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5.10.6 (오전) 백담사 조계종립 기본선원 초청법회

▲ 백담사 

 

안녕하세요. 오늘 법륜 스님은 오전에 조계종립 기본선원인 백담사에서 교과 안거를 하고 있는 사미, 사미니 스님들이 초청한 법회에 참석해 법문했습니다. 오후에는 동대문구민회관에서 청년들을 위해 즉문즉설 강연을 했습니다. 먼저 백담사 기본선원 초청법회 소식부터 전해드리겠습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대중들보다 일찍 예불과 기도를 마친 스님은 5시에 서울 정토회관을 출발해 백담사로 향했습니다. 백담사 기본선원은 비구게를 받기 전 4년 과정으로 공부를 하는 곳입니다. 갓 출가한 스님들에게 참선, 간경, 예경, 의식, 가람수호 등을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곳인데 오늘은 일과 수행이 하나된 삶을 몸소 실천하며 모범을 보여주고 있는 법륜 스님을 특별 초청해 법문을 듣는 시간으로 마련되었습니다. 

 

백담사로 향하는 길에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러 국수 한그릇으로 아침 식사를 한 후 아침 7시 20분 무렵에 백담사에 도착했습니다. 울긋불긋한 단풍이 벌써 온 산을 수놓기 시작하고 있었고, 특히 백담사로 들어가는 계곡은 크고 작은 연못과 햐얀색의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절경을 보여주었습니다. 다만 가뭄으로 인해 계곡이 바닥을 드러낸 곳이 곳곳에 보여 많이 아쉽기도 했습니다. 

 


▲ 백담사 계곡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다리를 건너 일주문을 지나자 시봉 스님이 마중을 나와 선원장 스님이 머무르는 방으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이곳 기본선원의 선원장인 선룡 스님은 반가운 표정으로 스님 일행을 맞이해 주었습니다. 담소를 나누다가 경내를 둘러본 후 선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기본선원 안에 큰 선방인 검인당에는 교과안거 중인 120여명의 스님들이 장삼을 입고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스님은 약간 경직된 분위기를 의식했는지 환한 웃음을 내보이며 “공부 잘 하고 계세요?” 라고 물음을 던졌습니다. 그러면서 편안한 가운데 이야기를 해보자며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과 편안한 가운데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요즘 일반 대중들과도 일방적인 강의는 거의 하지 않습니다. 개인의 인생살이에서 어렵거나 궁금한 점을 먼저 물으면 거기에 맞춰서 대화를 합니다. 부처님이 초기에 대기설법(對機設法)을 하신 게 다 그랬어요. 대중의 자기 고뇌에 따라 부처님께서 응답하셨다고 하지요. 선불교의 초기 취지도 현란한 교리나 사상이 아니라 삶 속에서 생겨나는 의문을 바로 주고받으면서 마음에 계합(契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화 된달까, 형식화 되면서 자꾸 복잡해지고 제도화 되다 보니 권위주의적이 된 것 같아요. 그러니 오늘만큼은 가능하면 불교의 원형의 모습을 어떻게 닮을까, 어떻게 원형으로 돌아갈까를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은 불교의 원형으로 돌아가보는 시간이 되자는 말씀으로 법문이 시작되었습니다. 법문을 듣는 스님들의 모습은 아주 장엄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우선 스님은 전 세계에는 ‘테라바타’, ‘마하야나’, ‘탄트라’, ‘선’이라는 네 종류의 불교가 있는데 이런 다양한 불교를 포용해 내려면 부처님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살펴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다양한 불교를 하나로 이해하고 포용하려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뿌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뿌리로 돌아간다는 건 부처님의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분은 어떤 생각을 하셨고, 어떤 말을 하셨고, 어떤 행동을 하셨느냐? 어떤 환경에 처한 사람에게 어떤 설법을 하셨느냐? 다시 말해 역사적, 사회적, 자연적 조건 속에서 그 분과 그 분의 삶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또 그 분에게 질문하는 대중들도 그냥 대중이 아니라 어떤 환경에 처한 어떤 고뇌를 가진 사람이었는지 살펴야 붓다께서 내린 처방의 맥락과 그 가르침을 비교적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게 잘 안 되면 언어에 집착해서 글자나 말에 끄달리게 됩니다. 언어나 말을 절대화시키면 삶의 현실과 점점 유리되고 맙니다. 관념적이 되거나, 권위주의가 되거나, 형식화되어서 결국에는 껍데기만 남고 말아요.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어떻게 공부하셨는지에 관계없이 이런 문제의식을 가져주면 좋겠습니다.

 

‘부처님이 어떤 분이신가? 인도의 자연환경은 어떻고, 부처님이 태어나실 때의 사회적인 조건은 어땠는가? 남녀 차별과 계급 차별은 어떤 상태였고 정치적 조건은 어땠는가? 이런 환경에서 그 분이 태어나서 어떤 고뇌를 했고, 어떤 문제의식을 가졌는가? 왕자로 태어나서 왕이 될 예정이었고 결혼해서 자식까지 둔 사람이 왜 출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이렇게 그 분의 고뇌를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그 고뇌가 이해되어야 출가의 의미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출가한 뒤에는 6년간 어떤 수행을 했는가. 스승을 찾아다녔고, 또 스승을 떠났습니다. 그냥 ‘6년 고행했다’고 하지만 그 6년의 고행 기간 동안 어떤 삶의 여정을 겪었는지를 우리가 이해해야 해요.

 


 

인류 역사상 붓다가 가장 독특하다고 손꼽히는 것은 바로 중도(中道)를 발견하셨다는 거예요. 다른 건 다 인도에 있던 것을 그 분도 따라 하셨어요. 그러나 이런 삶과 고행 끝에 붓다는 중도를 발견하셨고, 그 중도에 의한 정진을 통해서 마침내 자신의 모든 번뇌가 사라지는 열반, 니르바나를 경험하셨습니다. 그래서 붓다는 ‘이것이 고뇌의 최후라 선언하노라’라고 말씀하시고, 여전히 깨닫기 전의 자신처럼 고뇌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나누어서 다른 사람들도 그 고뇌에서 벗어나도록 인도하셨어요. 이렇게 해서 우리가 말하는 소위 불교라고 하는 것이 형성되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초기의 상가는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불교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지금 우리가 아는 불교는 제도화되고 종교화된 불교지만, 부처님과 초기 제자들은 아직 제도화되기 전, 종교화되기 전에 그냥 수행자로 출발했습니다. 부처님은 사제, 즉 제사장이 아니고 수행자였습니다. 부처님은 신이 아니고 스승이었습니다. 우리를 열반의 길로 인도하는 안내자이자 스승이었지, 우리에게 어떤 힘을 주는 신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이렇게 불교의 정체성과 수행자의 정체성을 우선 여러분들이 확보해야 합니다.”

 

불교가 종교화되기 전에 부처님과 초기 제자들은 사제가 아닌 수행자로 출발했고, 부처님은 ‘중도’를 발견해서 해탈과 열반을 성취했으며, 이런 부처님의 초기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불교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미·사미니 스님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점점 스님의 법문에 몰입해 들어갔습니다. 특히 세속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던 분이 왜 출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하는 질문은 진정한 출가의 의미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부처님의 일생과 선불교의 역사를 주욱 짚어 주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부처님이 발견했다고 하는 ‘중도’란 무엇인지에 대해 초점을 맞춰 많은 비유를 들어가며 그 원리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욕계 중생이란 말도 있듯이 우리는 누구에게나 다 욕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욕구를 대하는 방법은 따라가거나 억압하는 두 가지 길밖에 없어요. 명상하다가 다리가 아프면, 아프니까 펴거나 아니면 참을 수밖에 없잖아요. 하고 싶을 때는 하든지 참든지 두 길밖에 없어요. 따라 하면 쾌락주의가 되고 참으면 고행주의가 됩니다. 드러난 현상은 정반대지만 그 뿌리는 욕망에 따른 대응이라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참는다는 건 긴장하는 거예요. 통증을 참든, 먹고 싶은 것을 참든, 갖고 싶은 것을 참든, 참는다는 것은 몸과 마음이 긴장한다는 뜻이에요. 긴장하면 선정에 깊이 못 들어갑니다. 붓다도 6년의 고행 기간 동안 밖에서 보기에는 엄청난 고행을 했지만, 마음의 평정이란 측면에서 보면 어릴 때 농경제에 참석해서 새가 벌레를 쪼아 먹는 모습을 보고 ‘왜 하나가 살기 위해서는 하나가 죽어야 할까?’라는 의문을 가지고 나무 아래에서 명상하던 때 만큼의 선정 수준도 안 되었던 겁니다. 바로 여기에서 붓다가 중도를 발견하신 거예요. 욕망을 따라가는 것도, 욕망을 억제하는 것도 모두 욕망의 노예입니다. 그래서 그 욕망을 다만 알아차릴 뿐이에요. 저항하지도 않고 따라가지도 않고요. 그래서 위빠사나에서 가장 중요한 수행이 알아차림이잖아요. ‘다만 알아차림’, ‘다만 바라보기만 해라’, ‘다만 그것이다’ 이런 식으로 많이 표현되어 있죠. 이게 가장 중요한 원칙이에요.

 

군인이 보초를 설 때는 적이 오는지 신경을 딱 써야 하잖아요. 그러면 알아차림은 있지만 긴장 상태가 되어 편안하지 못해요. 반면에 긴장을 풀고 편안하면 번뇌가 생기거나 졸거나 멍청해지죠. 이 양쪽을 모두 극복해야 해요. 편안하고 고요한 가운데 뚜렷이 깨어있으면서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게 선정(禪定)의 요체예요. 

 

붓다는 이 중도를 처음으로 발견한 거예요. 이것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위대한 발견입니다. 붓다의 중도, 공자의 중용,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이라고 하는 중도가 모두 거의 BC 5세기에 나왔어요. 서로 다른 문명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거의 같은 진리를 발견했다는 것도 세계 철학사에 굉장한 성과지요. 물론 공자는 그 중도를 주로 정치에다 적용했지만요. 중도는 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고 적절한 것, 이쪽에도 기울어지지 않고 저쪽에도 기울어지지 않는 알맞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중도는 상황에 따라 늘 바뀌는 거예요. 그래서 ‘도라 하면 이미 도가 아니다’ 라고 합니다. 이걸 ‘시중’이라고 해요. 그때그때 조건에 따라서 적절함이 늘 변하는 거예요. 두 사람이 같이 살 때를 예로 들어보면, 내가 관심을 가져줘야 상대가 좋아한다면 관심을 가져주는 게 중도이고, 관심을 가져줬더니 간섭이라고 싫어하면 덜 가져주는 것이 중도입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좋도록 유지하는 데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안 가져야 한다’를 절대적으로 말할 수 없어요. 그건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 다르니까요. 

 

붓다의 대기설법은 다 그 중도를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졌습니다. 항상 질문한 그 사람에게 적절한 것, 이것을 붓다가 처음으로 보였습니다. 열반이니 붓다니 하는 온갖 용어는 원래 인도 철학에 있던 용어예요. 그러나 중도는 붓다가 처음으로 발견한 진리입니다.”

 

중도에 대해 너무나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해주니 법문을 듣던 스님들도 밝은 표정을 지으며 큰 박수로 그 감동을 표현했습니다. 스님은 2시간 동안 쉬지 않고 열정적으로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법문을 마치고 나서 20분 정도 여유 시간이 생겼습니다. 스님은 사미·사미니 스님들에게 “혹시 수행을 하시면서 힘든 점이나 궁금한 점, 오늘 강의를 들으며서 의문이 들었던 점이 있으면 무엇이든 질문해 보세요” 라며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습니다. 뒤쪽에 앉은 사미니 스님 한 분이 번쩍 손을 들고 두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수행 과정 중 윗반 스님들이나 도반 스님들이 저에게 하는 좋은 말이든 저를 경책하는 말이든 거기에 끄달리지 말라는 내용이 스님의 강연 내용 중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중도와 연결이 되는 것인가요?”

 

“그것은 중도라기 보다는 경계에 끄달리는 거예요. 칭찬하면 약간 기분이 좋고 비난하면 기분이 좀 나쁜 것은 내가 말에 끄달리는 것입니다. 이걸 경계에 끄달린다고 해요. ‘그 사람이 좋은 말 했다, 나쁜 말 했다’ 하면 시비가 되고요. 수행은 내 마음이 끄달릴 때 끄달리는 나를 보는 거예요. ‘아, 내가 칭찬에 들뜨는구나. 내가 비난을 싫어하는구나. 내가 지금 좋고 싫고에 마음이 끄달리고 있구나.’ 이걸 내가 알아차려야 한다는 말이에요. 그러면 이건 내 문제입니다. 조언하고 싶어서 하든, 비난하고 싶어서 하든, 칭찬하고 싶어서 하든 그 사람이야 자기 좋을 대로 말 하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내가 끄달리면 그 사람과 시비가 일어납니다. 내 마음만 보라는 거예요. ‘아, 내가 지금 말에 끄달리고 있구나.’ 하고 알라는 겁니다. 

 

‘끄달리지 말아야지’라고 하면 고행이 됩니다. 화를 내든 들뜨든 끄달리면 쾌락주의가 돼요. ‘끄달리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에도 끄달리지 말고, 다만 끄달리고 있는 나와 이 현상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내가 저 말에 끄달리고 있구나. 칭찬에 들뜨고 있구나. 비난에 시비하고 있구나.’ 이렇게 자기를 알아차리면 금방은 없어지지 않더라도 알아차린 거기에서부터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증폭되는 쪽으로는 가지 않아요.” 

 

스님의 답변에 고개를 끄덕인 사미니 스님은 이어서 한 가지 질문을 더 추가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이어지는 질문을 하나 더 드리겠습니다. 자기를 알아차리는 연습을 반복적으로 해서 어느 정도 중심이 잡힌다면, 나중에 자기만의 수행이 아니라 바깥의 중생들을 위한 현실적인 문제에도 관심이 생겨서 사회 실천을 하는 데도 도움이 될까요? 저는 차후에 공부를 더 해서 가난한 학생들이나 부모 잃은 아이들을 위한 활동을 하고 싶은데, 그럴 때 자기 관찰을 깊이 하는 것이 도움 되는지 궁금합니다.”

 

우선 자기가 끄달리고 있는 줄 알아차려서 비난이나 칭찬에 덜 흔들리게 되면 끄달림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됩니다. 우리의 사고 구조는 내가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면 반복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됩니다. 붓다가 발견한 위대한 정신작용의 특징이에요. 우리는 거의 늘 끄달리고 있습니다. 한번 습관이 된 까르마는 계속 반복됩니다. 이 굴레로부터 벗어나는 첫 발은 내가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거예요. 자각한다고 바로 벗어나는 건 아니지만, 반복에서 벗어나는 첫 시작이 됩니다. 내가 윤회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자각하면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첫 발을 딛게 되는 거예요. 전에는 모두가 운명론을 믿었어요. 그런데 붓다는 우리가 운명 지어진 존재임을 알아차림으로써 운명론을 극복하는 길을 발견했습니다. 고락이 윤회하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고락에서 벗어나는 실마리를 찾은 거예요. 

 

좋고 싫음, 즉 애(愛)가 일어나면 좋은 건 가지려 들고 싫은 건 버리려 드는 취(取)가 일어나는데, 거기서 멈추도록 하는 게 계율이에요. 그래서 수행자는 첫째, 계율을 지켜야 합니다. 마음이 일어나더라도 그리로 따라가지 않아야 해요. 그런데 이 욕망, 갈애(渴愛)는 계속 일어나기 때문에 계율만 지킨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갈애의 뿌리는 뭡니까? 이건 좋고 싫음이 일어나기 전에 기분의 호불호가 있어요. 그게 먼저 일어나고, 거기에 충동적으로 심리가 결합한 게 좋고 싫음이에요. <신심명(信心銘)>에서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말라’는 말은 좋고 싫음에 끄달리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좋고 싫음에 끄달리는 자기를 알아차리는 것은 바로 그런 마음을 자기가 보는 거예요. 그 뿌리는 ‘수’, 기분입니다. 그래서 ‘수’를 알아차리는 게 위빠사나예요. 그걸 딱 알아차리면, 내 까르마로부터 ‘수’가 일어나더라도 ‘갈애’라는 좋고 싫음으로 전이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어요. 그건 힘이 들지 않습니다. 아주 초기에 알아차리면 쉽게 멈출 수가 있지만 이미 흥분이 되어버리고 나면 알아차려도 쉬이 멈춰지지가 않아요. 

 

갈애가 일어나도 갈애에 끄달리는 말과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게 계율이에요. 그런데 나도 모르게 말과 행위를 해버렸다, 즉 계율을 어겼다고 하면 어긴 줄을 알아차려서 반성을 해야 합니다. 이게 참회입니다. 참회도 안 하는 건 수행자가 아니에요. 원칙을 어겼으면 어긴 줄을 알아서 참회를 해야 하고, 다음으로는 계율을 어기지 않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계율을 지킨다는 것도 사실은 긴장이에요. 그래서 알아차림으로 가야 해요. 이것이 선정입니다. 선정은 고요함이 바탕이에요. 고요하기만 하면 그건 꿔다놓은 보릿자루예요. 거기에는 알아차림이 아주 선명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여기까지만 가면 공부를 다 한 것이냐? 아니에요. 바로 이런 원리와 법을 알아야 해요. 이게 지혜입니다. 그래서 ‘계율을 지키고 선정을 닦고 지혜를 증득한다’ 이렇게 말하잖아요.

 

질문자가 지금 이렇게 자기를 알아차리는 연습을 꾸준히 하면 훗날 복지사업을 할 때 어떤 도움이 될까요? 예를 들어 어린애들이 밥을 못 먹는 모습을 보니까 너무너무 불쌍해요. 그 불쌍함이 일어나는 것은 자비심인데, 그 불쌍한 모습을 보고 돌아와서도 잠을 못 이루고 괴로워한다면 어떨까요? 그 열 명을 내가 다 도와줘야 할 텐데 내 능력으로는 두 명밖에 도울 수밖에 없어서 나머지 여덟 명이 자꾸 생각나서 가슴이 아프다면 그것은 경계에 끄달리는 거예요. 내 가슴만 아프지 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울고 슬퍼하고 잠 못 이룰 시간에 한 명을 도울 수 있으면 한 명을 돕는 게 낫지요. 마음이 슬프다는 것은 이미 수행자가 자기 본분을 잃은 거예요. 이미 마음이 가라앉거나 흥분되어 있다는 뜻이거든요. 비심(悲心)이 일어나되 마음이 아프면 안 돼요. 

 

그럼 바로 뭘 해야 할까요? 나머지를 도울 수 있는 일을 해야지요. 사람들에게 전화해서 도움을 청하든 다른 어떤 일을 하든 해서 한 명에서 두 명, 두 명에서 세 명, 세 명에서 네 명을 돕는 구체적 행위를 해야 합니다. 이게 원력(願力)이에요. 비심이 원력으로 가야지, 비심이 그냥 주저앉고 끝나면 그냥 속인(俗人)이에요. 경계에 부딪혔을 때 경계에 빠지지 않고 아픔을 원으로 승화시키는 자기 수행을 해야 합니다. 경계에 끄달리지 않는 자기를 유지해야 가능한 일이에요. 안 그러면 경계에 놀아나서 울고불고 하며 괴로워 하지요. 세상에서는 ‘저 스님 훌륭하다’ 할지 몰라도 수행적 관점에서는 아니에요. 자기를 희생하고 남을 도우면 세상에서는 훌륭한 사람이 되지만, 수행자는 자기를 희생하는 게 없어야 합니다. 희생은 반드시 칭찬이든 뭐든 대가를 받아야 해요. 그런데 대가가 없으면 나중에 섭섭해지고 괴로움에 빠지게 됩니다. 

 

<금강경> 대승정종분에 ‘어떻게 하면 이 마음을 항복받느냐’고 물으니까 ‘일체 중생을 구제하라. 구제를 마쳤다 하더라도 내가 구제했다는 생각을 가지면 보살이 아니다.’ 이렇게 나오잖아요. 보살이 아니라는 말은 마음이 자유롭지 못하다, 수행자로서의 마음을 놓쳐버렸다는 거예요.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을 하고 안 하고는 내 자유지만, 내가 그 가난이라는 데 빠져서 분노를 일으킨다면 그건 수행자가 아니에요. 분노하는 건 수행자가 아닙니다. 살다 보면 분노가 안 일어나진 않아요. 그러나 분노가 일어났을 때 그 분노가 상대방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경계에 끄달려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분노를 잠재울 수 있어야 수행이에요.

 

수행자의 수행은 다음 두 가지라 하겠습니다. 우선은 이렇게 자꾸 정진해서 경계에 끄달리지 않는 단계까지 가는 거예요. 경계에 끄달리지 않는 단계까지 가면 아라한(阿羅漢)이에요. 두 번째는 경계에 끄달리더라도 경계에 끄달리는 줄을 알아서 그 경계에 빠지지 않는 거예요. 이렇게 경계에 끄달리는 줄을 알아차리는 게 수다원(須陀洹)이에요. 알아차리긴 하지만 이게 반복되고 있지요. 끄달리고 다시 알아차리고, 끄달리고 알아차립니다. 끄달리지 않는 것이 제일 좋긴 하지만, ‘끄달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해서 끄달리지 않는 것은 아니잖아요. 우리는 끄달리는 존재예요.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끄달릴 때 끄달리는 줄을 알아서 거기에 빠지지 않는 거예요. 명상을 하면 상념이 일어나요. 안 일어나면 좋지만, 일어납니다. 일어나는 건 어쩔 수 없어도 일어날 때 거기에 따라가지는 않아야 해요. 망상을 피우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걸 지금 연습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화두를 참구하든, 수식관을 하든, 생활 속에서 분별이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든, 이 모두가 다 수행이에요. 걷거나 앉거나 서는 순간순간을 항상 알아차리는 거예요. 그래서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이 다 선이다’라고 말하는 거예요. 

 

 


 

복잡한 세상을 떠나서 고요한 가운데 딱 집중하면 알아차림이 유지되지만, 여러 가지 상황에 직면하면 알아차림을 놓치기 쉬워요. 앉아서 하는 공부는 운전으로 말하자면 운전교습소에서 면허증을 따기 위해 정해진 코스를 도는 것과 같습니다. 진짜 운전은 도로주행을 해야 합니다. 도로주행은 나만 잘 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차선을 지키더라도 상대가 쑥 끼어들어오고 급정거 해요. 그걸 탓하면 운전 못 해요. 그런 것까지 대비해서 운전을 해야 하는 겁니다. 이 세상은 늘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되고, 살다 보면 이런 사람도 만나고 저런 사람도 만납니다. 이런 속에서 내가 어떻게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자유로우냐, 이게 해탈이에요. 

 

분별이 나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에 그걸 먼저 봐야 합니다. 시선을 안으로 향해서 나로부터 일어나는 걸 늘 주시해야 해요. 그런데 실제로 살아보면 이걸 놓치고 자꾸 눈이 상대 쪽으로 나가요. 겉으로 말은 안 해도 마음으로는 ‘네가 그러니까!’ 이렇게 되잖아요. 그럴 때 ‘어, 내가 또 놓쳤구나’ 이렇게 되돌아와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를 유지할 수 있어요. 그래서 젊을 때 혹은 초심에 신통이 생기거나 강의를 잘 해서 인기가 있거나 재능이 많으면 대부분 수행에 실패합니다. 칭찬에 들떠버리거든요. 그래서 시련이 좀 많아야 합니다. 시련이 많아야 오히려 자기 내면에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어요. 육조혜능 대사도 이치는 몇 개월 만에 깨쳤지만 보림을 16년이나 했잖습니까. 그것도 도망다니면서 사냥꾼들 속에 섞여 지내셨어요. 

 

그러니 여러분들은 여기서 기초를 잘 익혀야 합니다. 조용한 곳에서 생활하며 온갖 분별이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정확하게 점검한 뒤에, 밖에 나가 경계에 부딪혀 가면서 연습을 또 해야 해요. 그런데 밖에 안 나가고 이 안에 있는 동안에도 내내 연습은 됩니다. 도반을 봐도 그렇고, 분별심이 늘 생기잖아요. 여러분이 세상을 어떻게 고칠 거냐는 다음에 생각할 문제이고, 우선은 이 속에서 내가 자유로워지는 경험을 먼저 해야 합니다. 자기가 힘을 딱 얻어야 해요. 이걸 득력(得力)이라고 합니다. 자기 힘이 없으면 세상에 금방 휘둘립니다. 그렇게 정진을 해나가시면 좋겠습니다.”

 

수행은 사회적 실천을 더 잘하기 위한 토대가 됨과 동시에 우리의 일상 생활 모두가 수행이 될 수 있으며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내가 자유로워지는 경험을 먼저 해야 세상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감로와 같은 법문을 설해준 스님에게 사미·사미니 스님들은 박수갈채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법문을 마친 스님에게 선원장인 선룡 스님은 “백담사에 기본선원이 생긴 이후 150분 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법문을 해준 경우는 오늘이 처음이다” 며 깊이 있는 가르침을 설해준 스님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표했습니다. 

 

선방을 나온 스님은 시자 스님의 안내로 점심 공양을 하러 이동했습니다. 선원장 스님과 함께 점심 공양을 하면서는 기본선원의 운영과 관련해 여러 이야기들을 주고 받으며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다시 백담사를 나온 스님은 단풍이 물들고 있는 산을 보면서 잠시라도 걸어보고 싶어 했으나 서울로 곧바로 올라가야 해서 차창 밖으로만 가을 단풍과 백담사 계곡을 감상하며 아쉬움을 달랬습니다. 

 

 

오후 3시 무렵 평화재단에 도착한 스님은 원고 교정 업무를 보다가 원래 회의 시간을 잡으려고 했는데 건강이 좋지 않다며 휴식을 취했습니다. 저녁 7시30분부터는 동대문구민회관에서 청년들을 위해 희망세상만들기 즉문즉설 강연을 했습니다. 다음 이야기에 계속 됩니다... 

 

※ 정토회에서 진행하는 '인도 성지순례' 참가자 접수가 시작되었습니다.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인도의 10대 성지를 내 발로 직접 밟아보고 그 감흥을 느껴보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아래 배너에서 직접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전체댓글 56

0/200

김양우

스님의 말씀을 일반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글로 표현해주는 분께도 감사 드려요.^^

2015-10-11 09:14:48

박진영

감사합니다. 일상에서 나태해지려는 저에게 끄달리지말아아겠어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2015-10-10 09:01:10

한완숙

석가모니불()

2015-10-09 14:18:36

전체 댓글 보기

스님의하루 최신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