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1.7.11 영어 통역 즉문즉설, 실천활동 간담회, 일요명상
“아버지에게 학대받은 기억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도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농사일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밭으로 가는 길에 안개가 자욱했습니다.

산윗밭에 도착하니 흐드러지게 핀 도라지가 밭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윗단에 고수를 수확했습니다. 고수는 하얀 꽃이 피었다가 다 지고 씨방이 붉게 물들다 못해 까맣게 말랐습니다. 이 고수를 줄기째 베어 말린 후 씨앗을 받습니다.


스님은 도라지밭 옆에서 고수를 낫으로 슥슥 베기 시작했습니다. 고수 사이사이 풀이 자라 있어 풀을 골라내며 고수를 베다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스님과 행자들이 울력을 하는 동안 안개가 해를 휘감았다 물러섰다를 반복했습니다. 덩달아 밭에 보얀 안개가 스멀스멀 휘감았다 햇살이 비쳤다를 반복했습니다.

한참을 쭈그려서 고수를 베다 허리를 펴니 뻐근합니다.

“아이고, 허리야.”

잠깐 허리를 폈다가 다시 고수를 벴습니다.

한 줄 끝까지 고수를 수확하고 스님은 먼저 울력을 마쳤습니다.


“저는 8시부터 법회가 있어서 먼저 내려가 볼게요.”

“네, 스님.”

밭을 나오다 스님은 고랑에 가득 자란 풀을 발견했습니다.

“지난번에 모란밭에 난 풀은 다 매서 아직 깨끗한데 고랑에 난 풀을 안 뽑았더니 밭 위로까지 뻗어오르네요.”

풀을 매다가 스님은 시간을 보고 황급히 일어났습니다. 내려가는 길에도 스님은 발걸음을 여러 차례 멈추었습니다. 울타리를 휘감은 칡덩굴, 길 옆으로 뻗어 나온 덩굴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아이구, 이러다 못 내려가겠어요.”

스님은 그만 길에서 눈을 떼고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겨우 시간에 맞춰 두북수련원으로 도착했습니다. 오전 8시부터 영어 통역 즉문즉설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미국, 캐나다, 유럽 등 세계 각국에서 200여 명의 외국인들이 유튜브로 생방송에 접속했습니다.

먼저 스님이 한국에서의 일상을 소개하며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한국은 지금 장마 시즌입니다. 영어로는 ‘monsoon’이라고 하죠. 지난주에는 비가 많이 왔습니다. 장마 전에 곡식을 수확해야 되는데 바빠서 못 했어요. 그래서 장마가 끝난 뒤 오늘 곡식을 수확하러 갔더니 대부분 썩어 있었습니다. 제때 곡식을 수확해야 되는데 때를 놓치니까 손실이 생겼어요. 반대로 장마 전에 채소를 밭에 뿌렸는데 그건 아주 잘 됐어요. 장마를 지나면서 싹이 터서 지금 잘 자라고 있습니다.

중도는 일상 속에서 실천하는 것

그래서 적절한 때에 적절한 장소에서 적절하게 대응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고 적절하게 대응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중도’라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론적인 철학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늘 적절하게 조절해 나가야 하는 겁니다. 때를 지나치거나, 때를 너무 일찍 하거나, 이런 실수를 거듭해 가면서 적절한 때를 맞춰가는 거예요.

목표가 분명하다면 실수나 실패는 잘못된 것이 아니라 목표로 나아가는 하나의 과정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수나 실패를 했을 때 좌절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어요. 오히려 실수나 실패를 통해서 더 나은 방법을 찾아나가야 합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면 일상생활이 편안해집니다. 적절하게 대응하면 잘해서 다행이고, 실수를 하게 되면 개선할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을 찾아서 다행입니다. 이렇게 수행적 관점을 정확히 가지면 지나간 과거의 잘못마저도 미래의 좋은 교훈이 됩니다. 지나간 과거를 상처로 간직하고 있느냐, 아니면 미래에 도움이 되는 좋은 자산으로 간직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하는 게 좋으냐, 저렇게 하는 게 좋으냐의 문제를 갖고 수행자는 망설이지 않습니다. 수행자는 이렇게 하면 괴로운가, 괴롭지 않은가의 문제를 갖고 항상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어서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세 명의 외국인이 사전에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두 번째 질문자는 미국 버몬트에 사는 남자분이었습니다. 천일결사에 입재하고 꾸준히 정진하고 있는 분인데, 어릴 때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은 기억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는지 질문했습니다.

아버지에게 학대받은 기억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요?

“Good evening Sunim from Burlington Vermont and thank you so much for taking my question. Listening to past Dharma talks, I’ve heard you describe developing empathy for those who have created suffering in our lives as a way of overcoming attachments to the past and suffering in the present. Part of what I’m working through is particularly horrific kind of abuse that I grew up with at the hands of my father. I don’t see how I could ever develop empathy for a person who did to a child to me the things that my father did. And I’m wondering if there’s another path forward.”
(안녕하세요. 스님. 버링턴 버몬트주에서 인사드립니다, 질문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전 법문들을 들으면서 과거와 현재의 고통과 집착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인생에 고통을 준 사람에 대한 공감 능력 기르는 것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매진하고 있는 것은 자라면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끔찍한 학대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아버지가 어린 저에게 했던 행동들에 대해 도저히 어떻게 공감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다른 방법이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 부모들이 아이를 학대하면 아이들이 성장해서 어른이 돼도 그 고통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를 학대하는 것은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어른이 돼서 뺨을 열 대 때리는 것보다 아이에게 손가락으로 조금 때리는 것이 더 큰 상처입니다. 큰 나무는 도끼로 한 번 내려찍어도 상처만 나지 죽지 않지만, 여린 싹은 약간만 건드려도 죽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이 올바른 행동을 하지 않는 속에서, 즉 학대받는 속에서 아이가 자랐다면, 그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상처를 계속 갖고 괴로워하며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할까요? 그 사람 때문에 내가 괴롭다고 얘기한다고 해서 나의 괴로움이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이 괴로움은 이제 나의 문제입니다.

비유를 들어서 말씀드릴게요. 어떤 여인이 납치가 되어서 성매매하는 곳에 팔려갔습니다. 본인이 거부하니까 그들은 여인을 때렸습니다. 그리고 여인에게 마약주사를 놓았습니다. 여인은 거부했지만 강제적으로 마약을 투여하는 걸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1년이 지났고 경찰에 의해 구출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마약에 중독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때 납치자를 체포해서 처형을 하든, 감옥살이를 시키든, 이 여성의 마약 중독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납치범을 처형하는 것은 재발 방지를 위해서 하는 것이지 여인의 치료에 도움이 되는 건 아니에요. 그 여인이 구출이 된 후에도 새로 마약을 구해서 맞았다면 범죄자가 됩니다. 아무리 납치자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해도 직접 마약을 투여하는 건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습니다. 마약 중독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자신의 문제입니다. 원인이 어쨌든 이제는 나의 문제가 된 거예요.

그것처럼 내가 어릴 때 어떤 환경에서 어떤 고통을 겪었다 하더라도 성인이 된 지금의 입장에서는 나의 문제입니다. 아버지의 문제도 아니고, 그 누구의 문제도 아니에요. 과거에 연연해서 남은 인생을 괴롭게 살 것인가, 과거를 끊고 미래에는 행복하게 살 것인가, 둘 중에 내가 선택해야 할 일입니다.

이럴 때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내가 지금 안 죽고 살아 있다’ 하는 긍정성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 바에야 죽는 게 낫습니까? 아닙니다. 그래도 살아있는 게 낫습니다. 이런 자기 긍정성을 먼저 발견해야 합니다. 학대를 안 받고 살았다면 물론 더 좋은 일이지만, 학대를 받았다 하더라도 살아있는 게 낫다는 긍정성을 자각해야 해요.

지금 내가 살아 있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누구입니까? 바로 어머니와 아버지예요. 그들이 나를 낳아줬고 나를 키워줬습니다. 학대를 안 하고 키웠으면 물론 더 좋았겠지만 그들은 학대를 하더라도 일단 나를 키워줬습니다. 이건 고마운 일이에요. 학대한 걸 고맙게 여기라는 게 아니라 지금 내가 살아있기 위해서는 그들의 공로가 있었다는 것을 고맙게 여기라는 겁니다. 우선 내가 살아있는 것의 뿌리이자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은 부모님이기 때문에 부모님에게 감사해야 됩니다.

그럼 상처는 어떻게 치유해야 할까요? 성폭행을 당했다고 할 때 상처가 몸에 있습니까? 마음에 있습니까?”

“It’s in both I guess it originates inmy mind but I experience most of it physically”
(몸과 마음 둘 다에 상처가 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발생하지만 대부분은 육체적으로도 남아 있습니다)

“신부님이 질문자의 머리에 손을 얹고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질문자가 신성해집니까?”

“Not in my thinking.”
(제 생각에는 아닙니다)

“누군가 자기를 성추행한다고 자기가 더러워집니까?”

“Not in a real way.”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내 몸과 내 마음은 그 누구도 신성하게 할 수도 없고, 그 누구도 더럽힐 수도 없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신부님이 축복을 줄 때 내가 그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해서 신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가 성추행을 할 때 내가 더러워졌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이 몸은 성스러워질 수도 없고 더럽혀질 수도 없습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공(空)’이라고 표현합니다. 공한 줄 알면 아무런 상처의 흔적이 남을 게 없습니다. 반야심경에서는 성스러움도 없고 더러움도 없다는 뜻으로 ‘불구부정(不垢不净)’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니 질문자는 아무것도 더러워진 바가 없다는 사실을 지금 자각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직시하게 되면 어떤 트라우마도 치유가 됩니다.

그러면 왜 상처가 되었을까요? 그때는 질문자가 어려서 사실을 사실대로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그게 굉장히 나쁜 것인 줄 알았던 거예요. 그래서 상처가 된 겁니다. 그러나 이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나서 내 몸은 누구도 더럽힐 수도 없고 깨끗하게 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어젯밤에 마치 악몽을 꾼 것과 같습니다. 이럴 때는 ‘꿈이었구나!’ 하고 꿈속에서 깨어나면 상처를 입은 바가 없습니다. 그러면 과거가 어쨌든 지금부터 나는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어요.

그렇게 되면 질문자는 이 경험을 통해 앞으로 어린아이들을 보호하는 일을 누구보다 잘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이런 진리를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학대를 받게 되면 마음속에 큰 상처를 간직하게 됩니다. 그러니 질문자는 이런 일이 앞으로 일어나지 않도록 사회 운동을 할 수도 있어요. 이런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질문자는 그들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도 그런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나는 붓다 담마를 통해서 내 몸이 본래부터 더럽혀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러니 너희들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이런 희망을 그들에게 줄 수 있습니다. 깨달음을 통해서 과거의 상처를 자산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건강하게 만들어 가면 좋겠어요.

‘이 몸은 더럽혀진 바가 없다. 아버지든 누구든 내 몸을 더럽힐 수가 없다. 그것은 어젯밤의 악몽이었다. 나는 이미 꿈에서 깨어났고, 앞으로는 나는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다.’

이렇게 관점을 잡으셔야 돼요. 그러나 이 대화가 끝나면 또다시 꿈속으로 들어가게 될 겁니다. 또 악몽을 되풀이하며 꿀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괴로워하지 말고 눈을 뜨려고 해야 됩니다. ‘괴로울 일이 없다’, ‘더럽혀지지 않았다’ 이렇게 자꾸 자각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질문자는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밝게 웃었습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제 여동생의 아들이 심각한 질병을 앓게 되어 자기를 돌볼 능력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습니다. 나아진다는 희망도 없습니다. 여동생의 불행을 줄이기 위해 제가 실용적으로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요?
  • 아버지가 폭력을 행사하고 어머니와 저를 때렸습니다. 아버지는 가끔 미안하다고 하면서도 똑같은 폭력을 되풀이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자란 저는 결혼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대화를 마치고 스님이 질문자들에게 한 줄 소감을 물어보았습니다. 아버지에게 학대받은 상처에 대해 질문했던 남자 분도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It’s interesting I took a lot from your answer to my question and also from the one that came after it. In my own life I had a lot of success treating symptoms of what I encounter now as a result of trauma but the gratitude from my own life that you talked about has really only been a new thing that started to occur in me as I’ve been practicing. What occurs to me from what you said to me today was the personality of my father that was the abuser is gone in the past and that’s someone who I can never empathize with, ever connect with but it’s not someone who’s here anyway. But that person the fact of his existence as you say is what led to my own existence and it’s an existence that I’m really beginning to enjoy at this point in my life. Thank you so much for your answer to my question.”
(매우 흥미롭습니다. 제 질문과 다음 질문자에 대한 스님 말씀을 통해 많이 배웠습니다. 그동안 제 인생에서 트라우마 증상을 치료하는 데는 많은 성과가 있었지만, 인생에 대한 감사함은 수행을 하면서 새롭게 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하신 말씀 중에 배운 점은 학대자인 아버지의 성격은 과거에 머물러 있고, 제가 공감할 수 없는 성격이지만, 어차피 아버지는 지금 여기 계시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존재로 인해 제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저의 존재를 인생의 현 시기에 점점 즐기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질문에 답변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스님은 다시 한번 질문자를 격려했습니다.

“아버지 때문에 내가 괴로워한다면, 아버지 귀신이 지금 나를 지배하는 거예요. 내가 아버지 귀신의 지배를 받아야 되겠어요? 내가 내 인생을 살아야 되겠어요?”

“내가 내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 이제 아버지 귀신을 버리세요. 아버지 귀신으로부터 독립해야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홍서원을 다 함께 영어로 낭독한 후 다음 달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실천활동 담당자 및 일반회원 그룹장 간담회

잠깐 휴식을 한 후 곧이어 오전 10시부터 실천활동 담당자들 그리고 일반회원 그룹장들이 모두 화상회의 방에 입장한 가운데 간담회를 시작했습니다.

두북 수련원 방송실에 마련된 모니터에는 500명의 얼굴이 화면에 가득 찼습니다. 참가자 소개 시간과 정토회 대표님의 인사말을 들은 후 스님이 오늘 간담회를 열게 된 취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온라인정토회는 우리가 처음 가보는 길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많은 연구를 하고 설계를 해서 재편을 했습니다만, 설계에 부족한 점도 있고, 설계가 잘못된 점도 있습니다. 물론 방향은 제대로 잡고 나아가고 있습니다. 어쨌든 온라인으로 전환한 건 잘한 것 같아요. 지금까지도 법당을 가지고 있었으면 문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하는 일을 수없이 반복해야 했을 겁니다. 지금 학교도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정토회는 일찌감치 문을 닫아버려서 열었다 닫았다 할 걱정이 없어졌잖아요. 숫타니파타에 ‘지붕을 잘 이어놨으니까 비야, 오려면 와라’ 하는 표현이 있는 것처럼 정토회는 온라인으로 전환을 했기 때문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이 되든지 말든지 법회 진행에 아무런 차질이 없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더 이상 끌려다니지 않기 위해

그 작은 바이러스한테 영향을 받아서 맨날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게 자존심 상하지 않아요? 그보다는 덩치가 큰 진딧물의 영향을 받는다면 그나마 괜찮은데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한테 전전긍긍하면서 희로애락을 느끼고 있잖아요. 그래서 정토회는 방향을 확 틀어버려서 바이러스한테 더 이상 끌려 다니지 않기로 한 겁니다.

대신에 여러 가지 미비점이 많습니다. 비대면으로 갔을 때의 미비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마련된 게 실천 활동입니다. 실천 활동은 크게 두 가지예요. 하나는 으뜸절에 가서 하는 활동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기가 사는 동네에서 하는 활동입니다. 동네에서 하는 실천 활동은 정토회의 일을 하는 게 아니고 쓰레기를 줍든, 어려운 이웃을 돕든, 동네의 일을 하는 거예요. 반면에 으뜸절에서 하는 실천 활동은 정토회의 일을 하는 겁니다. 예전에는 대부분 법당에 와서 하는 일이었죠. 그런데 이제는 으뜸절에서 하는 활동과 동네에서 하는 활동, 이렇게 두 개의 활동이 새로 생겼습니다.

정토회 회원들이 가야 할 길, 실천 활동

그런데 지금 코로나 사태 때문에 실천 활동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방금 전 모범 사례를 보여주긴 했지만 몇몇 지부나 지회에서는 실천 활동의 성과를 낸 곳이 있습니다. 특히 통일특별위원회에서는 행복시민들과 지역 실천 활동의 사례를 많이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정토회는 지역 실천 활동 사례를 아직 못 만들고 있습니다. 오늘 보여준 사례를 벤치마킹해서 앞으로는 정토회도 지역 실천 활동을 해나가야 합니다.

실천 활동 담당자들이 오늘 간담회에 참가한 이유는 이런 활동들을 다양하게 개발해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반회원 그룹장들이 오늘 간담회에 참가한 이유는 앞으로 회원들이 가야 할 길이 법회 듣는 것을 제외하고는 실천 활동을 많이 해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법문을 듣거나 공부를 하는 것은 모두 온라인에서 가능합니다. 그러나 실천 활동은 으뜸절에 가서 하거나,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해나가야 합니다. 실천 활동이 바로 앞으로 정토회 회원들이 가야 할 길이에요. 이런 이유로 두 담당이 오늘 합동으로 모임을 갖게 된 겁니다.”

이어서 질문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다섯 명이 사전에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실천 활동에 대한 교육이 소홀해진 것 같다며 어떻게 보완하면 좋을지 질문했습니다.

실천 활동에 대한 교육이 소홀해진 것 같아요

“환경 교육, 통일 교육, 복지 교육이 전법활동가 교육에 포함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법활동가들이 실천 활동 경험이 있어야 진행자로서 학생들에게 안내를 잘할 수 있는데, 코로나19 이후로 실천 활동을 거의 하지 않은 상황에서 교육의 기회도 없으니 실천 활동이 많이 소홀해진 것 같습니다. 전법활동가라면 전법만 하는 게 아니라 실천 활동과 균형을 좀 맞춰야 되지 않을까요?”

“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데 정토회에서 실천 활동은 지도법사인 제가 늘 하고 있잖아요. 농사도 짓고, 봉사도 하고, 통일 운동도 하고, JTS 복지 운동도 하고, 구호 활동도 하는 모습을 늘 보여주고 있잖아요. 정토회 회원이 된다는 것은 실천 활동이 기본입니다.

스님이 아무것도 안 하고 참선만 하고 있다면 정토회 회원 중에 실천 활동을 안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님이 늘 직접 보여주고 있잖아요. 이 부분은 제가 법문 할 때 여러 번 강조한 바 있습니다.

‘실천 활동을 하지 않고 수행만 하겠다는 사람은 정토회에 있지 말고 다른 절로 가라. 수행은 하지 않고 실천 활동만 하겠다는 사람은 정토회에 있지 말고 시민단체로 가라. 정토회는 자기 수행과 사회적 실천을 같이 하는 곳이다.’

이렇게 누누이 말했기 때문에 가르침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리고 제가 직접 그렇게 살고 있잖아요. 다만 지금 진행되고 있는 전법활동가 교육은 온라인으로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전법에 필요한 것들만 우선적으로 가르쳐야 해서 실천 활동에 대한 내용이 부족했을 수 있습니다. 내용을 점검해서 실천 활동에 이런 내용들이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지적을 해주셨어요.”

“감사합니다.”

현장에서도 즉석에서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질문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여러 질문이 계속 이어진 후 마지막으로 스님이 닫는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오늘은 첫 번째 아이디어 회의를 가진 거예요. 여러 아이디어를 가지고 여러분들이 직접 한 달 정도 다양한 실천을 해보시고, 8월 중순에 성공사례에 대한 사례 발표회를 해봅시다. 실패 사례를 발표해도 좋아요. 직접 시도해봐서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은 후 다시 방향을 모색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모임을 기약하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오후에는 낮 기온이 31도까지 올라갔습니다. 날씨가 무더워서 스님도 농사일을 잠시 내려놓고 책 원고 교정을 보았습니다.

저녁 6시, 오후 내내 원고 교정을 보던 스님은 향존법사님과 대구경북지부 거사님들이 논에서 피를 뽑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논으로 나갔습니다. 논에 도착하니 넓은 논 한가운데 거사님들이 허리와 고개를 푹 숙이고 피를 뽑고 있었습니다.

스님도 긴 장화를 신고 논으로 들어가 피를 뽑기 시작했습니다. 30도가 넘는 데다 습도까지 높아서 무척 후덥지근했습니다.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발이 푹푹 빠지는 논에서 허리를 숙여 모 사이에 난 피를 뽑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해는 지고 있었지만 송골송골 맺히던 땀방울은 빗물처럼 흘러내렸습니다. 거기다 땀냄새를 맡은 모기며 쇠파리가 날아와 물었습니다. 고개 숙여 피를 뽑던 사람들은 벌레를 쫒을 겨를 없이 속수무책으로 물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님도 쇠파리에게 한방 쏘였습니다.


해가 산 너머로 지고 하늘에서는 곧 비가 쏟아질 듯 우중충해졌습니다.

“오늘은 그만합시다! 수고했어요.”

논에서 나오니 7시 30분이 넘었습니다. 스님은 일요명상 생방송을 해야 해서 먼저 가고 거사님들은 간단히 나누기를 하고 돌아갔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쉬웠는데, 점점 힘이 들어서 괜히 왔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웃음) 그래도 땀 흘려 일하고 나니 보람되고 개운합니다.”

“어렸을 적 고생하셨던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나 감사했습니다.”

울력을 마치고 나니 그제야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돌아가는 길에 마을 어르신을 만났습니다. 옷이 온통 젖은 스님을 보고 어르신이 물었습니다.

“뭐하고 오는교?”

“논에 피 뽑고 왔습니다.”

“아이고, 요새 누가 논에 피를 뽑노. 답답하데이.”

“오랜만에 하니 쉬운 일이 아니네요.”

“그래도 멋있다.”

“고맙습니다.”

간단히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시간에 맞춰 방송실로 갔습니다.

온라인 일요 명상

저녁 8시 30분부터 온라인 일요명상을 시작했습니다. 코로나 사태 이후 66번째 진행되는 온라인 명상 시간입니다.

먼저 스님이 오늘 하루 일과를 소개하며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저는 오늘 논에 있는 피를 뽑고 김을 매는 일을 했습니다. 농사일 중 가장 어려운 일 중에 하나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사람이 직접 논을 매었는데, 지금은 대부분 제초제를 뿌리기 때문에 논을 매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저희들은 유기농 경작을 하니까 피를 일일이 다 손으로 뽑아야 합니다. 경제적으로 따지면 굉장히 비효율적인 농사예요. 그러나 운동한다고 생각하고 부지런히 김을 매었습니다. 또 옛날 어릴 때 추억도 떠오르다 보니 힘은 들었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었어요. 여러분들은 오늘 하루 어떻게 보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어서 지난주에 영어로 올라온 두 개의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해준 후 명상을 시작했습니다.

“마음을 콧구멍 끝에 두게 되면, 저절로 숨이 들어가고 숨이 나오는 것이 알아차려집니다. 숨이 들어가고 숨이 나오는 호흡은 늘 우리 몸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우리가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겁니다. 지금 편안히 눈을 감고 앉은 상태에서 숨이 들어가고 숨이 나가는 호흡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 봅니다.

그런데 명상을 해보면 우리의 마음은 호흡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자꾸 다른 데로 도망가요. 바깥에서 소리가 들리면 거기에 관심을 갖고, 다리가 아프거나 허리가 아프면 거기에 신경을 씁니다. 또 과거의 지나간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에 대한 스토리를 만들어요. 미래에 어떤 구상이 떠오르면 그것에 대한 스토리를 만들고 불안해합니다. 이렇게 마음이 온갖 것에 기웃거리는 것을 멈추고 오직 콧구멍 끝에 딱 관심을 모아서 호흡을 알아차립니다. 길들여지지 않은 말이 날뛰듯이 마음이 이리저리 날 뛰지만 말의 코뚜레를 잘 만들어서 손에 딱 쥐고 내가 가야 할 길을 가듯이, 마음을 콧구멍 끝에 모아서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는 데에 집중해 봅니다.”

탁! 탁! 탁!

죽비 소리와 함께 명상을 시작했습니다. 오늘도 40분 간 명상을 해보았습니다.

다시 죽비 소리가 들리고, 스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해보니 어땠습니까?”

수십 개의 소감이 올라오는 가운데, 스님이 하나하나 소감을 직접 읽어 주었습니다. 외국인이 영어로 올린 소감도 눈에 보였습니다.

“I realize that my restlessness is out of control and it's driving me instead difficult to bring my mind back.”
(불안함과 초조함을 제가 컨트롤할 수 없고 오히려 저를 움직이는 것 같아요. 제 마음을 다시 붙잡는 것이 굉장히 힘듭니다.)

스님은 다시 한번 명상하는 방법을 강조했습니다.

“마음이 불안하든 초조하든 그런 상태를 안정시키려고 하지 말고, 다만 마음을 편안하게 해서 코끝에 집중해 봅니다. 그러면 마음은 저절로 편안해져요. 불안하면 ‘불안하구나!’ 하고 알 뿐이고, 초조하면 ‘초조하구나’ 하고 알 뿐이에요. 그것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밤 10시가 다 되었습니다.

내일은 전법활동가 법회가 열리는 날입니다. 하루 종일 원고 교정을 하다가 해가 질 무렵에는 농사일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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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근

감사합니다

2021-07-19 14:58:22

송미해

이른 아침 안개낀 도라지 밭 풍경이 평온해 보입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2021-07-18 08:11:08

김정은

흐트러지게 피어있는 도라지꽂밭에 잠시 허리펴시는 작업복 차림의 스님이 눈부시도록 아름답네요ㆍ감사합니다 ᆢ

2021-07-17 13:5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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