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양평법당
깨달음을 향한 끊임없는 되새김질

천일결사1 기도를 마친 이른 아침, 긴장한 마음으로 마주한 모니터 너머에 온화한 미소를 띤 오정민 님이 반가운 인사를 건넵니다. 코로나가 바꾼 인터뷰 풍경입니다. 오정민 님은 인터뷰 요청을 받고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낼까 며칠을 고민했다 합니다. 고민하다 보니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정리할 수 있어 좋았다고 했습니다.

미리 만들어둔 질문 목록은 옆으로 밀쳐두고 오정민 님이 잔잔히 풀어내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정진으로 법당의 중심을 잡아주는 것은 물론 다양한 봉사와 법회까지 가볍게 해내는 울림 깊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통일체육축전 봉사(왼쪽 첫 번째)
▲ 통일체육축전 봉사(왼쪽 첫 번째)

어머니의 죽음과 어두운 그림자

16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는 자신의 처지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돌아가시던 순간까지 몸과 마음의 고통 속에 잠겨 힘들게 돌아가셨습니다. 한창 사춘기에 접어든 여린 소녀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그 후로 삶에 대한 회의가 조금씩 마음을 짓눌렀습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내색하지 못했습니다.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늦둥이 막내로 태어나 부모님의 사랑을 부족함 없이 받으며 자랐는데도 어려서부터 늘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마음은 혼돈 속에서 헤매고 있었지만, 남들이 보기에 저는 조용하고 착실하게 학교생활 잘하는 모범생이었습니다. 바쁜 학교생활은 물론 이것저것 배울 것을 찾아 부지런히 움직이면서도 또 다른 배울 것이 없나 끊임없이 찾았습니다. 그렇게 저 스스로를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때 저는 무엇인가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음 복판엔 해결하지 못한 묵직한 돌덩이가 자리 잡고 있는데 그 마음을 직면하기가 두려워 회피하려고만 했던 겁니다.

'두고 보자' 하는 사이

대학을 졸업할 무렵 아버지가 재혼하여 새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할머니까지 3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었는데도 어디 마음 붙일 데가 없어 집은 싸늘하게 느껴졌습니다. 안 그래도 밖에서 보내던 시간이 더 많던 저는 그 후로 더 집에 붙어있질 않았습니다. 그러다 한 도자기 공방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정해진 시간만 수업을 받고 돌아갈 때, 저는 온종일 공방에 붙어살다시피 하며 도자기를 배웠습니다.

그때 공방의 선생님이 지금의 남편입니다.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앳된 총각 선생님에게 저는 쉽지 않은 학생이었습니다. 남편은 그런 저를 ‘두고 보자’하는 심정으로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저 역시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은 젊은 선생님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서로 ‘두고 보자’하는 사이, 어느새 우리 둘은 잠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은 사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스물일곱 남편이 스물여덟, 마음 붙일 데 없는 집을 떠나 가정을 꾸리고 싶은 마음에 결혼을 했습니다.

기대와는 달랐던 결혼생활

하지만 결혼생활은 제 기대와는 반대로 흘러갔습니다. 신혼 시절부터 남편은 외박이 잦았습니다. 새벽 작업 때문에 밤을 새울 때도 있었지만,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새벽에 들어오거나 아예 들어오지 않는 때가 많았습니다. 남편은 결혼 전 생활방식을 바꾸려하지 않았고, 저는 여전히 마음 붙일 데가 없었습니다. 그때 큰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는데, 태교를 제대로 못 했습니다. 그 때문에 큰아이가 자라면서 힘들어하거나 불안한 모습을 보일 때면 미안한 마음이 컸습니다.

양평법당에서 오정민 님
▲ 양평법당에서 오정민 님

남편이 공방을 확장하면서 일이 많아지자 저도 남편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하루종일 남편과 붙어 지내니 더 자주 부딪혔고 불화도 심해졌습니다. 남편은 속에 있는 말을 있는 대로 다 꺼내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인데 저는 회피하려고만 했습니다. 밖에선 마냥 호인인 남편은 스트레스를 집에서 다 풀어냈습니다. 그 성격을 다 받아주자니 저도 힘들었지만, 아이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줄 것 같아 더 걱정되었습니다. 아이들을 잘 키워야 한다는 마음의 부담이 컸습니다. 셋째가 태어난 후로 그런 마음의 부담이 더 무거워졌습니다.

남편과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있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공방 일이 조금씩 힘들어지던 시기이기도 해서 학습지 교사 일을 시작했습니다. 일을 하느라 밖에 있는 시간에는 남편과 부딪힐 일이 없으니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조금이나마 편했습니다. 하지만, 일을 마치고 밤늦게 들어가면 아이들은 그때까지 저녁도 챙겨 먹지 못하고 있기 일쑤였습니다. 남편은 밖으로만 돌며 아이들을 제대로 챙기지 않았습니다. 학습지 교사 일에다가 집안일까지 할 일은 더 많아졌습니다. 남편에 대한 원망은 점점 커졌고, 저는 마음 붙일 데가 간절히 필요했습니다.

그 무렵 평소 알고 지내던 지인과 함께 근처 절에 다니며 백일기도를 드리고 법문도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엔 수행이 뭔지 정확히 알지도 못해서 마음을 닦는다기보다는 기복적인 마음이 컸습니다. 큰아이 대학 잘 가게 해달라며 백일기도를 했고, 법문을 듣는 것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절에 다니기 시작한 후로도 마음은 편안해지지 않았습니다. 절에서 기도를 드리는 동안에 잠시 찾아온 평온함은 집에 돌아와 남편과 부딪히기 무섭게 사라져버렸습니다.

정일사[^각주3] 정진 후(위줄 왼쪽 첫번째)
▲ 정일사[^각주3] 정진 후(위줄 왼쪽 첫번째)

정토회를 만나 알게된 수행

그때 절에 함께 다니던 지인이 정토회라는 데가 있다며 함께 가보자 했습니다. 법륜 스님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던 때라 절도 아니고 정토회라는 이름이 낯설기도 했지만 절에서 했던 불교 공부를 좀더 깊이있게 하고 싶었습니다.

정토불교대학에 다니면서 처음으로 수행이라는 게 뭔지 알게 되었습니다. 새벽마다 천일결사기도를 하면서 저를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남편을 원망하는 마음을 돌이켜보니 남편도 힘든 일이 많아서 그랬겠다 이해하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남편은 갓난아이 때부터 세 살 때까지 할머니 댁에 맡겨져 자랐다고 합니다. 부모님이 일이 바빠 갓난아이를 돌볼 여력이 안 되어 몇 년 동안 시골 할머니 댁에 맡겼고 합니다. 남편은 깨어있을 때뿐 아니라 잠을 잘 때도 끊임없이 뒤척이며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는데, 무의식에 자리 잡은 불안함 때문에 그랬구나 싶은 생각이 들며 남편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해하는 마음을 낸다고 남편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공방이 점점 어려워지자, 남편은 펜션을 하겠다 했습니다. 일이 힘들어지니 또 남편에 대한 원망이 올라왔습니다. 펜션 일이라는 게 남이 놀다간 뒷자리를 치우고 정리를 하는 잡일이 많아서 그리 녹록지 않은 일입니다. 펜션 일을 하면서 ‘내가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닌데, 부족함 없이 자라고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인데 남편 만나 이 고생을 한다’ 싶어 원망하는 마음이 점점 커졌습니다.

그렇게 바쁘고 힘든 나날을 보내던 와중에 정토불교대학에서 수업 때 영상 봉사를 맡아달라 했습니다. 바빠서 못한다는 마음보다는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자신 없는 마음이 앞섰습니다. 배워서 하면 되는 거니 부담 갖지 말라는 총무님 말에 소임을 맡았고, 잘 모르는 컴퓨터를 배워가며 수업 때마다 참석해 봉사를 했습니다. 일단 첫 수업에서 영상을 무사히 잘 올리고 나니 '내가 해냈구나' 하는 뿌듯한 마음과 봉사를 통해 쓰일 수 있다는 보람도 알게 되었습니다. 영상 봉사하는 일 년이 즐거웠습니다.

꼭 붙잡고 가는 기도와 봉사

그런데 정토회에 참여하는 시간이 늘어나자 남편의 반대가 점점 심해졌고, 급기야 정토회 봉사하고 싶으면 이혼하고 하라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이번엔 저도 물러서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금껏 두려움을 외면하고 도망치려고만 해왔다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이번만은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이든 두려움과 정면으로 마주하자, 피하지 말자' 생각했습니다. 남편도 그런 저의 확고한 의지를 조금이나마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이혼의 위기를 겪으면서도 수행을 놓지 않았습니다.

2015년 가을불대 졸업식(오른쪽)
▲ 2015년 가을불대 졸업식(오른쪽)

펜션 운영을 그만두고 식당을 열게 되면서 처음 겪고 해내야 하는 일이 쏟아졌습니다. 정토회 소임이나 법회에 참석할 시간을 내기도 벅찰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때 경전반을 다니고 있었는데, 힘들다는 이유로 그만두고 싶지 않았습니다. 매번 수업이 끝나기도 전에 나와야 해서 졸업을 못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도반들의 도움으로 졸업도 할 수 있었습니다. 영상 봉사를 마치고 새로 맡게 된 회계 봉사는 짬이 날 때마다 잠깐씩 정토회 사무실에 들러 컴퓨터 작업을 끝내고 돌아가는 식으로 겨우 이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법회 참석도 못 하는데다, 회계 봉사는 혼자서 하는 일이어서 도반들을 만날 기회가 없었습니다. 도반들과 마음 나누기를 하며 마음을 풀어놓지도 못하니 봉사가 즐겁지 않았고, 이 힘든 상황에서 정토회를 계속 다녀야 하는 건지 회의가 들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천일 결사 기도와 봉사 소임은 놓지 않았습니다. 그것마저 놓아버리면 정토회와 이어지는 가느다란 끈마저 놓칠 것 같아 더 꼭 붙들고 놓지 않았습니다.

되새김질 하듯 들여다 본 내 마음

식당 일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일도 익숙해질 즈음, 새물정진2에 참여하면서 '내 마음을 가감 없이 드러내놓아야 문제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새물정진 때, '남편의 마음을 이해하지만 공감하고 받아주지 못하는 내가 참 힘들다'고 법사님께 질문을 했는데, ‘남편 문제는 남편의 몫이다.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할 수 없는 부분으로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라는 법사님 말씀을 듣고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그 후로 남편을 대하는 마음이 많이 편안해졌습니다. 그런 제 마음을 느껴 남편도 같이 편안해졌는지 그렇게 험하던 남편의 잠버릇이 놀랄 만큼 차분해졌습니다. 감정을 말로 다 풀어내는 성격은 여전하지만 듣는 제 마음이 편안하니 크게 걸릴 것이 없습니다. 남편 탓이라 여겼던 일들을 돌아보며 제 문제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어느 날인가는 다 큰 아들이 저를 몰아붙인 적이 있습니다. 다른 때였다면 그런 아들에게 서운한 마음이 앞섰을 텐데 그날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운한 마음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서운함은 마음 한쪽으로 제쳐놓고 제 마음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습니다.

식당 일로 바쁠 때도 일을 하며 그때 마음이 어땠나,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습니다. 소가 되새김질을 하듯 제 생각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탁 하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아! 남편도 이런 나 때문에 답답하고 힘들었겠구나, 아이들도 그랬겠구나!’

그 순간 이상하게 마음이 환해졌습니다.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환희심이 일어났습니다. 수행을 통해 큰 봉우리 하나를 넘는 순간이었습니다.

모둠활동(아래줄 오른쪽)
▲ 모둠활동(아래줄 오른쪽)

수행을 멈출 수 없는 이유

수행을 한다고 해서 마음이 늘 평온한 것은 아니지만 예전처럼 크게 출렁이지도 않습니다. 법사님과의 간담회가 있을 때마다 여전히 남편 문제를 질문합니다. 질문을 하면서 제가 듣고 싶은 답을 기대하는 마음을 새삼 알아차릴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부끄럽다 생각하지 않고 마음을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내놓습니다. 이것도 수행의 일부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남편도 이제 제가 정토회 활동하는 것을 드러내놓고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미안한 마음이 컸던 큰아이와도 이제는 편안해져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편안해지니 주변이 밝아지고 편안해지는 게 눈에 보입니다. 수행을 멈출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무뚝뚝하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막내딸인 저에게 사랑을 주셨던 아버지는 4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를 편안하게 보내드릴 수 있었던 것은 수행을 통해 죽음을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죽음으로 생긴 어두운 그림자도 비로소 걷어낼 수 있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어린 자식들을 두고 떠나야 했던 어머니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습니다.

여전히 잠깐 방심하면 자만심이 올라오는 저를 알아차립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을 들여다보고 수행을 꾸준히 이어나갑니다. 꾸준한 수행만이 저와 주변을 편안하게 하는 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아침에 일어나면 300배 정진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이제 일상이 되어버린 수행이 살아가는 힘이 되고 한걸음씩 나아가는 용기가 됩니다.


화낼 일 하나 없이 살았을 것만 같은 오정민 님의 평온한 모습이 눈물 나는 수행의 결실이라는 걸 알고 나니 부끄러워집니다. 한편으론 용기도 얻습니다. 수행 이야기를 듣는 사이, 희망리포터도 모르게 조금씩 물들어갑니다.

글_김진영 희망리포터(남양주정토회 양평법당)
편집_허란희(용인정토회 용인법당)


  1. 천일결사 정토회는 개인의 행복과 정토세상 실현을 위해 1993년 3월 만일결사를 시작. 3년을 정진하면 개인의 의식 흐름이 바뀌고, 30년(만일)을 정진하면 한 사회가 바뀔 수 있다는 믿음으로 3년(천일) 단위로 천일결사 정진을 이어오고 있음.  

  2. 새물정진정일사 프로그램을 마친 정토회 신규 활동가를 대상으로 하는 수련프로그램. 

전체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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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재왕

잘 읽었습니다. 내어주신 도반님과 리포터님, 감사합니다. 큰 힘을 얻습니다.

2021-03-21 07:26:46

나부터

말씀 감사합니다.

2021-03-19 06:08:11

박신영

수행이 큰보약임을 도반님을 보며 저도 부지런히 수행의 끈을 놓지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 마음을 내어서 나누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2021-03-19 06: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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