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월간정토
조용한 가운데 야단법석인 바라지장

이현숙 님은 <월간정토> 편집 봉사자이기도 합니다. 평소 아는 분이라 그런지 바라지장 소감문을 소개하면서 감정이입이 더 잘 되는 것 같네요. 특히나 서울에서 바라지장을 향하는 여정이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고속버스를 타고, 문경 가은터미널에 도착해서 농촌의 한적한 길을 유유히 걸어서 정토수련원까지 가는 모습을 떠올리니 글의 배경인 한여름의 바람과 햇살까지 실감나게 다가오네요. 이 글을 읽고 나면, 여러분도 저처럼 바라지장 신청을 기웃거릴지도 모릅니다. ^^

화들짝 놀란 재난 문자

5월의 마지막 날 이른 아침, 무음 상태 휴대전화에 느닷없는 재난 문자가 요란스레 울렸습니다. 서울 전역에 경계경보가 발령되었으니 대피 준비를 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대피 준비를 어떻게 하지?’ 고민하는 찰나 연달아 사이렌이 울렸습니다. 그 순간 위기 상황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정토수련원에 가기 위해 챙겨놓은 배낭 속 물건들을 살펴보며 가야 하나 망설이던 차 ‘북한 미사일 발사에 대한 오발령’이라는 짧은 문자 한 통이 날아들었습니다. ‘휴우~!’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습니다.

늦지 않게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해 문경 가은행 버스를 탈 수 있었습니다. 버스 안에는 수행을 위해 정토수련원에 가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습니다. 곧 버스가 출발하고 창밖으로 청명한 초여름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중부고속도로를 내달려 도착한 가은터미널은 자그마한 읍 소재지에 있었습니다. 정토수련원에 가는 분들은 버스에서 내리면서 서로를 알아보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택시로 이동했습니다. 저는 이번 ‘바라지장’을 신청하면서 한 가지 마음먹은 게 있었는데, 터미널에서 수련원까지 약 8킬로미터 거리를 걸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정토수련원에서(이현숙 님)
▲ 정토수련원에서(이현숙 님)

한가롭고 평화로운 농촌 풍경 따라

걷다가 그늘을 만나면 요기할 요량으로, 아침에 챙겨 넣은 떡 몇 개와 나머지 짐들을 모두 배낭에 넣어 메고는, 대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습니다. 한낮의 햇살은 한여름을 방불케 했지만, 습기가 없어 쾌적했습니다.

지도가 없어도 헤맬 일이 없을 만큼 길이 어엿했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무념무상으로 걷는 신작로가 더할 나위 없이 좋았습니다. 산과 들, 논과 밭이 사이좋게 어우러져 있는 평화로운 농촌 모습이 마음을 편안하게 했습니다. 바지런한 농부들이 모내기해놓은 논들은 정갈했고, 하얀 두루미 한 쌍이 정답게 노닐고 있었습니다.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고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 풍경이었습니다.

두 시간여 상괴리, 하괴리 마을을 지나고 휘돌아 오르는 길이 나타났습니다. 길모퉁이에 ‘정토수련원 가는 길’이라는 팻말이 보였습니다. 와락 반가운 마음이 일었지만, 얼마나 남았는지 거리 표시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모든 건 마음 먹기 나름이라는 의미에서 부러 표시해두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얼마 안 남았다는 의미라 생각하며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길을 재촉했습니다.

햇살이 정수리를 넘고 있을 때쯤 길은 서서히 오르막으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가쁜 숨을 내쉬며 또 한 구간을 휘돌아 오르자, 야광봉을 들고 주차 안내를 하던 봉사자가 “아이고!” 하며 반가운 인사를 건넸습니다.

정토수련원 가는 길
▲ 정토수련원 가는 길

잠시 멈추고 싶을 때 찾아가는 든든한 수행도량

제가 ‘바라지장’에 처음 참가한 것은 지난해 7월이었습니다. 5월에 ‘깨달음의 장’에 다녀오면서 기억에서 사라지기 전에 감사한 마음을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에서였습니다.

바라지장은 수행과 보시, 봉사를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수련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비교적 자유로웠던 일상에서 벗어나, 주어진 일정에 따라 소임에 집중하고, 매 순간 깨어 있음으로써 나를 돌아보고 알아차리는 일이었습니다. 낯선 장소에서 면면이 초면인 사람들과 매 순간 배려하며 각자의 소임을 다 해내려면, 지금 여기에 깨어 있어야 했습니다. 집중하지 않으면 자칫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 업식을 돌아보게 되고, 어떤 순간에 ‘나’를 내세우는지도 알아차리게 됐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신청했는데 뜻밖에도 수행이 되는 체험을 한 후, 바라지장은 번다한 도심 생활에서 잠시 멈추고 싶을 때마다 찾아가는 든든한 수행도량이 됐습니다.

바라지 도반들과(아랫줄 맨 왼쪽이 이현숙님)
▲ 바라지 도반들과(아랫줄 맨 왼쪽이 이현숙님)

이번 바라지장에 참가한 도반은 총 9명이었는데, 모두 초면인 데다 연령대도 3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했습니다. 음식 준비에 필요한 그릇들이며 각종 집기, 주방 도구, 재료들의 위치를 확인하고 각자 소임을 배정받았습니다.

바라지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그날의 음식을 제시간에 맞춰 준비해 내는 것이었습니다. 요리의 종류마다 재료 손질과 조리 시간이 다르니, 알맞게 시간을 안배하고 너무 이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게 준비해 내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재료 하나하나 정성껏 다듬어서 되도록 버려지는 부분이 없도록 손질하고, 남지 않을 만큼 적당한 양의 음식을 내는 데에 신경 썼습니다. 이렇게 바라지들이 서로의 손발을 맞춰가며 각자 주어진 소임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덧 긴 하루해가 산을 넘어가곤 했습니다.

인연 따라 쓰이는 체험, 바라지장

여명이 트기 전 새벽예불을 마치고, 공동체 대중들과 함께 발우공양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적당한 양의 음식을 먹으라는 의미에서 발우공양은 그 의식 자체가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평소 식탐하는 생활에 익숙한 터라 의식이 낯설고 긴장이 됐지만, 그간의 무분별한 섭생을 자각하게 했습니다. 남기지 않을 만큼 적당한 양의 음식을 덜어서, 되도록 소리 내지 않고 남김없이 먹는다는 것이 불편하면서도 한편으로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난생처음 의식에 따라 발우에 밥과 국을 담고 반찬을 덜었습니다. 대중은 ‘소심경’을 외며 발우공양을 시작했습니다. “불생가비라 성도마갈다 설법바라나 입멸구시라….”

이른 아침의 너글너글한 바람과 구름, 천연덕스러운 햇살과 태연자약한 나무들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시절 인연으로 만나 함께한 도반들에게 감사한 마음입니다.

하루 일정이 끝난 후 도반들과(왼쪽에서 여섯 번째가 이현숙 님)
▲ 하루 일정이 끝난 후 도반들과(왼쪽에서 여섯 번째가 이현숙 님)

바라지장을 담당하며 꿋꿋하게 일과 수행의 통일된 삶을 살아가는 송지연 님, 해맑은 미소와 발랄한 에너지가 싱그러운 이수진 님, 세상 근심 걱정 다 내려놓은 듯 푸근한 인상의 김미영 님,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듯 원숙미 넘치는 이미진 님, 정년퇴직했다는 말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은 중년의 한선자 님, 오랜 세월 은근히 쌓아온 내공이 빛을 발하는 무림의 고수 정태희 님, 웃으면 안경 너머의 눈이 반으로 접혀서 보는 이마저 미소 짓게 하는 원유나 님, 마음이 한없이 여리디여리면서도 내면이 단단한 강효미 님, 인형처럼 눈이 얼굴의 반을 차지하고 발랄 명랑한 주현민 님. 한 분 한 분이 모두 우주였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소중한 인연에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도반님들과 함께 백화암 툇마루에서 바라보던 희양산의 모습이 선합니다.

바라지장을 마치며(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이현숙 님)
▲ 바라지장을 마치며(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이현숙 님)


이 글은 <월간정토> 2023년 8월호에 수록된 이현숙 님의 바라지장 소감문입니다.

글_이현숙(서울제주지부)
편집_월간정토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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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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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진

이현숙님, 반가워요^^ 함께 바라지공양 봉사했던 때가 어제처럼 생생합니다. 이렇게 글을 담백하게 써주시다니 감사한 마음 산뜻한 마음 올라옵니다. 정토회 행자인 이상 언젠가 또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네요

2024-05-09 12:23:29

평화

소풍 길 따라가듯 읽었습니다. 올 해 소망으로 간직하고 있는 바라지장 풍경을 설렘으로 그려봅니다.
감사합니다.

2024-04-17 15:13:57

자재왕

글을 읽는 동안, 나도 들판과 언덕을 지나 문경수련원으로 가는 듯 했습니다.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2024-04-05 19:4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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