음에는 위로를 받았다면 이제는 수행을 지속해 나가면서 자기를 알아가고 자기 힘으로 넘어가보는 것, 자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알게 된다 하시며 ‘해보면 잘했구나’하는 것을 졸업식 때 느끼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가을불교대학 학생들의 특강 일정을 마무리했습니다.

가을불교대학 특강수련 즉문즉설을 마치자 스님은 명상원에서 수련을 하고 있는 화엄반 행자님들과 시간을 가졌습니다. 열 번째 정기수련을 하고 있는 행자님들은 스님께 ‘일상에서의 수행’, ‘행자 교육 중에 어려운 점’ 등을 질문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한 행자님이 질문한 한 가지 내용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스님 말씀을 듣고 가르침을 듣다보면 좋지만 그에 반해 저희는 참 많이 모자라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실천은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살기 바쁘고 활동하기에 바쁩니다. 이렇게 스님께 또 정토회에서 제공하는 것만 얻기에 급급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저희가 법사 교육을 받는다고 할 때, 스님 하시는 역할을 나누어 한다고 생각하라는 지침을 받는데 정말 그게 가능할까, 스님을 대신해서 역할을 하는 게 가능할까 싶습니다.”

“부처님 당시를 살펴볼까요. 어떤 일을 할 때, 개척 분야와 유지 분야는 성격이 다릅니다. 부처님의 영역이 방대하게 컸던 것은 개척 분야였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이교도들과 논쟁하고 왕들을 교화했던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존립이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데서 시작하는 거잖아요. 그런 부처님의 활동 이후에는 새로운 권위가 생겼다고 볼 수 있죠. 부처님의 제자라는 것만으로도 권위가 생겼어요. 그래서 개척은 아무나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능력을 겸하지 않으면 어렵습니다.

그런데 수행이 개인의 능력이 뛰어난 것을 중심으로 둔다면 부처님이 신통력을 금했다 하는 것에 어긋납니다. 그의 번뇌가 사라지고 행복한 것이 해탈이고 열반이지 그 사람의 능력이 어떤가를 가지고 평가 기준으로 삼는 것은 세속적인 평가의 기준일 뿐입니다.

여러분도 능력 중심으로 보기 쉽지요. 그럴 때 수행의 본분을 놓치기 쉽습니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모자이크 붓다’라는 것은 각 개인은 부족해도 정토회라는 상가가 가지고 있는 파워로 세상을 물들여나가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 수행이 담보가 되어야 하는데 개인 수행이 담보가 안 되고 정토회라는 새로운 권위에만 편승하면 수행의 본분을 놓쳐 버리게 되고, 이렇게 되면 세속으로의 종교화 과정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려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여러분이 일을 할 때, 돈이 궁하게 되면 ‘돈을 효과적으로 쓸 수 있다’는 효율에 빠져서 기복을 합리화 할 수 있습니다. 인간 개개인이 가지는 기복성은 수용해도 정토회가 기복성을 조장하거나 법사가 기복성을 조장하는 것은 엄격히 금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능력도 필요하지만 수행적 관점이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이 흔들리는 것은 능력보다 수행적 관점이 부족해서입니다. 승려에 대해서 의미부여하는 것도 수행적 관점이 덜 잡혀서 그렇습니다. 반대로 승려에 대해서 배척하는 것도 수행적 관점이 덜 잡혀서 그렇습니다. 승려를 보통 사람 이상으로 보기 때문에 특별히 보거나 비판적으로 보게 되는데 그것이 수행적 관점이 덜 잡혔다는 거예요.

그래서 법사 수계를 받을 때, 자기 아이덴티티가 잡혀야 해요. ‘나는 수행자다.’라는 겁니다. 수행자를 종교에서 쓰는 의미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해탈과 열반으로 나아가는 이 길, 이웃과 함께 나아가는 이 길로 관점을 잡아서 자기가 최고의 수행자로 나아가야 합니다. 밖에 따로 있는 어떤 누군가나 어떤 조직이 가는 것이 아니지요. 그 관점이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는 권력 있는 사람, 지위 있는 사람을 보면 위축되는 게 있어요. 그것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부처님이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 비굴하지 말고 당당해라’ 라고 하신 말씀이 있지요. 비굴과 교만은 어떤 때에 나타날까요? 돈에 대해 집착하면 1억 가진 사람에게 나도 모르게 비굴해지고 1백만 원 가진 사람에게 나도 모르게 교만해집니다. 왜 차별하는가? 돈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1억 가진 사람을 비난하는 것이 당당한 것도 아니고, 돈 1억을 가졌다고 해서 특별히 비굴하게 대하지도 않아야 한다는 겁니다. 돈이 더 많아도, 지위가 더 높아도, 나는 아무런 비굴함 없이 상대를 평등하게 대하면 다른 사람이 볼 때 나를 당당하다고 평가합니다. 비굴하지 않으면 ‘참 사람이 당당하다’고 평가합니다. 세상에서는 ‘이 사람 높고, 저 사람 낮다’ 하는데 우리는 똑같이 대하면 ‘겸손하다’라고 평가하는 거예요. 내가 달리 행동해서 겸손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차이 있게 대하는데 우리는 같이 대하니 ‘당당하다, 겸손하다’ 라고 하는 겁니다. 핵심은 평등하게 대하라는 거에요.

나이든 사람이 젊은 사람과 같이 대화를 나누면 겸손하다고 평가하지요? 그럴 때 겸손이라는 용어를 씁니다. 수행자에게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것이 겸손하다는 것, 당당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차별을 하는데 우리가 평등하게 하니 겸손하고 당당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특별히 아무것도 할 게 없습니다. 평상심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이런 인연에 부딪히면 겸손하다고 하고, 저런 인연에 부딪히면 당당하다고 평가되는 거예요. 이 컵이 여기 가면 크게도 저기 가면 작게도 표현되잖습니까.

우리는 오랫동안 불평등 속에 살아왔기 때문에 위축이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은 완전히 극복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우리는 극복이 조금 되었다고는 해도 무의식 속에 극복이 덜 되었다고 할 수 있죠. 비교적 다른 사람보다는 낫지만 약간은 위축되었다거나 목에 힘이 들어가거나 하는 것이 있어요.

제가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면 자기가 있는 인연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교만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자기가 속한 사회 속에서 주로 대장 역할을 하면 교만함이 배고, 위에 어른을 모시면 겸손함이 묻어 보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요소가 있어요. 아직 사회적 권위를 못 가지니까 드러나지 않지만 머리를 깎으면 그런 모습이 금방 드러납니다. 그게 형상의 힘입니다.

보통 살아온 습관이 있어서 위축되게 살아온 사람은 겸손해 보여서 좋은 면이 있는데 당당하지 못해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서 역할 분담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 사람의 인격으로 모든 상황을 다 맞추기 어렵습니다. 부처님은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이 있었는데 실제로는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이 있기는 어려우니까 사투리로 말하자면 ‘어울렁 부처’를 만들자는 것이죠. 그게 모자이크 붓다입니다.

불교 공부를 하다보면 점점 당당해집니다. 위축된 마음이 펴집니다. 허리는 펴지고 고개는 숙여집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허리는 잘 안 펴지고 고개는 잘 안 숙여지는 것 같아요.”

스님은 ‘어울렁 부처’를 이야기 하면서 웃었습니다. 모자이크 붓다의 또 다른 우리말 표현, ‘어울렁 부처’를 들으며 화엄반 행자님들도 즐겁게 웃었습니다. 비록 아직 내 몸에 밴 습관으로 허리는 잘 안 펴지고 고개가 잘 안 숙여지는 상태에 있지만 현재의 내 모습을 알아서 편안하고, 앞으로를 기약할 수 있어서 기죽지 않을 수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두 시간 가량 스님은 화엄반 행자님들과의 시간을 가진 뒤, 함께 사진을 찍고 서둘러 다음 일정인 두북으로 향했습니다. 두북 밭에는 지난 8월에 심은 무와 배추가 잘 자라서 올 겨울 김장은 시장에서 구입하지 않고 직접 생산한 것으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고영훈, 임혜진(글), 김정아(사진), 정란희(녹취), 박효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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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미래

이미 뇌과학에서 밝혀진 사항입니다.
우리는 느끼고 운동하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나\' 또는 영혼을 가정하고 이것이 느낌이나 행위의 주체라고 생각한다.
햇빛을 쬐면 덥다. 에너지가 떨어지면 배고프고 밥을 먹는다. 이것을 영혼이나 나라는 존재자체가 있어서 내가 덥고 내가 배고프고 영혼이 몸을 움직여서 밥을 먹는다고 생각한다. 실상은 육체가 더움을 느끼고 내 몸에 에너지가 떨어져서 육체가 배고픔을 느끼고 결과로 에너지를 획득하기 위해 몸이 움직인것 뿐이다
세포의 진화과정에서 식물세포는 엽록체를 지니고 광합성을 통해 자체적으로 에너지를 생산하게 되었다. 그러지 못한 동물세포는 에너지를 외부에서 획득해야 된다. 그래서 먹이가 있는곳을 감지하고 그쪽으로 운동하고 먹이를 획득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단세포동물,모기,인간 모두 마찬가지이다.
모기나 지렁이도 뜨거우면 피하고 에너지를 획득하기 위해 먹이방향으로 운동하고 먹이를 획득한다. 영혼이 있거나 내가 저걸 먹어야지 하는 의식이 없어도 그렇게 한다. 결국 의식보다 느낌,운동이 먼저 발생한 것이다. 의식이라는것은 운동이 내재화된 것이다. 뇌는 생각하라고 있는것보다는 운동을 통제하기 위해 있는것이다. 성게는 어릴때 움직일때는 뇌가 있지만 바위에 고착되고 나서는 뇌를 먹어버린다.
씨피유같은 하드웨어가 있고 여기에 전기에너지가 들어가면 컴뷰터는 연산한다. 육체인 뇌구조가 있고 포도당같은 에너지가 공급되면 뇌도 연산하고 느끼고 또 상상하고 생각한다. 에너지가 떨어진 컴퓨터는 어떻게 되는가? 그냥 고철이고 녹슬어간다. 죽으면 에너지가 떨어진 육체는 썩어갈 뿐이다. 뇌과학이 밝혀낸 의식의 발생이다.
뇌구조를 본따 만든 알파고에 전기를 넣었더니 생각하고 바둑천재가 된것이다.
허무하고 불편하지만 이것이 진실이다. 나쁜짓을 한 전두환,이명박이 천벌을 받았으면 좋겠고 죽어서라도 꼭 지옥에 가는게 사회정의상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않다.허무하다고 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젖소가 의식이 있다면 물을 것이다. 내가 사람들한테 우유나 주려고 태어난 것인가? 허무하지만 대답은 그렇지 않은가? 태어남에 목적이 있는가? 암수가 교미해서 태어났을뿐 허무하다고 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2017-12-02 10:50:04

hanarumlife

그러므로 아직 알 수 없다. 가 답입니다.
생각의 순서와 존재의 타당성은 다른 주제이거든요.

2017-11-27 15:02:27

고경희

최고의 수행자로 부지런히 갑니다~^^

2017-11-26 10: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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