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2.2.9. 천도재, 수행법회
“아들이 죽었습니다. 하루하루가 악몽 같아요.”

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은 마을 어르신이 찾아와 두북 수련원 법당에서 천도재를 봉행했습니다. 매년 두북 어르신 마을잔치 때마다 예쁜 한복을 입고 와서 멋진 춤사위와 노래를 불러주곤 했던 어르신의 남편 분이 얼마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남편 분도 노인잔치에 참석하셨던 분입니다.

가슴이 먹먹해진 어르신은 넋을 잃고 스님을 찾아와 슬픈 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스님은 남편 분이 돌아가신 후 49일째 되는 날에 천도재를 지내주겠다고 약속을 했었습니다. 그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어르신이 삼배로 법문을 청하자 스님이 법상에 올라 천도의 의미에 대해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천도의 의미

“진정한 천도(薦度)란 영가를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한평생 남에게 손해 끼치지 않고 도움이 되는 일을 해서 복을 많이 지어 놓은 사람은 자기가 지은 복으로 저절로 천도가 됩니다. 그래서 굳이 재를 지낼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살다 보면 좋은 일만 하고 살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결혼해서 자식 낳고 살다 보면 나와 내 가족에게 이익되는 일은 뭐든지 하게 됩니다. 남에게 손해가 가는지 어려움이 있는지를 돌아보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남을 괴롭히고 남에게 손해 끼치는 죄를 짓게 됩니다. 그 과보로 고통받는 영가를 괴로움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을 천도한다고 말합니다.

천도에 필요한 세 가지

천도를 하려면 첫째, 많이 베풀어야 합니다. 그동안 남에게 끼친 손해를 갚아야 하기 때문이에요. ‘천도재’(薦度齋)에서 재(齋)자는 제사(祭祀)를 지낸다는 제(祭)자가 아니라 베풀 재(齋)자를 씁니다. ‘베풀어서 천도를 한다’ 이런 뜻이에요. 돌아가신 분께 혹시 죄업이나 빚이 있다면 살아있는 우리가 대신 그 빚을 갚는 겁니다. 그래서 재비(齋費)를 내고 배고픈 사람을 구제하는 거예요. 그런데 누구한테 빚을 졌는지 모르잖아요. 제일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면 빚을 갚는 거예요. 배고픈 자에게는 밥을 베풀고 병든 자에게는 약을 베풀고 학교 못 가는 아이들에게는 학교를 다닐 경비를 베풀면 그게 곧 재(齋)입니다. 그래서 정토회에서는 재(齋) 음식을 간단하게 차리고 나머지 돈은 다 인도의 가난한 동네에 베푸는데 씁니다. 그래야 백만 원을 내도 천만 원의 복이 되고 천만 원을 내도 일억 원의 복이 됩니다.

둘째, 본인이 사과를 해야 합니다. 피해를 준 사람에게 돈만 준다고 해서 다 해결되지는 않잖아요. 아무리 돈을 줘도 ‘돈 주면 됐지!’ 이런 태도라면 상대는 감정이 상해요. 그래서 영가 본인이 깨우쳐야 합니다. 남에게 손해를 끼쳤다는 사실을 스스로 자각하고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사과를 해야 해요. 천도 법문을 하는 이유는 영가가 스스로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예요.

셋째, 기도를 해야 합니다. 법문을 듣고 그 자리에서 딱 깨우치면 좋지만 ‘내가 뭘 잘못했는데?’ 이렇게 버티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힘 있는 사람이 깨우칠 때까지 살펴줘야 하잖아요. 그래서 지옥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인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를 하는 겁니다.

옛날부터 재(齋)는 ‘베푸는 행위, 깨우치는 법문, 간절한 기도’ 이렇게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미 베풀었으니 제가 영가를 위해서 천도 법문을 하고, 법문이 끝나면 간절하게 기도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법문을 듣고 난 어르신의 얼굴이 한층 밝아져 있었습니다.

법문을 마치고 묘당 법사님의 집전으로 천도재 의식을 지냈습니다. 정성껏 재를 지낸 후 어르신을 집까지 배웅해 드렸습니다.

오후에는 정토불교대학 개강을 앞두고 준비 회의를 했습니다. 화상회의 방에 실무준비팀이 모두 입장하자 각 팀별로 준비해 온 내용을 발표하고 스님의 조언을 들었습니다. 생방송할 때 수업 참여 방법, 해외 참가자 졸업요건, 사회사상 강의 교재, 인간붓다 교재, 실천적불교사상 교재 등 여러 가지 안건에 대해 점검한 후 회의를 마쳤습니다.

해가 지고 저녁 7시 30분부터는 수행법회를 시작했습니다. 정토회 회원들이 모두 생방송에 접속하자 스님이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입춘을 지나고 추위가 좀 심했습니다. 제가 지난번에 소한과 대한이 지나면 얼어 죽을 사람이 없다고 말했었는데, 소한과 대한에 못지않은 추위였습니다. (웃음) 이곳 두북 수련원은 오늘 낮부터 날이 조금 풀렸어요. 앞으로는 따뜻한 날이 지속될 것 같습니다.”

지난 한 달 동안은 기획 법회를 하면서 사회에 대한 교양을 쌓는 기회를 가져 보았습니다. 앞으로 한 달 동안은 마음공부를 하는 즉문즉설 시간을 갖기로 했습니다. 인사말이 끝나고 곧바로 질문을 받았습니다.

네 명이 사전에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얼마 전에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다며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억누르며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아들을 잃고 나서 하루하루가 악몽 같아요, 어떡하죠?

“저는 작년에 사랑하는 열일곱 살 외아들을 잃었습니다. 그 후 하루하루가 악몽 같고, 그 어느 것에도 집중할 수 없습니다. 명상할 때 호흡을 관찰하려고 해도 내 아이가 죽었는데 숨을 쉰다는 것이 괴롭습니다.

이전에는 세속적인 성취가 전부라고 생각했지만, 최근에는 제가 모르는 진리를 깨닫고 싶어서 불교대학에 입학하여 수업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혼란과 괴로움이 찾아왔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아’라면 나라는 것도 없고 영혼도 없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저는 살아서도 제 아이의 영혼을 느끼지 못하고 죽어서도 만날 수 없는 것인지요? 부모 자식의 인연이 지극해서 저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그 아이의 엄마인데, 모든 것이 공하다고 하니 너무 막막한 기분이 듭니다.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질문자는 말하는 내내 흐느껴 울었습니다. 스님이 조심스럽게 되물었습니다.

“제가 물어볼 테니 편안하게 대답해 보세요. 제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하고 인도로 떠났다고 합시다.

‘요즘 제가 한국에서 말만 많이 하느라 공부가 부족했으니 인도 북쪽 설산에 가서 수행을 좀 하고 오겠습니다.’

그런데 인도에 가다가 도중에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혼자 가다가 죽어서 아무도 제가 죽었는지 몰라요. 인도에는 길거리에서 죽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누군가가 시신을 수습해서 그냥 화장해버렸어요. 그런데 한국에 있는 여러분은 여전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스님이 인도에 가신 지 1년이 되었는데 공부를 잘하고 계시나?’
‘스님이 인도에 가신 지 2년이 되었는데 공부를 잘하고 계시나?’
‘아! 3년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소식이 없으시네!’
‘벌써 10년이나 되었는데 이제 오실 때도 되지 않았나?’
이럴 때 한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법륜 스님은 살아있어요, 죽었어요?”

“살아계신 겁니다.”

“다시 질문해 볼게요. 제가 인도에 볼일이 있어서 갔는데 한국에서 자꾸 오라고 합니다. 저는 한국에 가고 싶지 않아서 ‘법륜 스님이 인도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하고 지역 신문에 내고, 시신을 구해 화장한 후 그 유골함을 한국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인도의 어느 시골에 가서 혼자 살고 있습니다. 그럼 한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법륜 스님은 살아있어요, 죽었어요?”

“법륜 스님이 입적하셨다고 슬퍼할 겁니다.”

“그럴 때 한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법륜 스님이 살아있다’, ‘법륜 스님이 죽었다’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다 자기 생각이죠.”

“전자는 죽었는데 살아있다고 믿고 있고, 후자는 살아있는데도 죽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 나에게 있어 법륜 스님이 죽고 살고는 실제로 죽고 사는 것인가요? 아니면 죽었다 살았다는 정보가 머리에 들어온 것인가요?”

“정보가 들어온 겁니다.”

“그러니 실제로 법륜 스님이 살고 죽고가 무슨 의미가 있어요? 나에게 살아있는 것이라면 산 것이고, 나에게 죽어있는 것이라면 죽은 것이잖아요. 마찬가지로 실제로 영혼이 있다 없다 하는 질문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아들이 죽었는데 질문자가 영혼을 만나겠다고 말한다는 것은 아들이 죽은 게 아쉬우니까 그걸 붙들고 있는 겁니다.”

“아들이 항상 옆에 있었는데 지금은 볼 수가 없으니 영혼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영혼이 있고 없고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집착이에요. 다 내 마음에 있는 겁니다. 내 생각에서 지워지면 없는 것이고, 내 생각에 남아 있으면 있는 거예요. 본래 있고 없고가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신이 있다고 믿습니다. 무신론자는 신이 어디에 있냐고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신이 없다고 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인간을 창조하신 주님을 부정하느냐? 주님을 부정하면 지옥에 간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있다 없다는 것이 본래 없습니다. 있다고 생각하면 있고, 없다고 생각하면 없는 거예요. 이건 믿음의 문제이지 객관의 문제가 아닙니다. 영혼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그 사람의 세계에서는 있는 것이고, 영혼이 없다고 믿는 사람은 그 사람의 세계에서는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영혼이 있다 없다는 것에 대해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영혼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영혼이 있다고 말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라고만 말씀하셨어요. 그것은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마음에 잡고 있으면 나에게 고통이 되고 놔 버리면 아무런 고통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어떻게 아들인데 놔 버릴 수 있는가?’라는 생각에 꽉 잡혀 있는 겁니다. 붙들고 있고 싶으면 계속 붙들고 있으세요. 그건 자유이니까요. 문제는 질문자가 괴롭다는 거예요. 괴로워한다고 아들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아들이 어디 좋은 데 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만약에 인도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윤회한다고 해봐요. 아들이 다시 태어나려면 내가 아들을 붙들고 있어야 할까요, 놔줘야 할까요?”

“저하고는 상관없는 문제 같습니다.”

“만약 아들의 영혼이 있어서 윤회한다고 믿는다면 아들을 잡고 있어야 좋을까요, 놔줘야 좋을까요? 아들을 잡고 있으면 무주고혼이 되고 놔주면 환생할 수 있다는 겁니다. 윤회라는 게 있다고 믿는다면 놔줘야 환생을 할 거 아니에요? 아들이 천당이나 극락에 가기를 바란다면 놔줘야 갈 거 아니에요? 잡고 있으면 무주고혼 밖에 더 돼요? 윤회를 안 한다고 생각하면 잡을 것도 없고, 윤회가 있다고 생각하면 놔줘야 합니다. 있다거나 없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있든지 없든지 놔줘야 아이한테도 좋고 나한테도 좋습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나도 괴롭히고 아이도 괴롭히는 거예요. 어리석은 겁니다.

괴로움은 ‘윤회하느냐 마느냐,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훨씬 더 근원적인 문제예요. 정신 차려야 합니다. 아들에게 영혼이 있고 윤회한다고 믿으면, 지금 아들을 놔줘야 다시 태어나서 만날 거 아니에요? 잡고 있으면 무주고혼이 되어 오도 가도 못합니다. 극락에 보내고 싶다면 놔줘야 갈 거 아니에요? 잡고 있는데 어떻게 갑니까? 질문자가 아이를 사랑한다지만 어리석어서 도리어 아이를 괴롭히는 것과 같은 겁니다. 죽은 아들을 붙들고 이렇게 울고 있는 것과 같아요.

‘사랑하는 아이를 어떻게 땅에 묻을 수 있나? 사랑하는 아이를 어떻게 불태울 수 있나?’

그래서 시신을 방에 놔두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죽었으면 시신을 땅에 묻든지 불에 태우든지 해야 하잖아요. 윤회를 한다고 해도 놔줘야 돌아오고 극락에 간다고 해도 놔줘야 갑니다. ‘죽었다, 살았다, 신이 있다, 없다’라는 생각도 다 마음이 짓는 겁니다. 영혼이 진짜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질문은 어리석은 거예요.

‘아! 그동안 내가 아들을 붙잡고 있었구나! 잘 가라!’

이렇게 탁 내려놔야 합니다. 엄마가 아들을 괴롭혀서 되겠습니까? 아들만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나도 괴롭히고 있어요. 살아서도 괴롭히고 죽어서도 괴롭히는 것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이것은 윤회와 아무 관계가 없어요. 설령 윤회를 하더라도 놔줘야 합니다. 아들을 놔줄 거예요, 아니면 계속 잡고 있을 거예요?”

“저는 다 놓아주고 엄마가 미안하고 사랑한다, 좋은 데 가라고 해주고 싶습니다.”

“만약 윤회를 한다면 아들은 이미 내 자식이 아닙니다. 결혼하고 살 때는 내 남편이지만 이혼하면 내 남편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지금 잠시 나와 인연이 맺어졌으니 내 자식이지 영원히 내 자식이 아니에요. 윤회한다고 생각하면, 아들이 다음 생에 남편이 될 수도 있고, 질문자가 아들의 딸이 될 수도 있어요. 이 집에서 태어나면 이 집 아들이고 저 집으로 태어나면 그 집 아들입니다. 살아있을 때 부모 자식의 인연으로 맺어져서 내 자식이지 죽으면 내 아들, 네 아들이 없습니다. 남편도 결혼해서 같이 살면 내 남편이고 이혼하면 내 남편이 아닙니다. 집도 그곳에 살 때나 내 집이지 살지 않으면 내 집이 아니에요. 질문자는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슬픔도 괴로움도 당연하다고 합리화를 하면 안 됩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강하게 집착되어 있기 때문에 자식 잃은 슬픔은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꿈에서 깨듯이 아들을 놔주고 자기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눈먼 봉사가 눈 뜨는 소식이에요. 제가 질문자를 위로해 준다고 괴로움이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눈을 번쩍 뜨고 꿈이라는 것을 알아야 남은 인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아이를 잃은 엄마도 행복하게 살 수 있고 남편을 잃은 여자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남편이 죽으면 부인은 행복하게 살 수 없는 분위기였습니다. 마땅히 같이 죽어야 하는데 죽지 못했다고 해서 미망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남편이 죽은 사람도 행복할 수 있고, 남편과 헤어진 사람도 행복할 수 있고, 자식 잃은 엄마도 행복할 수 있고, 부모 잃은 자식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행복할 수 있고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는 뜻이에요. 질문자는 오늘부터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합니다. 한번 웃어 보세요.”

“...”

"내가 웃어야 아이에게 좋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아이 죽은 엄마가 뭐가 좋다고 웃어. 웃으면 안 되지’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만약에 영혼이 있다고 한다면 아이의 영혼은 엄마가 우는 걸 보고 슬퍼할 겁니다. 질문자는 죽은 아이를 생각하며 울고, 아이는 엄마 생각을 하며 울고, 둘이서 계속 울고 있으면 누구에게 좋은 일이에요? 내가 웃어야 아이도 웃고, 아이가 웃는 줄 알아야 내가 웃는 거예요. 이제 부모 자식의 인연은 끝났습니다. 다시 만난다면 내가 자식의 딸이 될지 아내가 될지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정신 차리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사람들은 자식을 낳아서 기뻐하지만 자식이 곧 폭탄입니다. 자식이 잘못되면 부모는 원자폭탄이 터진 것보다 더 큰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무자식 상팔자’라고 하는 거예요. 저는 폭탄 터질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은 웃고 있지만, 자식이라는 원자폭탄이 터지면 죽는다고 난리일 거예요. 그러나 법의 이치를 알면, 같이 살면 같이 살아서 좋고, 헤어지면 헤어져서 좋습니다. 둘이 살면 둘이 살아서 좋고, 혼자 살면 혼자 살아서 좋아요. 이게 해탈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자식 잃은 부모가 정신 차리는 거라고 하잖아요?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식이라서 가슴에 묻는 게 아니라 집착을 해서 그렇습니다. 자식을 핏덩이 때부터 내 손으로 키웠기 때문에 집착이 강해요. 자식들은 부모에게 얼마나 사랑을 받았는지 잘 모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얼마나 잘해줬는지 어린아이가 어떻게 알겠어요? 이웃집 아주머니가 해 줬는지 엄마가 해줬는지 잘 모릅니다. 어른이 되어서야 조금 알게 되는 거죠. 부모가 잘해준 것보다 야단맞고 안 좋은 기억을 더 많이 합니다. 그래서 사실 자식은 부모에게 정이 그렇게 깊지 않아요. 부모는 자식을 핏덩이 때부터 키웠기 때문에 눈에 집어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인데, 그런 자식을 잃었으니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어요? 제가 중이니까 이렇게 매몰차게 이야기하지 누가 이렇게 매몰차게 말하겠어요? 그러나 정신을 차리셔야 해요. 윤회니 영혼이니 하는 것은 다 허깨비 놀음입니다. 만약 윤회를 한다면, 이렇게 만나면 남편이 되고, 저렇게 만나면 아버지가 되는 하나의 놀이에 불과한 겁니다. 윤회나 영혼이 없다면 놀이할 것도 없어져요. 부처님은 있다거나 없다는 것, 이런 얘기를 하시지 않았습니다. 다 마음이 짓는 놀음일 뿐이니 놀아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일이 힘들까 봐 두렵고 불안합니다. 머리로는 이 일이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되지만 일이 힘들고 못하게 될까 봐 두려운 마음이 내내 깔려있습니다. 어떡하죠?
  • 저는 중국인 남편과 결혼해 중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중국 정부의 통제가 갈수록 심해지는 걸 느낄 때마다 아이들 교육문제를 두고 갈등이 많이 됩니다. 자유가 보장된 서양 교육을 받게 해야 할지 궁금합니다.
  • 명상을 할 때 왜 호흡에 집중하나요?

대화를 마치고 나서 질문자들에게 한 줄 소감을 물어보았습니다. 아들과 사별한 질문자도 조금 진정된 마음으로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어리석어 단번에 깨우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스님은 다시 한번 애정을 갖고 질문자를 위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저와 손가락 걸고 내기할까요? 내년 이맘때쯤이면 질문자는 생글생글 웃고 다닐 거예요. (웃음)

내년쯤 되면 웃고 다닐 텐데 지금부터 웃는 게 낫겠어요? 아니면 일 년 동안 실컷 울고 내년부터 웃고 다니겠어요? 실컷 울고 내년부터 웃을지 지금부터 웃을지 질문자가 선택하세요.”

“지금부터 웃고 싶습니다.”

“그래요. 언젠가는 웃을 날이 와요. 수행이란 ‘어차피 웃을 거 뭐 하러 1년 후에 웃나. 지금부터 웃지!’ 하고 마음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지금 한 생각에 사로잡혀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거예요.

질문자의 경우에는 앉아서 명상하는 것보다 차라리 절하고 운동하고 여행을 하는 것이 사로잡힘에서 벗어나는 데에 좋습니다. 인간의 뇌는 조금씩 사로잡힘에서 벗어나는 망각 작용이 있어서 시간이 흘러가면 점점 좋아집니다.

만약 시간이 흘러도 좋아지지 않고 점점 나빠지면 병원에 가봐야 해요. 사로잡힘이 심해져서 우울증이 되면 오히려 더 악화될 수 있습니다. 지금 좋지는 않지만 조금씩 나아진다면 자연치유가 되는 것이고, 갈수록 나빠진다면 곧바로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아들이 어떻고, 남편이 어떻고 하지만, 사실은 사로잡힘이라는 정신질환이에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질문자도 약을 먹으면 훨씬 안정됩니다. 울고 있지만 말고 처방을 받아서 약을 먹으면 사로잡힘이 훨씬 줄어들어요. 그러니 도움을 받아서 하루빨리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죽은 아들 생각하느라 옆에 있는 가족들 고생시키지 말고요. 아들을 잃고 보니 살아있을 때 잘할 걸 하는 후회가 들잖아요? 지금이라도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잘하는 것이야말로 죽은 사람에 대한 천도의 공덕입니다.”

여기까지 대화하고 9시가 넘어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하루 종일 정토불교대학 강의계획안 준비에 집중한 후 저녁에는 결사행자 회의에 온라인으로 참석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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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란

저도 언니를 작년 가을에 보내고
내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안개 속에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스님 말씀 듣고 정신을 차려
내가 사는 동안 살아 있는 내 주위 사람들을 살피며 살아야겠습니다.

스님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2022-02-19 18:41:56

박현주

자식을 둔 부모로써 저 어머님의 마음 어찌 위로를 해드릴 수 있을까요
법륜스님 감사합니다.
큰 위로와 힘이 되셨을거 생각하니 기쁩니다.
어제 저희 동네 음주운전 뺑소니로 고2의 학생이 횡단보도에서 그만 숨을 거뒀습니다.
그 소식에 마음이 아파서 하루 종일 속상하고 있었습니다
그 부모님도 이 말씀을 들었으면 조금이나마...
삼가고인의명복을 빕니다.

2022-02-17 01:52:10

바람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을 다시 잡습니다.
슬픔은 내 문제이고,
있다 없다도 마음이 짓는 일이라는 걸
비유들어 설명해주니 이해가 됩니다.
늘 죽음을 만날때마다 금과옥조로 삼고
반복해서 읽겠습니다.

2022-02-16 08:5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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