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2.8.14 청년특별지부 봉사활동, 영어 즉문즉설, 발심행자 수계식
“상대가 고백을 받아주면 그때부터 마음이 식습니다, 왜 그렇죠?”

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은 청년특별지부에서 100여 명의 청년들이 두북 수련원에 봉사활동을 하러 왔습니다.

스님은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아침 6시에 농막 앞에서 청년들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어디서 이렇게 많은 청년들이 왔어요? 다들 불교대학과 경전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이에요?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웃음)

청년들은 지난 5개월 동안 온라인으로만 스님 얼굴을 보고 강의를 들었습니다. 오늘 처음으로 스님을 가까이에서 직접 만났습니다. 환호와 박수 속에서 스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왜 스님이 이곳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기후 변화로 인해 앞으로 식수 부족, 식량 부족, 에너지 부족이 점점 심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미래의 안전한 먹거리를 생산하고, 자급자족을 하자는 취지로 이곳 두북 수련원에 내려와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농사를 짓는 이유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농촌이 그렇지만, 이 동네만 하더라도 제가 제일 젊습니다. 그래서 마을에서 무슨 일만 있으면 어르신들이 ‘저기에 젊은 스님한테 도와달라고 해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 나이가 칠십인데 제가 이 동네에서 제일 젊어요. (웃음)

지금 농촌이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미래에는 농촌을 어떻게 살릴 수 있는지 많은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식량 자급도는 20%가 안 됩니다. 올해 무역 적자가 난 가장 큰 이유도 에너지 가격과 식량 가격의 상승 때문입니다. 에너지는 자급도가 제로에 가깝습니다. 에너지와 식량 가격의 상승 때문에 다른 상품을 아무리 수출해봐야 적자 폭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안정적으로 식량이 공급이 되다 보니까 식량에 대한 위기의식을 거의 못 느끼고 있어요.

그러나 자급자족이 되는 식량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뭘까요? 쌀입니다. 그러나 쌀도 생산량이 많아서 자급자족이 되는 게 아니라 갈수록 여러분들이 쌀을 안 먹어서 소비량이 줄어서 가능한 일입니다. 쌀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전부 다 부족하고, 특히 수입하는 식량의 대부분이 가축 사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고기 소비를 줄여야 식량 위기 문제도 같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토회에서는 일단 채소 농사부터 시작했고, 올해 봄부터는 벼농사도 하고 있고, 가을부터는 보리와 밀도 조금씩 심어볼 예정입니다.

특히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다 보니 병충해도 많이 생기고, 일손도 많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동네 할머니들은 저희가 농사를 짓는 모습을 보고 ‘유기농으로 해서 농사가 되나?’ 하고 걱정을 많이 하십니다. 그런데 또 가끔 이렇게 몇십 명씩 와서 풀을 뽑으니까 깜짝 놀라십니다. 논을 보면 피가 반이고 벼가 반이었는데, 자원봉사자들이 백 명씩 와서 피를 뽑으니까 ‘유기농이 정말 가능할 수도 있겠네’ 이렇게 생각하시기도 하는 것 같아요. (웃음)

밭이 좀 깔끔해야 하는데, 보시면 알겠지만 아직은 잘 정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수행 도량은 정비가 잘 되어 있어야 하는데, 일손이 부족한 데다 이제 농사를 시작하는 단계이다 보니까 지금 자리를 잡고 있는 중입니다.

인생의 지침으로 삼아야 할 세 가지

지금 여러분은 정토불교대학과 경전대학에서 수행자가 되는 길에 대해 배우고 있죠? 수행자라면 세 가지를 명심해야 합니다.

첫째, 자기 마음을 항상 알아차려서 무슨 일을 하든 내가 행복해야 합니다. 키가 크든 작든, 직업이 뭐든, 결혼을 했든 안 했든, 이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에요. 괴롭지 않고 자기만족을 하고 사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둘째, 내가 남한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신세를 지는 사람보다는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셔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부모 신세를 지든, 옆에 있는 사람에게 신세를 지든, 내가 남을 도와주고 사는 게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고 살잖아요. 이런 상황을 빨리 벗어나서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셋째, 지속 가능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빚을 내서 사는 삶은 지속 가능한 삶이 아니잖아요. 조금씩 저축하고 살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금 지구 환경을 훼손하면서 후손들에게 빚을 지우며 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계속해서 우리의 문명이 지속될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우리가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경제적으로만 따지면 제가 여기 내려와서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은 큰 손해예요. 제가 시골에서 하루 종일 농사일을 해봐야 5만 원어치도 못 법니다. 그런데 어디 가서 강의를 해주면 한 시간에 몇 백만 원을 벌 수 있어요. 그러나 인간의 삶은 그런 화폐 가치로만 계산될 수 없습니다.

‘미래를 생각했을 때 인간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 것이 좋겠는가?’

이런 것들을 몸소 체험해보기 위해서 이렇게 농사를 짓고 있는 거예요.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기 위해 많은 고생을 해보면 ‘실제로 백 퍼센트 유기농을 하는 건 좀 어렵겠다’ 하는 걸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유기농은 노동력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에요. 소규모는 몰라도 대규모로 농사를 지으려면 유기농 방식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유기농과 저농약 사이에 어느 정도의 방법을 취해야 농사도 잘 되고 환경도 보전될 수 있는지 계속 실험을 해나갈 수밖에 없어요. 이런 것들을 체험해 가면서 지금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만물에는 제 자리가 있습니다

돌멩이 하나도 제 자리가 있습니다. 이 세상 만물에는 다 제 자리가 있어요. 고추밭에 깨가 심어져 있으면 그건 잡초입니다. 깨밭에 고추가 나도 잡초예요. 잡초라는 건 원래 없습니다. 제자리에 안 있으면 사람들이 잡초라고 부를 뿐입니다. 꼭 잡초가 나빠서 뽑는 게 아니라 여기는 지금 고추를 수확해야 할 곳인데 다른 게 들어 있어서 장애가 되기 때문에 제거할 뿐입니다. 만물에도 다 제 자리가 있다는 관점을 갖고 오늘 농사 체험을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고추도 빨갛게 익으면 따줘야 해요. 그대로 놔두면 썩어버립니다. 그리고 다른 고추가 달리는 데에 장애가 됩니다. 그래서 농사는 시기가 중요합니다. 적절할 때 심고, 적절할 때 따주어야 합니다. 고추를 따주는 게 작물을 해치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고추를 살리는 일이 됩니다. 그리고 적절한 시기도 중요하지만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도 중요해요.

그런 관점에서 농사는 마음공부하고 똑같습니다. 시간과 공간에 적절하게 내가 어떤 삶의 자세를 갖느냐가 중요합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정해진 건 없어요. 이런 관점을 갖고 공부 삼아 무엇이든지 해봅니다. 알았죠?”

“네.”

이어서 청년들은 농사팀의 안내를 받아 그룹별로 농사일을 시작했습니다. 고추 따기, 고추 말리기, 비닐하우스 주변에 수로 만들기, 채소(호박, 공심채, 오크라) 수확하기, 등 그룹별로 다양한 농사일이 주어졌습니다.






스님은 그룹별로 잠깐 결합하여 고추 따는 방법, 호박 줄기 걷어내는 방법 등 청년들이 일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자세히 안내를 해준 후 산밑밭으로 올라갔습니다.


산밑밭에는 요즘 매일 아침마다 수확해야 할 채소가 나오고 있습니다. 스님은 가위를 하나 들고 고랑을 옮겨 다니며 애호박, 가지, 오이, 고추를 차례대로 땄습니다.




“벌써 7시 30분이 되었네요. 외국인들 법회를 해야 하니까 이제 마무리하고 내려갑시다.”

오늘도 바구니에 채소를 가득 담아서 산을 내려왔습니다.

오전 8시부터는 외국인을 위한 영어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화상회의 방에는 영어로 불교대학 수업을 듣고 있는 외국인 24명이 스님과 직접 대화를 나누기 위해 접속했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60여 명의 외국인이 유튜브에 접속하여 스님의 즉문즉설을 함께 들었습니다.

며칠 전 중부지방에 내린 폭우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강남구 구룡마을에 스님이 수해 복구 활동을 하고 온 모습을 영상으로 본 후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세 명이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감정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하면서 스스로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며, 어떻게 수행을 해나가야 하는지 질문했습니다.

부정적 감정을 알아차리니 부끄러워요, 수행은 어떻게 하는 거죠?

“I am honored to meet you Sunim, it’s a pleasure. I am a little nervous because you are like a movie star to me. I am studying the practice of Buddhism so that I no longer struggle. But in a recent practice where we were identifying our emotions, I had an embarrassing thought. I was telling my husband that I was feeling unimportant. And I realized that I was getting a certain "energy" as I was repeating this story. And it’s almost as though retelling how unimportant I felt, felt good, felt cathartic. And it really made me wonder, “Do I enjoy struggling on some level?” because I don’t know why I got so much energy from telling this story. I got curious what Sunim would say about this reaction to a practice exercise where I identified a negative feeling.”
(스님을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스님은 저에게 영화배우 같은 분이셔서 지금 조금 떨립니다. 저는 더 이상 괴롭지 않으려고 불교 수행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스스로의 감정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하면서 조금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스스로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 감정을 느꼈던 얘기를 남편에게 해주고 있었는데요. 남편에게 그 일에 대해 얘기해주면서 좀 활력이 들었습니다. 제 자신이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를 해주면서도 기분이 좋았고, 카타르시스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내가 괴로움을 좀 즐기고 있나’ 하고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일상에서 수행 연습을 하면서 부정적인 감정을 인지한 점에 대해서 스님이 뭐라고 조언을 하실지 매우 궁금합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고, 또 얘기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했다고 해요. ‘나 자신을 안다’라고 할 때 ‘나 자신’이라는 게 뭘까요? 사람들은 ‘나’를 영혼이라고도 하고, 자아라고도 하고, 여러 가지 이름을 붙입니다. 그러나 붓다는 자아나 영혼이라고 할 만한 고정 불변한 실체는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라고 하는 것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웃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붓다의 가르침이 이해가 잘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어떤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은 화를 잘 낸다’, ‘저 사람은 욕심이 많다’, ‘저 사람은 고집이 세다’ 이렇게 그 사람을 이렇게 저렇게 규정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규정한 내용은 곧 그 사람일까요, 그 사람의 습성일까요? 그 사람의 습성입니다. 즉 ‘나 자신을 안다’라고 할 때 ‘나 자신’이란 특별한 어떤 것이 아니라 나의 습성을 말합니다. 습성은 하늘로부터 주어졌거나 전생으로부터 왔거나 태어날 때부터 본래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형성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래된 습성은 바꾸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워낙 바꾸기 어렵다 보니 ‘본래부터 타고난 성질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특히 어릴 때 형성된 습성일수록 변화가 어렵습니다. 습성을 바꾸기 어렵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내가 습성대로 살기 때문에 그 습성이 곧 ‘나의 특징’ 또는 ‘나’라고 인식된다는 뜻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도 나를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질문자가 말씀하신 내용도 본인의 습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물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도 하나의 습성이에요. 화를 잘 내는 것도, 자기 의견을 고집하는 것도, 욕심을 지나치게 내는 것도 습성이에요. 이 외에도 수십, 수백, 수천 가지의 다양한 습성이 있습니다. 가족 간에는 공통적인 습성이 많고, 또 다른 습성도 있어요. 동양 사람과 서양 사람은 같은 동양 사람들끼리에 비하면 조금 더 그 습성에 차이가 많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는 그 습성대로 살아갑니다.

이것을 인도 말로는 까르마(Karma)라고 부릅니다. 인도에서는 까르마라는 것은 정해진 것,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했어요.

그러나 붓다는 까르마란 형성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변화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나에게 손실을 가져오거나 고통을 가져오는 습성이라면 그 습성을 바꾸거나 버려야 합니다. 예를 들어 술을 먹는 습성 때문에 지나치게 건강을 해치거나, 취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면 이 습성을 고쳐야 합니다. 마약이나 담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외에도 우리는 여러 습성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습성이 강하면 중독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중독성이 강하지 않으면 그 습성대로 행하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반면에 어떤 습성에 강하게 중독된 사람은 그 습성대로 행하지 않으면 고통스럽고 힘들어해요.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에게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이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담배를 피우는 습성을 가진 사람에게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게 굉장히 힘든 일입니다. (웃음) 화를 내는 습성이 없는 사람은 화를 내지 않는 게 너무나 자연스러운데, 화를 내는 습성을 가진 사람에게는 화를 안 내는 게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이처럼 많은 해악을 가져오는 습성이라면 우리는 힘들더라도 그 습성을 멈춰야 합니다. 그러나 술을 한 잔 마시거나 담배를 한 대 피우는 데 중독이 되어 있지 않다면, 술이나 담배 자체를 두고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사람들이 필요하다면 같이 할 수 있고 평소에는 안 하는 정도라면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중독의 상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술이나 담배가 아니라 그것을 섭취하는 ‘습성’입니다. 습관화된 것은 우리에게 고통을 가져옵니다. 우리가 남 탓을 하거나 어떤 사람을 미워하는 것, 혹은 질문자처럼 사물을 늘 부정적으로 보는 것도 다 습성에 속합니다. 이런 습성을 갖고 있으면 나에게 괴로움이 많아집니다. 이런 습성을 바꾸면 훨씬 더 삶이 가볍고 밝아집니다. 이런 습성을 바꾸는 것이 바로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습성을 우리가 다 바꿀 수는 없습니다. 어릴 때 형성된 것, 특히 세 살 이전에 형성된 습성은 거의 바꾸기 어렵습니다. 그러한 습성 자체가 자아의 일부분이 돼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꾸기 어려운 습성을 너무 무리해서 바꾸려고 하면, 바꿔지지 않는다며 또 좌절하게 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자기의 습성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중에 손실이 큰 습성은 좀 힘들더라도 바꿔야 합니다. 그러나 정말 바꾸기 어려운 습성은 일단 인정하고, 수용하고, 손실을 감수하며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나의 습성 중 어떤 것은 인정을 하고 사람들에게 미안하다고 양해를 구하며 사는 방식이 있습니다. 어떤 습성은 노력과 시간이 들더라도 변화시켜서 손실을 막아내는 방식이 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우리에게 해악을 끼치는 습성을 바꾸는 것이지만, 잘 바꿔지지 않는 것 또한 우리의 현실입니다. 예를 들어 나에게 남편에게 화를 내거나 또는 남편을 부정적으로 보는 습성이 있다고 합시다. 이걸 바꾸려고 목표를 세우고, 그 습성이 일어날 때 늘 자기 알아차림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자꾸 놓치게 되고 결국은 습성대로 나아가기 쉽습니다. 그럴 때는 이게 바뀌지 않는다고 자학을 해서는 안 돼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내가 성질이 더러워서 또 화를 냈네요’ 이렇게 양해를 구하면 됩니다. 그러면서 지속적으로 꾸준히 변화를 위한 연습을 해나가는 거예요.

나의 어떤 잘못을 보고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얼핏 보면 좋은 자세 같지만, 수행적 관점에서는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잘못을 범하는 자신을 못마땅해 하고 부끄러워하는 이면에는 ‘나는 이런 잘못을 범하지 않는 사람이다’ 하는 전제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아의식이 너무 강한 거예요. 나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에요. 나는 잘못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니 부끄러워하지 말고 ‘죄송합니다. 아이고, 잘 안 되네요’ 이렇게 오히려 딱 드러내는 편이 낫습니다. (웃음) 그렇게 서로 소통한다면 우리는 잘 바뀌지 않는 습성을 갖고도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붓다는 6년의 극심한 고행을 통해서 죽음까지 불사하며 그 습성을 바꾸는 데 헌신했기 때문에 아주 근원적인 습성까지도 소멸시킬 수 있었습니다. 습성으로부터 자유로워졌기에 붓다는 ‘아, 내가 바로 자유인이구나. 내가 붓다다!’ 이렇게 자각하고 선언할 수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도 황야에서 40일간 금식 기도를 하면서 ‘아, 내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이런 굉장한 자각을 한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자각했기 때문에 첫째, 당당하고, 둘째, 옳고 그름과 잘잘못을 넘어서서 모든 사람을 다 포용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낼 수 있었던 겁니다. 우리는 이것을 ‘거듭난다’라고 표현합니다. 죽어서 새로 태어나듯이 거듭난다라고 표현해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까지는 못 하잖아요. (웃음) 여러분은 죽음도 불사하며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맛있는 것도 하나 못 버리지 않습니까? 옷 하나도 아무렇게나 못 입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나무 밑에서 잠잘 수 없잖아요. 이런 집착을 움켜쥐고 있는데 어떻게 내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겠어요? 우리는 붓다같이 될 수 없는 게 아닙니다. 붓다같이 되려고 할 때 감수해야 하는 것을 우리가 지금 안 하려고 하기 때문에 붓다같이 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여러분께 ‘어느 정도 습성을 인정하고 손실을 감수하세요. 그러면 훨씬 더 스트레스를 덜 받습니다’ 이렇게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더 질문 있으면 하세요.”

“No, that was very helpful. I took a lot of notes and the one thing that I’m struck by for myself is that I have a habit of seeing myself as unimportant. I perpetuate that habit. I think at this point one of the best things I can do for myself is to recognize it and to recognize that I don’t have to continue that belief. It will take work but that was very very big for me and I thank you so much Sunim.”
(아니요,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필기를 많이 했는데 저에게 와닿은 한 가지는 제가 제 자신을 대수롭지 않게 보는 습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습관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제가 제 자신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일 중 하나는 그 습관을 알아차리고 그런 믿음을 지속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계속 노력해야 하겠지만 저에게 아주 큰 깨달음이었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스님)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수행에 대해 비판할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요? 얼마 전 여자 친구가 저보고 ‘네가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어지니까 불편하다’고 했습니다.
  • 왜 세계의 종교 지도자들은 모두 남자인 걸까요? 역사 속에서 깨달은 여성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지 의문이 듭니다.

대화를 마치고 나니 벌써 9시 30분이 훌쩍 넘었습니다. 다음 시간을 기약하며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방송실은 나온 스님은 곧바로 학교 운동장 구석에 위치한 팽나무 아래로 향했습니다. 오전에 농사일을 마친 청년들 100여 명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습니다. 낮 기온이 35도가 될 정도로 무더운 날씨였지만, 청년들은 스님과의 대화 시간을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청년들은 자신의 인생 고민에 대해 자유롭게 손을 들고 질문했습니다. 한 시간 정도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이성에게 좋아하는 마음을 고백하고, 상대가 그 마음을 받아주면 그때부터 마음이 식어버린다며 어떻게 하면 좋을지 질문했습니다.

상대가 고백을 받아주면 그때부터 마음이 식습니다, 왜 그렇죠?

“저는 좋아하는 상대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사랑을 구애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상대가 저의 구애를 받고 마음의 문을 열면, 저는 그때부터 마음이 식고 귀찮아집니다. 이런 경험이 한 번이 아니고 두 번, 세 번 반복되다 보니까 저한테 문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제 스스로 아무리 원인을 찾아봐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의 좋은 점은 도전 의식이 있다는 겁니다. 질문자와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은 어떤 일을 할 때 개척 분야에 아주 뛰어난 재능을 보입니다. 도전 의식이 있어서 개척을 하지만, 막상 개척을 하고 나면 식상해져요. 성취가 되면 재미가 없어지고, 그 일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지는 겁니다.

만약 그런 성향을 가진 사람이 회사에 들어오면, 인력을 배치할 때 개척하는 분야에 투여하는 게 좋습니다. 그 일이 어느 정도 개척이 되면 그 사람을 빼서 다른 개척 분야에 넣고, 유지 관리는 다른 사람한테 맡겨야 합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개척하는 일을 굉장히 힘들어하고 어려워합니다. 대신에 어느 정도 틀을 만들어놓고 유지 관리를 하라고 하면 아주 잘합니다. 이렇게 사람마다 성향이 다 달라요.

일은 그렇게 자기 특성에 맞게끔 하면 되는데, 인간관계도 그렇게 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겁니다. 누군가를 좋아해서 상대가 나를 안 좋아하는데도 적극적으로 도전하고 구애를 해서 상대가 나를 좋아하기 시작하면 재미가 없어져 버리고, 그래서 곧바로 다른 이성에게 가서 또 도전하고, 이러면 상대방이 힘들어져요.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은 일을 하는 데는 크게 문제가 안 되는데, 인간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데는 문제가 생깁니다.

물론 이런 경우에도 나름대로 살아갈 수 있는 방식이 있습니다. 한 사람하고 결혼해서 살겠다는 생각을 버리면 돼요. 연애도 한 사람하고 오랫동안 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저 한 6개월 정도만 연애를 하는 겁니다. 3개월은 구애를 하러 다니고, 연애가 성립되면 한두 달 유지하다가 그만두고, 또 다른 사람을 찾아가서 구애를 하는 거예요. (웃음)

결혼해서 이혼하는 것을 반복하는 정도가 아니라면 현재의 윤리관으로는 이런 삶의 방식을 꼭 나쁘다고 할 수는 없어요. 그렇게 내 성질과 기질에 맞게끔 인간관계를 맺고 살면 됩니다. 내가 사는 삶의 방식을 그렇게 설정해 버리면 돼요. 그러면 그런 성향을 안 고쳐도 됩니다.

그러나 한 사람과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살면서 그런 습성을 가지고 있으면 부인이 골치 아픕니다. 바람을 피워도 한 여자 하고만 피는 게 아니라 또 바꾸고 또 바꾸고 하니까 상대를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물론 이럴 때 부인도 다른 여자를 만나는 남편과 이혼을 해버리면 되는데, 그것 빼고는 다 괜찮으니까 이혼을 못합니다. 그런 경우에도 부인이 남편을 수용하면 됩니다. ‘이 사람은 바람을 피울 뿐이지 한 사람한테 정착할 사람은 아니다’ 이렇게 받아들이고 그냥 내버려 두는 거죠. 바람피우는 것 말고 다른 점은 다 좋다면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거예요. 물론 다른 것도 좋은 게 없으면 당연히 관계를 끊겠죠.

항상 우리는 나의 습성이든, 남의 습성이든, 습성이 어떠한지 딱 파악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가 자기를 아는 겁니다. 그래서 그 습성이 끼치는 손실이 크면 개선을 하고, 개선하기가 너무 어렵다면 손실을 감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자기 인생 설계를 하면 돼요.”

“그런데 저는 메뚜기처럼 뛰어다니는 것보다 한 군데 정착해서 연애를 해보고 싶어요. 그럼 무엇을 고쳐야 할까요?”

“그렇다면 앞으로는 만약 한 사람을 사귀었다면 최소 3년은 만나는 겁니다. ‘선녀가 내려와도 안 쳐다본다’ 이런 관점을 가지시면 돼요.” (모두 웃음)

“잘 알겠습니다.”

유쾌한 웃음이 오고 가는 즉문즉설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여러 명의 질문을 받은 후 답변을 하고 대화를 마쳤습니다.

“대화를 더 나누고 싶은데, 저는 곧바로 발심행자 수계식을 하러 가야 해요. 다음에 또 봅시다.”

스님은 다시 방송실로 향했습니다. 오후 2시부터는 제3차 발생행자 수계식(전법회원 가입식)을 시작했습니다. 전법활동가 신청자 교육을 수료한 284명의 활동가들이 오늘 스님으로부터 수계를 받게 되었습니다.

발심행자(전법회원) 수계식

수계 대중들은 정토사회문화회관, 대전법당, 미륵사, 아도모례원, 해운대법당, 죽림정사를 비롯해 전국 으뜸절마다 20명 내지 30명씩 모여서 지회법사와 함께 수계식에 참석했습니다. 해외에 있는 분들은 온라인으로 참석했습니다.

타종과 예불을 한 후 수계 대중은 스님에게 법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전법행자란 어떤 사람인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전법행자는 수행자입니다. 수행자인 동시에 법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전통 불교 용어로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상구보리(上求菩提)는 위로는 깨달음을 구한다는 뜻인데, 이 말은 수행정진해서 괴로움이 없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화중생(下化衆生)은 아래로는 고통받는 일체중생을 구원한다는 뜻인데, 이 말은 부처님의 법을 이 세상에 널리 전해서 사람들의 괴로움이 사라지도록 돕는 일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정토회에서는 수행정진과 전법, 두 가지를 다 하는 사람을 전법행자라고 부릅니다. 소정의 교육 과정을 거쳐서 오늘 이렇게 284명이나 수계를 받게 된 것은 큰 자랑입니다. 또 여러분들은 앞으로 부처님의 법을 널리 전하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어서 재가 수행자를 위한 수계가 생기게 된 연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후 수계 의식을 진행했습니다.

참회, 연비, 오계 수계 약속, 헌화, 수계자의 서원이 있은 후 마지막으로 스님이 수계 대중을 위해 축원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오늘 정토회에서는 지난 2년간 불교대학과 경전대학을 졸업하고 전법행자 교육을 이수하여 전법행자가 된 사람들에게 삼귀의 오계를 수여하였습니다. 전법행자들은 앞으로 괴로움이 없고 자유로운 사람이 될 때까지 그 길을 향해 오롯이 정진해 나가겠다고 다짐을 하였습니다. 부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세상 일이 내 뜻대로 안 될 때 남을 탓하거나 원망했습니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사회에서나 내가 노력한 만큼 세상일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항상 억울한 마음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남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화내고 짜증내고 슬퍼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법을 만나 돌이켜보니 이것이 남이 나에게 준 것이 아니라 나의 어리석음이 나에게 화를 자초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 욕망대로 다 하려는 것, 내 성질대로 다 하려는 것, 내가 옳다고 생각한 것, 이런 것들이 결국 탐진치 삼독에 물들어 결국 내가 나의 괴로움을 만들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고 여겨지는 것이 다 나의 습성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습성은 형성된 것이니 그로 인한 피해가 크다면 마땅히 고치고 개선해야 합니다. 고치고 개선하기 어렵다면 나의 습성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손실을 감수해 나가야 합니다. 이런 이치를 알고 보니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이렇게 부지런히 수행 정진해 나간다면 우리도 부처님처럼 괴로움 없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처럼 이렇게 원을 세우고 다짐하지만, 또 한 생각에 사로잡히면 오늘의 발원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내가 옳으니 네가 그르니 시비 분별하고 세상을 한탄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관세음보살님과 지장보살님은 본래의 서원 잊지 마시고, 저희들을 어여삐 여기시어 저희들을 깨우쳐 주시고 또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희가 이와 같이 큰마음 내어 부처의 길을 가겠다고 발원한 공덕으로 과거 생에 지은 모든 업장이 소멸되고 세세생생 보살도를 행하게 하여 주십시오. 몸과 마음이 건강하여 나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도움이 되는 보살의 삶을 살겠습니다.

모든 중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길

오늘 나는 이렇게 부처님의 법을 만나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향해 나아가지만, 이 세상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나처럼 바른 법을 만나지 못해 괴로워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이 바른 법을 전해서 그들 또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안내하겠습니다.

오늘 저희가 발원하고 수계한 이 공덕을 고통받는 일체중생들에게 회향하오니 배고픈 사람에게는 양식이 되고, 병든 사람에게는 양약이 되며, 배우지 못한 아이들에게는 배움의 터가 되는 등 고통받는 모든 중생들이 그 고통에서 벗어나길 간절히 발원합니다.

또한 세계는 지금 기후 위기, 전쟁 위험, 코로나 팬데믹으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이런 혼란기에 한반도에는 점점 전쟁의 위기가 감돌고 있으며, 북한 동포들은 식량 부족으로 큰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부디 하루빨리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와서 북한 동포들에게 생존권이 보장되도록 제불보살님들께서는 저희들의 이 발원을 옹호하여 주옵소서.”

스님의 간절한 발원 기도에 수계 대중 모두가 숙연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이 수계 대중들에게 불명과 수계증을 수여했습니다.

“자, 그럼 제가 ‘수계증을 드립니다’ 하면, 여러분은 ‘잘 받았습니다’ 이렇게 얘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수계증을 드립니다.”

“잘 받았습니다.”

불명과 수계증을 수여한 후 스님은 불명을 받는 의미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오늘 불명을 받았으니 이제 여러분은 그냥 보통 사람이 아니고, 수행자로 새로 태어난 것입니다. 성명은 육신이 태어날 때 육신의 부모인 어머니와 아버지가 지어준 것이라면, 불명은 수행자로 새로 태어날 때 스승이 ‘너는 미래에 부처가 되리라’ 하고 지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명은 육신의 이름이라면, 불명은 수행자의 이름입니다. 수행자의 이름인 불명을 소중하게 여기시고 꾸준한 정진을 해나가시기 바랍니다.”

불명과 수계증을 받고 나서 사홍서원을 한 후 발심행자 수계식을 모두 마쳤습니다. 수계 대중은 지부별로 모여서 마음나누기를 이어나갔고, 스님은 방송실을 나왔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8시 30분부터는 일요 명상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코로나 이후 123번째 진행되는 온라인 명상 시간입니다.

지난주에 영어로 올라온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한 후 곧바로 명상을 시작했습니다.

탁, 탁, 탁!

죽비 소리와 함께 명상을 마친 후 실시간 채팅창에 올라온 소감을 스님이 하나씩 직접 읽어주었습니다. 고요하게 명상을 하며 일주일을 마무리했습니다.

내일은 아침에 농사일을 한 후 오전에는 전법활동가 포살법회를 하고, 오후에는 오늘 수계받은 전법행자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통일의병대회를 가질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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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근

감사합니다

2022-08-22 05:47:35

정종석

기후기의 심각성이 느껴집니다.적게 소비하고 불가피한 소비는 효율을 높이는 길이 절실한 때 입니다.식량과 에너지의 자급자족도 시급하구요.
채식을 중심으로 하면 식량문제는 해결 가능성이 보인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에너지는 재생에너지와 효율성을 높이는 길이 있지만 ~ !!!

2022-08-21 11:28:03

보리수

무엇보다 자기 자신 잘 알기!
수행자는 일단 내가 행복할 것, 조금이라도 남에게 도움이 될 것, 지속가능한 삶 살 것.
고맙습니다

2022-08-21 09: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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