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6.2.4 (인도 30일째) 인도인 스텝 소풍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JTS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인도인 스텝과 한국인 스텝 28명과 함께 전정각산 주위에 남아 있는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도보로 성지순례를 했습니다. 

 

새벽 4시 30분, 도량석 소리와 함께 일어난 스님은 새벽예불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 새벽 예불

 

예불을 마치고 나서는 곧바로 소풍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주먹밥으로 도시락을 싼 후 인도인 스텝들이 대부분 도착하자 가볍게 짜이 한 잔을 하며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스텝들이 소풍 준비를 하는 사이에 스님은 학교 정문 앞에 쓰레기를 줍고 청소를 했습니다. 

 

▲ 학교 앞을 청소하는 스님

 

오늘은 도보로 전정각산을 출발해 수자타 마을까지 부처님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을 순례해 볼 예정입니다. 원래는 버스를 대절해서 소풍을 떠나려고 했는데, 인도인 스텝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에 대해 스님의 설명을 자세히 듣고 싶다고 요청을 해서 도보로 마을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이곳 둥게스와리는 부처님이 6년 동안 고행을 하며 오랫동안 머문 곳이기 때문에 곳곳에 성지가 많습니다. 마을에 대한 안내라고 하지만 자연히 성지순례가 되는 셈입니다.  

도보 순례를 시작하기 전 스님은 “여러분들이 자기 마을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것은 참 좋은 일이에요. 저 멀리 전 세계에 대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과 자기 마을에 대해 아는 것입니다” 라며 마을을 순례하고 싶다고 요청한 인도인 스텝들을 칭찬해 주었습니다. 

 

▲ 부처님이 6년 동안 고행한 시타림에 세워진 탑

 

수자타아카데미 정문 바로 앞은 무너진 탑터가 남아 있어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스님은 이 탑터 앞에서 부처님의 6년 고행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곳은 부처님이 6년 고행을 하신 곳인데, 전 세계에 3억 정도가 되는 불교 신자들 모두가 다 아는 곳입니다. 인도에 있는 어떤 도시도 이렇게 많이 알려진 곳은 드물 겁니다. 

 

 

부처님은 출가 후 가야에 오셔서 걸식을 하고 지금 이름으로는 ‘브람조니’라고 불리우는 가야산에 올라갔습니다. 거기서 주위를 죽 둘러봤더니 네이란자라강 동쪽 편의 이곳이 수행하기에 좋아 보였어요. 이곳은 당시에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갖다 버리는 곳이었어요. 인도 당시의 풍속으로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도시에서 8킬로미터 쯤 떨어진 지역에 시체를 갖다 버리는 숲이 있었어요. 브라만이나 크샤트리아, 바이샤 같은 높은 계급 사람들은 주로 화장을 했지만 노예인 수드라 계급 사람들은 화장을 하지 않고 그냥 시체를 갖다 버렸어요. 시체를 갖다버리는 숲이라고 해서 그 숲을 ‘시타림’이라고 불렀습니다. 주로 강을 건너서 이렇게 갖다 버려요. 바라나시의 경우 바루나강을 건너 북쪽에 있는 사르나뜨가 그런 곳이었어요. 여기는 가야에서 지금의 네란자라강을 건너 이쪽에다가 갖다 버린 거예요. 

 

‘둥게스와리’ 라는 말은 전문 연구자들에 따르면 이런 뜻이라고 해요. ‘둥그’는 ‘부정(不淨)하다’라는 뜻입니다. ‘시체를 덮은 천은 부정하다’, ‘똥은 부정하다’ 이렇게 쓰는 표현 있잖아요. 더럽다고 하지만 위생적으로 더럽다는 게 아니라 재수 없다는 뜻을 담은 말이에요. ‘스와리’는 ‘땅’이라는 뜻이었다고 해요. 다시 말해 시체를 갖다 버리는 곳이니까 여기는 부정한 땅이라는 뜻이었습니다.

 

‘부정하다, 성스럽다’ 하는 건 다 사람의 생각이죠. 땅 자체는 그저 땅일 뿐입니다. 시체를 갖다 버리니까 부정한 땅이라고 했지만, 부처님이 거기에서 설법을 하니까 사르나뜨의 경우 ‘성스러운 곳이다’ 이렇게 돼버리잖아요. 부처님이 여기서 수행하기 전에는 ‘둥게스와리’라는 말이 맞지만, 부처님이 여기서 수행하신 뒤에는 ‘둥게스와리’라는 표현이 맞지 않아요. ‘이곳은 성스러운 곳이다’라고 이야기해야 해요. 그러니까 부처님이 깨닫기 전에 이곳에 계셨다는 뜻을 가진 ‘쁘락보디 힐’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정확한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여기를 ‘전정각산’이라고 불러요. ‘전(前)’이라는 말은 ‘쁘락’이라는 뜻이고, ‘정각(正覺)’이라는 말은 ‘깨달음’, 즉 ‘보디’라는 뜻이고, ‘산(山)’은 ‘마운틴’또는 ‘힐’이라는 뜻이에요. 

 

 

그렇게 부처님이 가야산에서 주위를 둘러보고 여기로 수행하러 오셨어요. 시체를 갖다 버리는 곳에는 더럽다고 사람이 아무도 안 오니까 수행하기 좋잖아요. 그래서 시체를 갖다 버리는 숲은 ‘시타림’이라고도 부르지만 고행자가 수행하는 곳이라고 해서 ‘고행림’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주로 이 근방에서 수행하셨습니다. 저기 티벳 사원 있는 곳을 보면 나무가 많이 자라잖아요. 여기가 돌산임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는 나무가 많이 자랐습니다. 

 

저쪽의 샘터도 지금은 건기가 되면 말라버리지만 당시에는 항상 물이 있었습니다. 이 산에서 물이 자연적으로 샘솟는 곳은 거기뿐이었어요. 두르가푸르, 자그디스푸르, 라르푸르 마을은 물론 저 아래까지 이 지역은 전부 사람이 살지 않는 숲이었어요. 

 

부처님은 여기서 음식을 거의 드시지 않고 이 숲속에서 그냥 명상을 하셨습니다. 이 가까이에는 집이 없으니까 걸식을 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경전에 보면 대추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는 왜 대추를 먹었을까 궁금했는데 여기 직접 와보니 대추가 자연적으로 많이 나는 곳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지금도 둘러보면 대추나무가 많이 보이잖아요.(모두 웃음)

 

 

대추를 나중에는 하루에 한 알 혹은 이틀에 한 알 먹는 식으로 해서 거의 음식을 드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법당에 모셔놓은 불상처럼 뼈만 남아 앙상한 모습이 되었어요. 경전에는 ‘추위도 피하지 않고 더위도 피하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동굴에 계셨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아마 비가 오면 저 동굴에 들어가셨을 겁니다. 또 겨울에 추울 때나 여름에 더울 때는 저 굽파(동굴)에 들어가면 덜 덥고 덜 추웠을 거예요. 여러분들 저기 굽파(동굴)에 들어가 봤어요?”

 

“예.”

 

“겨울에 들어가면 따뜻하고 여름에 가면 시원하죠?”

 

“예.”(모두 웃음)

 

“그런 걸 보면 여기 계시면서 동굴에 주로 거처하셨다는 걸 알 수 있어요. 나무 밑에 계시거나 동굴에 계셨을 겁니다.

 

 

사실 이 지역은 제가 옛날부터 이름을 ‘고타마 싯다르타 파크’라고 지어놨어요.(모두 웃음) 이곳은 다 공원으로 조성해서 사람들이 명상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해요. 차가 여기까지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요. 저 입구 바깥, 그러니까 자그디스푸르 마을 뒤쪽에 주차장을 만들고 나머지는 걸어 들어오도록 해야 해요. 이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면 자전거 릭샤나 전기차처럼 매연 없는 교통수단을 이용하도록 하고요. 

 

이처럼 이곳이 중요한 곳인 줄을 알아서 앞으로 잘 관리하고 보호해야 해요. 그래서 지금 우리라도 청소를 깨끗이 하고 울타리를 다시 쳐서 여기를 잘 보호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와서 물으면 저기 동굴만 이야기할 게 아니라 이런 스토리의 일부를 이야기해줘야 해요. 

 

 

저 동굴은 그림자를 남겨놓은 동굴이라고 해서 ‘유영굴(留影窟)’이라고 불러요. 부처님이 성도하기 전에 수자타의 공양을 받으시고 건강을 회복한 뒤에 다시 이곳으로 와서 수행을 할까, 강 건너 지금의 보드가야로 가서 깨달음을 얻을까 망설였어요. 그때 둥게스와리 산신은 이곳에 와서 하라고 청하고 브라만 신은 저쪽으로 오라고 청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쪽 산신의 요청을 받았지만 이리로 오지 않고 저쪽으로 가시면서 대신 그림자를 남겨놨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유영굴’이라고 부릅니다. 경전에서는 ‘그림자를 남겨놨다’고 묘사하지만 실질적으로 생각해보면 부처님이 이곳에 오래 계셨기 때문에 부처님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다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이렇게 스님이 설명을 마치자 인도인 스텝들은 자긍심이 생기는지 아주 기쁜 표정을 지었습니다. 

 

전정각산을 둘러싸고 있는 둥게스와리 마을은 인도인 스텝들이 태어나고 자란 곳입니다. 하지만 이곳은 문자를 읽고 쓸 수 없는 천민들이 모여 살았던 마을이었기에 인도인 스텝들도 이런 의미들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수자타아카데미가 생기고 나서야 스님으로부터 이곳이 얼마나 성스러운 곳인지 조금씩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탑을 향해 삼배를 한 후 드디어 본격적으로 도보 순례가 시작되었습니다. 인도인 스텝들이 많이 살고 있는 방갈비가 마을을 지나는데 방금 전 스님의 설명대로 마을 곳곳에 대추나무가 많이 보였습니다. 모두가 대추나무에 높은 관심을 보이자 이 모습을 본 한 어린이가 뛰어나와 자신이 어제 열심히 주워 놓은 대추 한 봉지를 스님께 건넸습니다.  

 

▲ 아이가 스님에게 준 대추 한 봉지

 

가난하지만 작은 것도 이렇게 나눌 줄 아는 아이의 마음에 가슴이 짠했습니다. 대추를 한 움큼씩 손에 쥐고 입에 넣으니 웃음이 절로 났습니다. 

 

만코시힐 마을을 지나갈 때는 인도인 스텝들이 ‘까후아나무'가 바로 아사나나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부처님이 네이란자라강에서 목욕을 하시다가 쓰러지신 후 아사나나뭇가지를 잡고 올라오셨다고 경전에 기록되어 있는데, 아사나 나무가 힌디어로는 ‘까후아’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강에서 나뭇가지를 붙잡고 나오려면 나뭇가지가 아래로 늘어져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서 스님이 고개를 흔들자 인도인 스텝들은 “계속 가다 보면 다른 까후아 나무도 나온다”며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 경전 속의 아사나나무라고 추측되는 '까후아나무'

 

네이란자라 강을 건너기 전 이번에는 따르 나무에서 따리(팜 주스의 일종)를 뽑아 항아리에 담아 가고 있는 한 청년을 만났습니다. 스님이 반가운 표정으로 항아리를 바라보자 청년은 흔쾌히 스님에게 한 잔을 드리겠다며 항아리를 열었습니다.   

 

▲ 스님께 따리(팜주스)를 나눠주는 마을 청년

 

아침 일찍 갓 채취한 것이어서 그런지 단맛이 많고 아주 시원했습니다. 스님이 먼저 한 잔을 마시고 이어서 돌아가며 모두가 한 모금씩 목을 축였습니다. 다시 가던 길을 계속 가니 네이란자라강이 나왔습니다. 부처님이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깨닫기 전 마지막 정진을 하러 가실 때 건너 가신 강인데 건기여서 그런지 바닥이 말라 물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 네이란자라 강

 

강을 건너자마자 도착한 곳은 나디 가섭의 수행터입니다. 이 지점에서 네이란자라강과 모하나강이 합쳐져서 다시 하나의 네이란자라강이 되는데 두 강이 만나는 이 지점에 나디 가섭의 수행터가 있었습니다. 

 

나디 가섭의 수행터에는 커다란 반얀나무가 있어 그늘이 아주 넓었습니다. 이곳에 자리를 깔고 앉아 도시락을 함께 먹었습니다. 새벽부터 한참을 걸었더니 허기가 져서 그런지 주먹밥의 맛이 일품이었습니다.    

 

▲ 나디 가섭의 수행터

 

식사 후 스님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부처님은 성도 후 가섭 삼형제와 1천명의 제자를 교화했는데 이곳은 그 중 둘째인 나디 가섭의 수행터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부처님은 전정각산에서 정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수행을 했는데도 깨달음을 얻지 못했어요. 그래서 좀 절망했던 것 같아요. 물론 경전에는 ‘부처님이 실망했다’라는 말은 없지만 그걸 신이 속삭이는 것으로 묘사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전정각산에서 나오셨는데, 가야 쪽의 시내로는 가지 않고 산기슭을 쭉 따라 가시다가 모레탈 마을이 있는 산 끝에서 강을 건너 이쪽 강가로 와서 목욕을 하셨습니다.

 

 

강가에서 목욕을 하다 쓰러지셨다는데, 왜 저쪽 편이 아니라 이쪽 편에서 쓰러졌는지가 저는 옛날에 궁금했어요. 그런데 제가 저 산 위에 올라가 내려다보니까 모래로 된 강바닥이 기울어져 경사가 져 있어요. 여기서도 보이듯이 산 쪽이 높고 이쪽이 낮아요. 우기 때는 전체가 물에 잠기지만 우기가 아닐 때는 이쪽으로 물이 흐르니까 목욕하러 이쪽으로 왔고, 이쪽에서 쓰러지셨던 겁니다. 그러니 부처님이 우기 때가 아니라 우기가 지났을 때 오셨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물이 아예 없는 건기 때도 아니에요. 목욕하다가 쓰러져서 물에 잠시 떠내려갔다는 기록이 있으니 그래도 물이 좀 많이 있을 때였을 겁니다. 물에 떠내려가다가 나뭇가지를 잡고 기어 올라오셨어요. 저렇게 늘어진 나뭇가지였을 텐데, 경전에는 ‘아사나나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도말이 중국말을 거쳐 한국말로 옮겨지다 보니 발음이 바뀌어버렸어요.(모두 웃음) 정확하진 않지만 힌디어로는 ‘까후아 트리’, ‘아르주나 트리’라고 추정합니다. ‘아르주나’에서 ‘아사나’가 되지 않았나 해요. 그 자리는 저 위쪽이니까 이따 올라가면서 볼 거예요. 

 

정토회에서 성지순례를 할 때는 모레탈 마을 쪽으로 가서 바로 건너갔지만 오늘은 이리로 온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으신 뒤 사르나뜨로 가서 거기서 처음으로 설법을 하시고 이곳으로 다시 오셨습니다. 그 당시 이 지역에는 ‘가섭’이라고 부르는 큰 수행 단체가 하나 있었는데 그 지도자가 삼형제였습니다. 큰 형님이 500명, 둘째가 300명, 셋째가 200명 해서 모두 1,000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어요. 이들은 두 가지를 행했는데 하나는 불을 피워서 기도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큰 뱀을 부리는 것이었어요. 이들이 유명해서 마가다 국왕인 빔비사라 왕도 1년에 한 번씩 공양을 올릴 정도였어요. 부처님은 그때 아직 35살의 이름 없는 젊은 수행자였지만 이 사람들은 이미 유명하고 나이가 80이나 되었어요. 부처님은 이 사람들을 교화하고자 이리로 다시 오신 겁니다. 그 당시에 수자타 여인이 있었던 마을 이름이 우루벨라였나 봅니다. 첫 번째 형은 우루벨라 마을에서 수행한다고 해서 ‘우루벨라 가섭’이라고 불렸습니다. 

 

둘째 형은 바로 여기에 있었는데, 이곳을 ‘나디’라고 불러서 둘째는 ‘나디 가섭’이었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한번 연구를 해보세요. 이 ‘나디’라는 이름이 어디서 왔을까요? 지금 ‘나디’라는 이름이 어디에 남아 있나요?” 

 

 

스님의 질문에 아미타부가 자신있게 대답했습니다. 

 

“이쪽도 나디고 저쪽도 나디여서 ‘나디’라고 합니다. ‘나디’가 힌디어로 ‘강’이라는 뜻이에요.”(모두 웃음)

 

“두 강 사이에 있다고 그렇게 불렀다고요? 아주 좋은 아이디어예요. (모두 큰 웃음) 어쨌든 둘째는 나디라는 곳에서 수행한다고 해서 ‘나디 가섭’이라고 불렸어요.

 

막내는 가야 마을 가까이에 있어서 ‘가야 가섭’이라고 불렀어요. 가야 가섭이 있었던 데가 가야산이 있는 곳이에요.” 

 

 

“우리는 그곳을 ‘가야 수르’라고 불러요.”

 

“경전에는 ‘가야 쉬르사’라고 되어 있어요. 세월이 흐르고 말도 바뀌면서 옛날 이름도 조금씩 달라졌네요. ‘라자그라하’를 지금은 ‘라즈길’이라고 하고, ‘빠딸리푸트라’를 지금은 ‘파트나’라고 하듯이요. 

 

그런데 가야 가섭이며 우루벨라 가섭은 많이들 알지만 나디 가섭이 있었던 이곳은 사람들이 많이들 몰라서 여기 와 본 사람이 별로 없어요. 두 강이 만나는 곳이라고만 알려져 있지, 구체적인 지역이 어딘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아요. 그런데 우루벨라 가섭이 부처님을 만나 크게 깨닫고 불을 섬기던 제구를 강에 버렸는데 그게 떠내려 오는 걸 나디 가섭이 보고 형님에게 무슨 일이 있는 줄 알고 찾아갔다고 기록되어 있으니까, 나디 가섭이 있던 곳은 저쪽 강줄기가 아닌 이 강줄기여야 해요. 또 여기 이렇게 신전이 있다는 것은 옛날에 섬기던 풍습을 동네 사람이 계속 해오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방금 아미타부가 말해준 내용이 진짜 좋았어요. 왜 '나디'라고 불렀느냐? 두 강 사이를 의미한다. 굿! (모두 큰 웃음) 

 

 

한국 사람들은 불교학박사라고 해도 옛날 기록만 알지, 왜 이런 말이 생겼는지는 잘 몰라요. 그러니 이 동네 사는 여러분들이 이런 걸 연구해야 해요. 그리고 여기가 나디 가섭의 수행터인 줄 아는 사람이 천 명 중 한 명도 제대로 없으니까 그걸 알려주면 여러분이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모두 웃음) 이곳의 지금 이름이 뭐라고요?”

 

“사르사띠입니다.”

 

 

“‘사르사띠’가 바로 나디 가섭의 수행터입니다. ‘가야 수르’가 가야 가섭의 수행터이고요. ‘브람조니’가 가야산이고 그 근처가 가야 가섭의 수행터입니다. 그리고 둥게스와리는 ‘쁘락보디힐’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알려줄 수 있어야 해요. 외국 사람들은 ‘둥게스와리’ 이런 이름을 잘 모르니까요.”

 

스님은 ‘나디’라는 말의 어원을 인도인 스텝들이 유추해 내자 아주 기뻐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어원이 무엇인지 알아낼 방도가 없지만, 이들은 이곳에서 조상대대로 살아온 사람들이다 보니 어원이 무엇인지 금방 찾아내었습니다. 

 

나디 가섭의 수행터를 출발해서 강가비가 마을을 지나 부처님이 쓰러지신 곳을 기념해 세운 탑터에 도착했습니다. 

 

▲ 부처님이 목욕을 하다가 쓰러지신 곳을 기념하여 세운 탑

 

논밭의 한 가운데에 탑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아주 황량하게 흔적만 남아 있었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이곳이 어떤 곳인지 전혀 알지 못할 것입니다. 스님은 허물어진 탑터를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부처님은 네이란자라 강에서 목욕을 하시다가 쓰러지셨어요. 그래서 아사나나무의 가지를 잡고 기어올라오셨는데 마침 소젖을 짜러 왔던 ‘수자타’라는 소녀가 부처님을 발견했습니다. 수자타는 이 동네 촌장집 딸이었습니다. 집에 소가 460마리가 넘을 정도로 아주 많았대요. 소들이 다 물 마시러 이 강변에 와 있으니까 소젖을 짜러 여기까지 왔는데, 와보니 웬 수행자가 쓰러져 있었어요. 그래서 소젖에 코코넛과 쌀을 갈아서 넣고 유미죽을 끓여 먹였습니다. 기록에는 한 번만 먹은 것처럼 묘사되어 있지만 건강이 회복되려면 한 번만 먹은 건 아닐 거예요.

 

 

공양을 드셨다는 곳은 저 위쪽이고, 여기는 쓰러져 계셨던 곳입니다. 옛날에는 여기에 스투파가 있었는데 불교가 없어진 뒤 힌두 스투파가 되었다가, 그것도 이제는 파괴되어 저렇게 탑이 허물어진 흔적만 남아 있어요.” 

 

인도인 스텝들은 허물어진 탑터가 부처님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성스러운 곳이라고 알게 되자 모두들 놀라워하는 표정이었습니다. 

 

다시 발길을 재촉해 다다른 곳은 정토회가 구입한 명상센터 부지입니다. 지금은 담장만 쳐져 있는데 스님은 오래 전에 이곳에 땅을 구입하고 전 세계 사람들이 이곳에서 명상을 할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고 합니다. 물론 봉사 인력도 부족하고, 몇 가지 제약 조건이 있어서 아직은 공사 시작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 정토회 명상센터 부지

 

명상센터 부지 안으로 들어온 스님은 인도인 스텝들에게 이곳은 앞으로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앞으로 보드가야는 명상하는 곳으로 더 널리 알려질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이렇게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도 필요하지만, 여길 찾아오는 세계 사람들에게 명상을 가르치는 역할도 해야 해요. 여러분들 자신을 위해서도 명상을 해야 하지만 앞으로는 여러분들이 외국에서 오는 사람들에게 명상을 가르치는 사람, ‘Meditation teacher’가 되어야 해요.”(모두 웃음) 

 

‘Meditation teacher’ 라는 말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수자타아카데미 교사를 하고 있는 ‘아제이’는 “명상하는 방법을 모른다”며 내일 스님께 명상하는 방법을 물어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명상센터 부지를 나와 조금만 더 걸어가니 부처님이 수자타의 공양을 받은 곳에 세워진 탑이 보였습니다. 

 

▲ 수자타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 곳에 세워진 탑

 

마치 무덤처럼 작은 언덕이 되어 있었는데, 탑이 무너져서 지대가 높아진 것 같았습니다. 스님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이곳은 부처님이 수자타의 공양을 받은 곳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스투파가 두 개 있어요. 하나는 부처님을, 하나는 수자타를 기리는 탑입니다. 경전에는 여기에 계시면서 수자타의 공양을 받았다고 간단히 묘사되어 있지만 건강이 회복되려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걸렸을 거예요. 

 

 

새로운 길인 중도(中道)도 발견했고 건강도 회복한 부처님은 이제 깨달음을 얻기 위한 마지막 정진을 하고자 했습니다. 강 건너 보드가야 쪽과 여기 둥게스와리 쪽 중 어디에서 마지막 정진을 할까 생각하다가 보드가야 쪽으로 가셨어요. 경전에는 둥게스와리 산신이 자꾸 청해서 동굴에 그림자를 남겨놓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부처님을 기리는 스투파가 있으니까 후세 사람들이 많이들 와서 수행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수자타 템플이 생겼어요. 저기 보이죠? 

 

▲ 뒤에 보이는 것이 수자타 템플

 

그러다가 불교가 없어진 뒤 저 절은 힌두교 사원이 되었어요. 이름은 여전히 ‘수자타 템플’이지만 속은 힌두교 사원입니다. 이 탑도 부처님이 계셨던 곳을 기리는 뜻으로 세운 것인데 힌두교 쪽에서 이렇게 탑 위에 작은 사당을 지은 거예요. 이 지역은 모두 힌두교에서 소유하고 관리하고 있습니다.”

 

불교인들에게는 부처님의 발자취가 깃든 소중한 곳이지만 힌두교에서 모든 관리 권한을 가져갔다고 하니 무척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수자타 템플 안에는 수자타가 부처님께 유미죽을 공양 올리는 모습의 조각상을 만들어 놓아 눈길을 끌었는데, 미얀마 절의 스님이 이곳이 성지임을 알리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 주위는 모두 힌두교 사원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 수자타가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모습을 표현한 조각상

 

수자타 템플에서 강가 쪽으로 다시 걸어가니 울창한 숲속에 우루벨라 가섭의 수행터가 있었습니다. 

 

▲ 우루벨라 가섭의 수행터 입구

 

인도인 스텝들은 이미 보광 법사님과 함께 한 차례 다녀간 적이 있기 때문에 직접 들어가보지는 않고 숲속 입구에 그늘이 넓게 드리워진 곳에 앉아 이곳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곳은 우루벨라 가섭이 수행하던 곳입니다. 부처님은 성도 후 바라나시로 가셔서 처음으로 다섯 친구에게 법을 설하시고, 더 많은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해 이곳 우루벨라 가섭의 수행터로 오십니다. 

 

 

우루벨라 가섭을 교화하기 위해 무려 360가지의 신통력 경쟁을 했다고 해요. 그만큼 우루벨라 가섭이 자존심이 세고 교화하기 어려웠다는 겁니다. 삼형제가 다 합치면 제자도 1,000명이나 되고 나이도 80이나 되었으니 스스로 깨달았다고 하면서 자신만만했어요. 부처님은 이 1,000명을 앞에 두고 그 유명한 ‘불의 설법’을 했습니다.

 

‘너희들은 밖에 있는 불은 이제 꺼버렸다. 그러나 아직도 마음속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의 불은 타고 있다.’

 

불을 피워놓고 제사하는 의식은 버렸지만 마음속의 불, 다시 말해 욕심 부리는 탐심과 화내는 진심, 어리석은 치심은 아직 버리지 못했다는 거예요. 그러니 앞으로 수행을 해서 마음속의 불까지 꺼야 한다고 했어요. 그런 설법을 하신 장소가 가야쉬르사, 혹은 브람조니 올라가는 산중턱이라고 합니다. 

 

불의 설법을 마친 부처님은 이제 1,000명의 대중을 이끌고 라즈길로 갔습니다. 우루벨라 가섭이 라즈길로 온다니까 빔비사라 왕이 마중을 나왔어요. 옛날에는 큰 스승이 오면 왕이 마중을 나갑니다. 여러분들 작년에 제띠안에 가봤죠? 제띠안에서 라즈길 가는 길에 있는 고개가 외성, 즉 바깥 성의 서쪽 문이 있던 자리에요. 그 안에는 내성이라고 해서 왕성이 따로 있습니다. 왕은 그 서쪽 문으로 나와서 제띠안이 있는 곳까지 마중을 나왔어요. 그래서 부처님과 빔비사라 왕이 제띠안에서 만났습니다. 빔비사라 왕은 아직 부처님은 몰랐기에 우선 우루벨라 가섭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어떻게 지냈습니까? 당신이 어떤 젊은이의 제자가 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도저히 믿어지지 않습니다. 마치 세 살 먹은 어린 아이가 팔순 노인에게 “이는 내 손자요”라고 말하는 것을 믿기 어렵듯이 믿기가 어렵습니다.’(인도인 스텝들 모두 크게 웃음) 

 

 

그러자 우루벨라 가섭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부처님을 세 바퀴 돌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고, 이마를 부처님 발에 대고 절한 후 부처님을 올려다보면서 이렇게 답했습니다. 

 

‘이분은 나의 스승이고 나는 이분의 제자입니다. 내가 이분을 만나기 전에는 윤회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분을 만나고 나서 그 윤회의 씨앗을 버렸습니다.’

 

윤회의 씨앗을 버렸다는 말은 니르바나를 얻었다는 뜻이에요. 그러자 빔비사라 왕이 ‘저 분이 바로 그 젊은 스승이구나’ 하고 부처님께 스승의 예를 갖춰 인사를 드리고 법문을 청했습니다. 그리고 그 법문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는데 여기서는 제띠안에서의 이야기까지만 할게요. 법문을 들은 왕은 부처님을 왕궁으로 청했지만 부처님이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의 북쪽 문 바깥에 있던 베누반 비하르, 즉 ‘죽림정사’를 부처님께 기증했습니다.

 

그러니 이곳 가야 지역에서는 세 가지가 중요합니다. 첫째,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기 전에 둥게스와리에서 여기 수자타 마을까지 이르는 지역에서 6년간 수행하셨어요. 둘째,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셋째, 깨달음을 얻은 뒤에 사르나뜨로 가셨다가 다시 오셔서 우루벨라 가섭, 나디 가섭, 가야 가섭을 비롯한 사람들을 교화하셨어요. 

 

 

이곳에 오는 많은 사람들이 ‘보드가야에서 부처님이 깨달았다’라는 하나만 알고 갑니다. 제대로 알려면 ‘수행하고. 깨닫고. 교화했다’라는 세 가지를 다 알아야 해요. 우루벨라 가섭을 비롯한 1,000명을 교화했기 때문에 빔비사라 왕을 교화할 수 있었던 거예요. 부처님 혼자 갔다면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을 알아볼 수 없었을 거예요. 그러니 이 전체를 우리가 잘 알아야 합니다. 보드가야는 그래도 많이들 아니까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한테 물어도 알 수 있지만, 그 외 부분은 다른 사람들이 잘 모르니까 여러분들이 잘 알아서 알려줘야 해요. 사무지가 헤?(이해하셨어요?)”

 

“예스!” (모두 웃음) 

 

한 해에도 수 십만 명이 보드가야를 참배하고 가지만 오늘 스님이 알려준 이런 곳들은 대부분 알지 못한다는 이야기에 인도인 스텝들은 더욱 귀를 쫑긋 세우고 스님의 설명을 경청했습니다. 무엇보다 자신들의 마을에서 일어난 일들이니까 자신들이 가장 잘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습니다. 

 

스님은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했지만 점심 식사가 식당에 예약되어 있어서 오늘은 여기까지만 설명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마침 저 멀리 네이란자라 강 건너편에 전정각산이 끝나는 부분이 살짝 보였습니다. 스님은 우기 때가 되면 마치 바다 위에 전정각산이 떠 있는 것처럼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된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전정각산을 배경으로 다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스님으로부터 마을 주위에 남아 있는 부처님의 발자취에 대해 많은 설명을 들었기에 인도인 스텝들은 고향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히 커진 것 같았습니다. 기념 사진을 찍는데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습니다.  

 

다시 논두렁 길을 따라 보드가야 대탑이 있는 쪽으로 걸었습니다. 이제 인도인 스텝들은 이 마을이 완전히 다른 눈으로 보일 것입니다. 신이 났는지 얼마전 정토회 성지순례단의 스텝으로 참여했었던 아미타부는 자신이 본 여러 성지의 모습을 재미있게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논두렁길이 끝나는 지점에는 볏집이 어마어마하게 쌓여져 있었는데 그 앞에는 엄청난 규모로 수자타의 공덕을 기리는 탑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 수자타의 공양을 기념하여 세워진 탑

 

볏짚의 양을 보니 수자타가 그 당시에도 부자였지만 지금까지도 그 후손들이 조상대대로 풍족하게 살았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수자타의 공덕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수자타가 부처님께 공양 올린 것이 훌륭한 줄은 불자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죠. 특히 이것은 부처님이 되신 뒤에 공양 올린 것이 아니라 그냥 한 수행자로 쓰러져 계실 때 공양을 올린 것이기 때문에 더욱 칭송받을 만합니다. 요즘에 비하면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대접했는데 그 사람이 그걸 먹고 살아나서 부처가 된 거예요. 

 

 

우리 학교 이름이 ‘수자타 아카데미’인 이유도 우리가 여러분 같은 동네 아이들에게 음식을 먹이고 교육을 시키면 여러분들이 커서 다들 부처님 같이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이 부처님 같이 돼야 저도 수자타처럼 공양 올린 사람이 되어 칭송받는 거예요. (모두 웃음) 사무지가 헤?(이해하셨어요?)”

 

“예스!”(모두 웃음)

 

왜 학교 이름이 ‘수자타 아카데미’가 되었는지 설명을 듣자 모두 활짝 웃었습니다. 가슴이 뭉클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수자타의 수투파 앞에는 작은 학교가 하나 세워져 있는데, 학교 앞에서 법륜 스님의 사진을 보여주며 여기가 수자타아카데미라고 선전하면서 구걸을 하는 청년들이 일부 있다는 제보가 많이 있었습니다. 인도인 스텝들이 저 사람이라고 알려주어서 찾아가서 그러면 안 된다고 설득을 시도했는데, 자신은 아니라고 발뺌을 하고 다른 사람이 더 있다고 얘기해서 다음에 다시 오기로 하고 지나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전정각산에서 수자타 마을까지의 도보 순례를 모두 마쳤습니다. 보드가야로 향하는 다리를 건너는 중에 오토릭샤를 잡아 타고 다함께 점심식사 장소로 이동했습니다. 

 

▲ 보드가야로 넘어가는 다리

 

인도인 스텝들은 돈을 절약하려고 오토릭샤 한 대에 건장한 청년 15명이 탑승하는 진기명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오토릭샤가 앞바퀴를 휘청하면서 울퉁불퉁한 길을 무사히 지나가는 모습은 절로 감탄이 나오게 했습니다. 

 

▲ 작은 오토릭샤에 장정 15명이 탑승!

 

오늘 점심 식사는 스님이 특별히 허락해 주셔서 풍족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한해 동안 학교 운영을 위해 고생이 많았던 인도인 스텝들과 한국인 스텝들, 새로 파견을 온 행자대학원생들을 격려하기 위해서입니다. 더군다나 인도JTS의 이사 중 한 명인 나레스지가 운영하는 곳이어서 저렴한 가격에 아주 푸짐하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스님은 인도인 스텝들에게 내일 오후에 두르가푸르-자그디스푸르 청년팀과 축구 시합을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인도인 스텝들은 이길 자신이 있다며 흔쾌히 수용을 했습니다. 무슨 근거로 자신 있어 하는지 몰라서 스님도 쁘리앙카도 모두 웃었습니다. 

 

스님은 혹시나 승부가 과열되어서 싸우게 될 것을 우려했는지 “일부러 질 필요는 없지만, 너희가 지는 것 또한 마을 청년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는 일이 되니 좋은 것 아니냐”며 경쟁하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습니다. 

 

다시 학교로 돌아오자 인도인 스텝들은 그동안 아이들 가르치고 공부하느라 축구 연습을 오랫동안 못했다며 막판 집중 연습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평소 실력대로 해야지” 라며 웃음을 보인 후 숙소로 들어왔습니다. 

 

저녁 7시부터는 목요 수행법회가 열렸습니다. 사무실 한 쪽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법복을 수한 채 여법하게 법문을 듣는 모습 속에서 수행의 자세를 놓치지 않으려는 행자님들의 의연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목요 수행법회가 열리는 동안 스님은 인도를 떠나기 전 처리해야 할 여러 가지 업무들을 보면서 일찍 휴식을 취했습니다. 

 

내일은 아침 8시부터 인도인 스텝들과 집중 수련을 할 예정입니다. 학교를 운영하면서, 함께 일하면서, 공부하면서 들었던 여러 가지 의문과 고민들을 스님께 묻고 답변 듣는 시간을 가진 후 오후에는 마을 청년팀과 축구 시합을 할 계획입니다. 

 

▼ 배고픈 사람은 먹어야 합니다, 아픈 사람은 치료받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제 때에 배워야 합니다. JTS는 인도 불가촉 천민 마을 둥게스와리 아이들을 위해 수자타아카데미를 설립하고 기아, 질병, 문맹 퇴치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기아 질병 문맹퇴치 - 지금 함께해주세요 : JTS 후원하기

전체댓글 40

0/200

안녕하세요? 스님의 글을 볼때면 스님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생각을 합니다

스님 제가 자녀들 때문에 많이 힘듭니다. 매번 말씀과 기도로 제 자신을 다잡아 보지만 가끔 이렇게 괴롭습니다

아이들은 고등학생입니다. 둘다 사회성과 자존감이 매우 낮습니다. 부모를 닮아서 그런가요? 저희 부부는 사회성이 낮지 않고 이웃들과 잘 지내는 편입나다. 사회적으로 어느정도 성공한 편입니다. 하지만 이이들과 소통도 어렵고 힘듭니다. 앞으로 군대도 가야하는데 두려움이 앞섭니다. 무서운 일들이 생길까봐 사는게 많이 두렵습니다.
도움의 말씀 간절합니다

2016-02-16 12:07:19

곽노진

인도 성지 순례를 막 마치고 와서 이 글을 읽으니 그 곳 전경이 떠오르며 이해가 잘 되니 참 기쁩니다.

2016-02-07 00:16:39

오유진

스님이 전해주시는 부처님이야기는 동화책이나 영화보다 재미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6-02-06 22:44:33

전체 댓글 보기

스님의하루 최신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