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8. 11. 11 가을 불교대학 특강 수련 & 결사행자대회
“화가 잘 다스려지지 않아요.”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문경 수련원에서 정토불교대학생들을 위한 법문을 한 후 종일 결사행자대회에 참가하였습니다.

특강수련은 불교대학생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문경수련원에서 1박 2일 간 법문을 듣고 정진을 하며 불교공부를 심화하는 과정입니다. 이번 불교대학 특강 수련에는 부산울산, 광주전라, 인천경기 지역의 불교대학생 3백여 명이 참가했습니다.

아직 짙게 내린 어둠 사이로 맑고 우렁찬 예불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새벽예불과 기도 후 스님의 법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잘 주무셨어요?”

“네!”

“이렇게 큰 방에 처음 자 보셨죠? 인생에 큰 기록이에요. 2백 명이랑 같이 자보고 200평의 넓은 방에서 자는 건 재벌도 이렇게 못해요.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세요.” (모두 웃음)

스님은 환한 미소로 대중들과 인사를 나눈 후 바로 질문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시간은 인생에 관한 즉문즉설을 하는 시간이 아니고, 불교대학 수업을 들으면서 궁금했던 것을 질문하는 시간입니다. 질문이 워낙 많아서 서론은 이쯤 하고, 바로 질문받겠습니다.”

실천적 불교사상을 배우며 궁금했던 점을 질문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중 사성제와 알아차림의 중요성을 배웠지만, 일상생활에서 화를 다스리는 것이 쉽지 않다는 질문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폭언을 듣고 나니 화를 주체하기가 어려워요

“실천적 불교사상을 배우면서 고집멸도와 알아차림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일상생활에서 화를 알아차리고 다스리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화가 올라올 때 ‘이것은 바깥이 만드는 게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거야’라고 생각을 되뇌이는데, 종종 ‘상대방은 자신의 잘못을 모르는데 왜 나만 상대를 이해해야 하지?’라는 마음이 생깁니다.”

“무슨 일인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보세요. 지금 듣기로는 질문자가 뭔가 많이 손해를 보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인지 한 번 이야기해 줄 수 있어요?”

“최근 부동산 거래를 하는 과정에서 거래소 사장님이 설명을 다하지 않아서 오해가 있었는데, 그로 인해 손님이었던 제가 그 사장님으로부터 폭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일을 겪으면서 ‘그래, 손님이라고 늘 갑의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지’하며 화를 알아차리려고 했는데...”

“그럼 그 사장님한테 왜 소리를 지르는지 물어보지 그랬어요.”

“이성적으로 대화를 하려고 했는데 그분이 인신공격성 발언까지 하면서 말을 하니까 주변에 듣고 있던 사람들이 ‘왜 그런 이야기까지 가만히 듣고 있냐?’는 반응을 보이고...”

“그런데 가만히 듣고 있는 것 말고 어떤 행동을 취할 수 있을까요? 같이 악을 쓰고 싸우는 게 더 나았을 것 같아요?

그 사람을 위해서 가만히 듣고 있어라는 뜻이 아니에요. 나를 위해서 어떻게 하는 게 나을지를 정해 보라는 겁니다. 그 사람과 악을 쓰고 싸우는 게 나를 위해서 나을지, 아니면 그냥 듣고 흘려버리는 게 나를 위해서 나을지 판단해 보면 돼요.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는 건 그 사람의 성격이에요. 우리 주변에도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물론 화를 안 내면 좋긴 해요. 그런데 그 사람의 성격이 그런 걸 어떡하겠어요?

어떤 동네에 가면 욕쟁이 할머니가 하는 식당이 있잖아요. 밥 먹으러 갔는데 주인 할머니가 막 욕을 해요. 그런데 그 식당 음식은 정말 맛있어요. 그럴 때 그 식당에 가고 안 가고는 내가 선택하는 거예요. 할머니한테 욕을 조금 얻어먹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것인지, 그게 싫으면 그렇게 욕하는 식당에는 밥 먹으러 안 가면 되는 겁니다.

또 어떤 음식점은 사람들이 줄을 많이 서는 집이 있어요. 거기는 음식이 맛있으니까 먹으려면 줄을 서서라도 먹고 오든지, ‘음식 먹는데 뭘 줄까지 서야 하나’ 싶으면 그냥 다른 곳에 가면 돼요. 다른 건 모르지만 먹는 걸 가지고 ‘어떻게 고객에게 줄을 세우냐’라고 생각하면 본인만 피곤합니다.

이런 마음은 결국 그 사람을 고치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을 고쳐요? 욕하는 할머니를 내가 무슨 재주로 고치고, 부동산 사장님을 내가 무슨 재주로 고치겠어요?

그 사람이 법률적으로 부당한 행위를 하면 참는 게 아니라 고발을 해야 합니다. 이건 민주 시민으로서 나의 권리를 행사하는 거예요. 반면 도덕적으로 나쁜 행위를 한다면 그건 내가 그 사람과 더 이상 거래를 하지 않으면 돼요. 그 사람의 성질이 더러운 것을 내가 어떻게 하겠어요?

경상도 사람들이 목소리가 크고 억양이 세니까 서울 사람들이 보면 가끔 싸운다고 오해하기도 해요. 그런데 경상도 사람들은 싸우는 게 아니에요. 그냥 말이 그런 거예요. 그건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예요.

부동산 사장님이 화를 잘 내지만 집을 잘 소개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성질을 감수하면서 집을 구하는 것이고, 부동산 가격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성질 잘 내는 사람과는 같이 하기 어렵다면 그냥 그 업소에 안 가면 되는 거예요. 이건 참을 문제가 아닙니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보고 내가 어떻게 할지 선택만 하면 됩니다. 참을 게 없어요. 참으면 본인만 괴로워요.

여러분들은 자꾸 참는다고 이야기하는데, 참는다는 말은 결국 상대방이 잘못했다는 말이에요. 용서한다는 말도 ‘네가 잘못했지만 내가 봐주겠다’는 뜻인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볼 일이 없어요. 그건 그냥 그 사람의 성격이 그런 거예요. 그런 상대방의 성격을 두고 내가 어떻게 할 것인지를 정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만약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면, 그런 남편을 두고 내가 어떻게 할 것인지를 정하면 됩니다. 남편이 잘했니 잘못했니, 혹은 내가 잘못해서 저 사람이 바람을 피우게 되었나,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라는 게 아니에요. 내가 뭘 잘못했길래 자책을 해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런 일이 생기면 한 번은 남편이 나쁜 사람이라고 했다가 또 조금 지나서는 내가 잘못해서 그런 일이 생겼다고 했다가, 이렇게 왔다 갔다 해요.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일어난 일은 그냥 두고, 지금 여기서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정하는 게 수행입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쳐다보는 사람과는 도저히 못살겠다면, 상대방이 아무리 인물이 좋든, 아무리 돈이 많든, 아무리 나한테 잘해주든 관계없이 나는 이 문제에 있어서는 양보를 못하겠으니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끝내면 됩니다. 거기다 대고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낼 필요가 없어요.

반면 계산을 해보니 아이들한테는 아빠도 있어야 하고, 경제적으로 도움도 필요하고, 비록 이 문제에 있어서는 기분이 안 좋지만 그렇다고 이혼까지 하기에는 다른 손실이 많다면, 같이 사는 쪽으로 선택을 하는 거예요. 당장 기분은 나쁘지만 같이 살기로 결정했다면, 같이 살면서 그 문제를 자꾸 키우면 결국 내가 괴로워지니까 너무 키우지 말라는 거예요. 그럴 거면 아예 같이 안 살기로 하든지, 그게 아니라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서 같이 살기로 결정했다면, 그 문제를 더 키우지 말라는 겁니다.

밤송이 속에 들어있는 밤알을 먹을 때 ‘맛있는 알은 먹고 싶은데 찔리기는 싫다’라고 하는 건 불가능한 요구예요. 밤알을 먹으려면 찔리는 걸 감수해야 해요. 그나마 덜 찔리고자 하면 가죽 장갑을 사용하든지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지 밤송이한테 ‘너 가시 없어져라’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대중 웃음)

여러분들은 ‘저 사람이 성질만 조금 바뀌면’, ‘저 사람이 이것만 해주면’, ‘저 사람이 저것만 해주면’ 자꾸 이렇게 생각을 해요. 물론 그렇게 된다면 좋겠죠. 밤송이에 가시가 없으면 그냥 밤알을 먹을 수 있으니 좋겠죠. 그런데 그렇게 가시가 나있는 밤송이 안에 들어있는 게 밤인데 그걸 어떡하겠어요. 가시에 찔리는 게 싫으면 밤알을 포기하든지, 밤알을 먹고 싶으면 가시에 찔리는 걸 감수하든지, 덜 찔리고 싶으면 다른 방법을 강구하든지 해야 해요. 그렇지 않고 ‘밤송이에 가시가 있는 게 문제다’라는 말은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게 현실이잖아요. (대중 박수)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들은 ‘스님은 같이 안 살아봐서 그래요’ 이렇게 말하는데, 저는 찔리기 싫으니까 밤을 안 먹겠다는 거예요. 결혼해서 나와 습관이 다른 사람과 함께 지내면 가시에 찔리게 돼요. 둘이 같이 살려면 그걸 감수해야 하는데, 여러분들은 결혼 생활은 아기자기하게 하고 싶고, 또 가시에는 찔리기가 싫으니 아우성을 치는 거예요. 찔리기가 싫다고 해서 이혼하라고 하면 이혼하기는 싫다고 해요. 그래서 그냥 감수하면서 같이 살아라 하면 또 찔리기는 싫다고 해요. (대중 웃음)

같이 살고는 싶고 가시에 찔리기는 싫으면, 숙이고 살아야 하는 거예요. 그냥 안 살면 해결되는데 그래도 같이 살겠다고 하니까 이왕 같이 살 거면 가시에 안 찔리고 사는 게 좋으니까 숙이고 살라는 거예요.

아무런 조건이 없으면 그냥 고개를 들고 당당히 살면 돼요.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숙이고 살아요? 그런데 우리가 남의 집에 가서 돈을 좀 얻고 싶으면 고개를 숙여야 되잖아요. 고개를 숙여도 줄까 말까 한데 머리를 뻗뻗하게 들고 있으면 누가 주겠어요? 그 사람과 같이 사는 게 나한테 이익이 된다 싶으면 누가 숙여야 되겠어요?”

“내가 숙여야 합니다.”

“여러분도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도움이 된다 싶으면 스님이 조금 성질이 더러워도 받아들여야 돼요, 안 받아들여도 돼요?”

“받아들여야 돼요.” (대중 웃음)

“그런데 그게 싫으면 좋은 걸 그냥 포기하고 가면 돼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법문도 좋고, 성질도 좋고, 뭐든지 다 좋기를 원하잖아요. 뭐든지 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을 원하는데 현실에서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다 내 마음에 드는 환경도 없어요.”

문화가 다른 외국인이 한국에서 잘 지내려면

“저는 아버지는 한국 사람이고 어머니는 미국 사람인데, 문화가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저와 같은 외국인이 이곳 사람들과 어떻게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까요?”

“사실 문화가 다르다거나 부모님의 국적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에요. 과거에 계급이 있을 때도 아버지가 양반이고 상놈이고는 행복에 있어서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건 내가 지금 살아있다는 거예요. 부처님의 행이 훌륭하신 거예요, 부처님이 왕족이어서 훌륭하신 거예요?”

“부처님의 행이 훌륭하신 거죠.”

“예수님이 훌륭하신 거예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나 성령이 잉태했기 때문에 훌륭하신 거예요?”

“예수님이 훌륭하신 거죠.”

“누가 어떻게 태어났느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 사람이 훌륭한 게 중요한 거예요. 옛날에는 혈통 사회였기 때문에 그 사람의 행이 훌륭한 것보다 그 사람의 혈통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그러다 보니 부처님이 왕족 출신이고,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이 강조되었어요. 그런 것은 당시 혈통을 중시했던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 거예요. 그런데 오늘날처럼 민주화된 사회에서는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도 어떻게 태어났는지 아버지는 누구인지 어머니는 누구인지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지금 살아있다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살아있는 동안 나는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어요. 가난한 집에 태어났든, 부잣집에서 태어났든, 어릴 때 야단을 맞았든 맞지 않았든, 공부를 잘했든 못했든, 그런 건 다 지나간 이야기예요. 그런 과정을 거쳐서 어쨌든 지금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게 중요합니다.

과거에 어떠했든 지금 나는 살아있고, 살아있는 동안에는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다만 과거에 늘 울었던 사람은 그 습관이 남아있다 보니 행복하게 살고자 해도 슬픈 마음이 올라오고, 과거에 성질을 냈던 사람은 행복하게 살고자 해도 자꾸 화가 올라옵니다. 그런 마음이 그냥 올라오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렇지만 그런 성질이 있더라도, 그런 슬픔이 있더라도, 그런 트라우마가 있더라도, 지금 내가 불행하게 살아야 할 이유는 없어요. 다리를 절면서도 나는 행복하게 살 수 있고, 눈이 보이지 않더라도 나는 행복하게 살 수 있어요.

이런 관점을 늘 갖고 있어야 불법(佛法)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야 ‘모든 중생이 부처다’, ‘일체중생 개유성불(一切衆生 皆有性佛)’의 의미가 진정으로 다가옵니다. 깨달음을 마치 환상 속의 무엇으로 생각하니 자꾸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부처가 되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부처라는 것을 그렇게 따로 떼어내서 생각하지 않아야 돼요. 괴로움이 없는 자가 곧 부처예요. 여러분은 괴로워요, 안 괴로워요?”

“괴로워요.”

“괴로우니까 중생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런데 그 괴로움을 잘 살피고 살펴보면 괴로울 일이 없습니다. 이것을 탁 알아버리면 여러분도 부처처럼 살 수 있습니다. 꿈속에서는 강도에게 쫓겼는데 눈을 뜨고 보니 없고, 어둠 속에서는 괴로움이 있었는데 불을 밝혀보니 없고, 멀리서 보니 뭔가 있는 것 같았는데 자세히 보니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게 깨달음이에요.

상대방이 ‘이 년’이라고 욕을 해서 내가 기분이 나빴는데, ‘상대방이 욕을 하는데 왜 내가 기분이 나쁘지?’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바람 소리나 매미 소리와 같은 그 말에 내가 기분 나쁠 이유가 없구나’ 하고 아는 거예요. 그저 그 사람이 성질이 나서 내뱉은 말일뿐이라는 걸 알면 괴로움이 사라집니다. 내 이름이 ‘법륜’이면 어떻고 ‘이 년’이면 어때요. (대중 웃음)

이렇게 관점을 가지고 연습을 하면 조금씩 나아집니다. 지금 당장 되지 않는 건 이해가 돼요. 우리 모두가 잘 안 되는 부분이 있어요. 그런데 이건 교회에 다니고 절에 다닌다고 나아지는 게 아니라, 안 되는 부분이 무엇인지 직접 살펴야 나아집니다. 이걸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고 합니다. 손가락으로 탁 가리키듯이 자신의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가만히 앉아서 ‘저 사람 때문에 괴롭다’, ‘저 사람이 나한테 욕을 했다’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자다가 일어나서 ‘저 놈이 나한테 욕했다’ 하면서 괴로워하고, 3일이 지나서도 ‘저 놈이 나한테 욕했다’ 하면서 괴로워하고, 그렇게 시간이 지났는데도 계속 자기를 괴롭히는 거예요. 남편이 바람을 피우면, 자다가도 일어나서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 1년이 지나서도 ‘네가 바람을 피웠지’ 이렇게 되뇌이면서 자기를 괴롭힙니다.

그렇게 괴롭게 살고 싶으면 괴롭게 살아도 됩니다. 저는 괴롭지 않게 살아라고 명령하는 게 아니에요. 괴롭지 않게 살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알려줄 뿐이에요. 그 길을 가고 싶으면 같이 가자는 것이고, 가기 싫으면 가지 않아도 돼요. 저도 그 길을 가고 있으니 같이 가자는 것이지, 가기 싫은 사람에게 제가 뭣 때문에 가라고 명령을 하겠어요.”

“감사합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수업에 관련된 질문도 있었고, 평소 궁금했던 내용을 묻기도 했습니다.

  • 수업 중 진정한 행복이란 고와 락을 떠난 상태라는 것이 너무 와 닿았는데, 현실에서 실천하려고 하면 너무 어려워요. 저 같은 중생도 해탈에 이를 수 있을까요?
  • 결혼했는데 예전에 나를 좋아했던 사람이 생각날 때가 있어요. 이것도 오계 중 불사음계를 어기는 것인가요?
  • 불교대학에서 배운 대로 살려고 다짐하는데 일상에서는 짜증이 나고 우울해져요.
  • 저는 원래 불자라 십념 왕생원으로 기도를 해왔습니다. 스님께서 매일 108배 기도를 하며 나를 돌아보는 게 중요하다고 하셔서 백일 간 기도를 했는데요. 이 두 기도의 접점을 찾기가 어려워요.
  • 저는 화와 짜증이 많은데, 원인을 분석하는 것이 도움이 될까요?
  • 스님은 왜 출가를 하셨고, 왜 문경에 수련원을 지었나요?

오늘은 불교대학생들 뿐만 아니라, 백일출가 행자들에게도 질문한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 제2차 만일결사는 세계화로 나아가야 하는데 정토회에 존재하는 유교문화를 없애야 하지 않을까요?
  • 저는 인연 과보에 궁금한데요.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과보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 공동체 생활이 수행에 도움이 되나요?

스님은 불교대학을 꼭 졸업할 것을 당부하며 법문을 마쳤습니다.

“불교대학 과정에는 저의 50년 인생 경험이 녹아 있어요. 그러니 잘 받아들이면 인생에 도움이 되실 겁니다. 중간에 장애가 생겨도 끝까지 붙어있으세요.”

“네!”

매주 영상으로만 만나던 스님을 직접 만나 살아있는 가르침을 흠뻑 받은 학생들은 박수로 화답했습니다. 스님은 대전에서 결사행자대회가 있어 법문을 마치자마자 이동하였습니다.

학생들은 지난 1박 2일간의 소감을 나누었습니다. 어제는 ‘마음의 단풍을 아름답게 물들이라’, ‘한 생각에 따라 행과 불행이 달라진다’는 묘수 법사님과 유수 스님의 법문도 듣고 삼백 배 정진도 하였습니다.

‘내 자신을 스스로 높이려는 마음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스님 말씀처럼 특별한 풀이 아닌 그저 한 포기 풀처럼 살겠습니다. 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실천하는 불자가 되기 위해 돌아가면 108배를 시작하겠습니다.’

‘내 고집으로 인해 그동안 상처 받았던 주위의 모든 인연들에게 참회했습니다. 3백 배 때는 참회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습니다. 사랑으로 봉사해주시는 선배 도반님을 보고 배워 실천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소감을 나눈 후 학생들은 사용한 수련원을 부지런히 청소하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환한 미소를 띠며 수련원을 내려가는 학생들의 발걸음이 새털처럼 가벼워 보였습니다.

결사행자회의

대전으로 이동한 스님은 오후 12시부터 결사행자회의에 참여하였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행정, 대의원, 법사로 바삐 지내던 결사행자들이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스님은 회의를 시작하기 전 입재 법문을 하였습니다. 1차 만일결사를 마무리하는 시기에 있어서의 결사행자의 역할에 대해 강조하였습니다.

“우리들은 맑은 마음, 좋은 벗, 깨끗한 땅을 일구는 일에 평생을 바치기로 한 사람들입니다.

세속에 편승하지 않되 과거의 관습 속에서 고정화된 사고로 진행하는 것은 없는지 잘 살펴봐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세밀하게 점검하고 살피는 것이 결사행자의 역할입니다.

본인이 지방에서 일하고 있으면 중앙과 지방의 괴리는 없는지, 행정이거나 대의원이라면 행정과 대의원의 괴리는 없는지 잘 살펴야 할 것입니다. 현실의 문제는 문제로서 인정하고 그 위에서 개선의 방향을 찾아나가야 합니다.

결사행자 여러분들은 이번 생에 만일의 목표를 달성하기로 마음을 모은 사람들입니다. 1차 만일의 회향이 4년 앞으로 다가왔으니 어떻게 마무리하고 2차 만일을 앞으로 어떻게 해 나갈지 준비해야 합니다. 누구 한 사람의 역할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역할입니다.”

오전 12시에 시작한 회의는 스님의 회향 법문을 마지막으로 오후 5시 30분이 넘어서 끝났습니다. 회의를 마친 스님은 서울로 향했습니다.

내일은 동국대 정각원에서 초청 강연을 한 후 여의도에서 방송문화예술인들을 위한 즉문즉설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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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나

타인에 말에 내가 왜? 화가나지...
그저 그에 말이고 성질 일뿐!!!
감사합니다 꾸벅^^

2018-11-26 18:18:20

실상

괴로움이 없는줄 아는것이 직지인심이고 개유성불이다

2018-11-20 06:29:09

송미해

내가 나를 괴롭히고 있는 내 마음을 봅니다.
고맙습니다.

2018-11-14 20: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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